최신법문
불교입문
극락은 존재하는가?
극락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실제하는 세계인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처럼 부처님을 믿으면 극락에 갈 수 있는가? 극락은 "아미타부처님을 10번만 찾으면 서방정토에 나게 하겠다"는 본원력을 가진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곳이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정토사상은 염불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자기 확신이다.
무상함과 간절함
지진이나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가 잦은 일본인들의 생활상에서 무상함에 대한 자각을 본다. 역설적으로 한 번 지나간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무상함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는 한다.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하는 것은 아상 때문이다. 나, 나의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등 '나'의 개념이 확장되기 때문에 집착이 일어난다. 불교의 자비는 '나'가 없어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이 슬프면 나도 슬프고 상대방이 기쁘면 나도 기쁜 것. 진정한 사랑은 나를 지우는 것이다.
보시하는 마음
불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번뇌의 불꽃을 완전히 꺼버리는 니르바나 즉 열반이다.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고, 선정에 들고, 지혜의 눈을 여는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이 계정혜 삼학에 매진할 수는 없는 일. 일반 불자들이 금생과 내생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해야 할 일로 보시와 지계를 제시한다.보시의 의미를 넓게 설정하면, 다른 사람에게 내 자신을 낮추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요즘 말로 '봉사'라고 한다. 또한 불자 5계를 지키는 지계 또한 선업을 쌓는 훌륭한 방법이다. 이번 생에 쌓은 보시와 지계, 두 가지 선업으로 하여금 내생에 분명히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제사가 궁금해! 귀신은 있다? 없다?
백중은 영가님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는 불교의 명절이다.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돌아가신 영가님이 실재한다고 전제하는 바, 영혼의 유무와 귀신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있다고 믿자니 찝찝하고 없다고 치부하자니 무언가 미덥지 않은 '귀신'의 존재!귀신은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귀신이라는 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 마음이 만들어내고 마음이 상을 키운다.
운명을 믿습니까?
사람들은 왜 운명을 믿는가?만일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를 바꾸는 어떤 노력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연'이 전적으로 지배하는 세계라면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신조차 미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불교의 인연설은 어떠한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연설을 숙명론이나 운명론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하신 인연설은 인연의 고리가 마치 그물망처럼 촘촘하여 미처 우리가 상관관계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누군가 대신 말해주길 바라지 말고, 자신의 욕망을 의지와 비전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자비에 대하여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증심사 목요봉사팀은 매주 목요일 자비를 행하고 있다. 자비심이란 무엇일까?자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서양 학자들은 사랑을 에로스, 필리아, 노도스, 프라그마, 아가페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불교의 자비도 사랑의 하나이다. 이처럼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연애감정'만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을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라"고 하는 부처님의 을 구절구절 살펴보며 불교의 사랑과 자비를 다시금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불교교리
불교는 종교인가?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로 꼽힌다. 과연 불교는 종교인가? 종교의 3대 요소는 교주, 교리, 교단이며 불교 역시 부처님이라는 교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교리, 부처님의 제자들의 집단인 교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불교의 본질은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은 수행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서구에서 정의하는 종교에 부합하다기보다는 종교라는 외피, 즉 옷을 입고 있는 것에 다름 없다. 수행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행을 닦아 마음을 바꾸는 것이며, 우리가 다니는 절은 바로 '우리도 부처가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같이 수행하는 수행 공동체이다.
삶과 죽음
2019년 백중 천도재 기간에 생각하는 삶과 죽음. 죽음이 삶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나이듦에 따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전염병이나 자연재해 등 죽음을 앞세운 자연과의 전투에서 승리해온 우리 사회는 어느새 우리의 삶으로부터 죽음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외면하고 터부시하는 사회적, 개인적 인식 속에서 짙어지는 죽음에의 존재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노욕이 되기도 하고 지혜로운 수용이 되기도 한다. 삶과 죽음,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윤회(輪廻)
백중 기간에는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천도재를 지낸다. 죽은 사람이 무언가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윤회사상에 기반한 의식이다. 윤회란 무엇인가? 인도 바라문교에서 파생되어 불교에서 다르게 해석한 윤회에 대하여 알아본다. 부처님은 윤회하는 주체인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한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인연)'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일 뿐 그 자체라 함직한 것이 없다는 것을 곰곰이 이해해보자.
의학적 죽음, 현실적 죽음
백중 기간에 생각하는 삶과 죽음.의학적으로는 장기 이상, 심폐사, 세포사 등 일정 부위를 기준으로 죽음을 판단한다. 반면 우리가 인식하는 죽음의 순간은 다르다. 육신의 모습이 살아있는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오늘의 화두는 이런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짓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언젠가는 죽을 송장을 사람이게끔, 살아있게끔 끌고가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2019년 증심사 백중 2재 법문으로 함께 생각하는 부처님. 증심사 비로전은 부처님의 법신으로 불리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부처님은 보신, 법신, 화신의 삼신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보신은 선업의 과보로써 부처님이 된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법신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화신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이 세상에 화현한 모든 존재를 말한다. 신구의 삼업이 뻗어나가는 마음머리에 부처님을 붙여놓으시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든 것 중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불교의 전파 과정을 따라가면서 생각해봄직한 화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고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 고대 인도인들은 이미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고차원적인 철학과 고민에 천착했다. 그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탄생한 불교는 태생적으로 인도사상과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 속에서 불교의 외피를 입은 인도사상은 서쪽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티벳과 중국 등 동쪽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이곳에 전해진 광범위한 인도/불교사상 가운데서 불교를 불교이게끔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세계 종교의 현황
불자인 우리는 불자들을 주로 만나게 되기에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우리나라에서는 무교인의 비율이 56%로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많으며, 그중에서도 불교를 믿는 사람은 10명 중 1명에 불과하다. 세계적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은 점차 늘어난다고 전문가들은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종교인이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흐름 속에서 불자인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죽음과 제사 그리고 불교
백중 기도 기간 중에 생각하는 죽음과 제사, 그리고 불교.의학적 죽음은 뇌, 심장, 폐 등 세 가지 주요한 기관의 정지상태다. 사회적인 죽음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삶에서 고인을 배제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의학적 혹은 사회적 죽음의 개념이 아니다. 내가 없어지는 것, 그것이 두려운 것, 그렇기에 죽음을 두려워 한다. 49재는 돌아가신 영가가 염라대왕 등의 재판을 받으러 가기 전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하는 시간이다. 영가들은 삶에 대한 애착을, 그리고 산 사람들은 영가에 대한 애착을 털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백중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보다 공을 들여 영가를 잘 보내드리기 위한 의식이며, 이것은 부처님의 말하는 자비의 실천이자 봉사에 다름 아니다.
신행
지심귀명례
예불은 가장 기본적인 종교의식이자 수행이다. 예를 갖추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 즉 하심이다. 몸과 마음이 함께 해야 진정한 하심이며, 중생심을 없애는 수행이 곧 하심이다. 귀는 본래 부처인 자신에게 돌아감을 의미한다.
생활불교
부적은 희망이다
"정초에 부적을 찾으시나요?"부적은 미신이라고 치부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부적을 찾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적은 희망이다. 소원은 다만 바랄 뿐이지만, 희망은 바라는 바가 강해서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낳는다. 인간은 마음 속의 희망이 빛바래고 변하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 밖에 희망을 형상화하여 이를 통해 희망을 키우고 다진다. 소원이 강하면 희망이 되고, 희망을 키우면 의지가 되고, 의지가 있으면 뭐든 실현할 수 있다. 희망을 형상화한 것 중의 하나가 부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적도 우리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랬구나
미움과 증오로 휩싸인 번뇌의 불꽃을 끄는 주문은 "그랬구나~"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프레임은 다른 관점 혹은 입장에 의해 다르게 짜여진다. 일어난 현상과 내 마음을 또렷하게 관찰해야만 나의 입장과 관점에 휘둘리지 않고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를 보면 궁극적으로 갈등의 원인을 만들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지혜로운 이가 미움을 대하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주의 깊게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과 남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다."
수행의 배터리
자동차가 잘 달리려면 평소에 고장이 없는지 확인하고 꾸준히 주행하여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도록 해야 하듯, 수행에도 배터리 충전이 필요하다. 수행을 해야 수행할 수 있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평소에 꾸준하게 예불하고 기도해놓아야만 인생의 배터리가 방전됐을 때 자연스럽게 부처님에게 기대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부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 하기 싫어도 하고 바빠도 하고 습관적으로 그냥 하는 예불과 수행. 이것만이 우리를 부처님처럼 가는 길 위로 인도한다.
마음의 상처
부처님은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쓸데없이 비탄에 잠기고 혼미해지는 두 번째 화살을 스스로 자초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과 듣지 않은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을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차이를 드러낸다. 두 번째 화살을 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생각을 불려가면서 기분이 좋다 나쁘다 화가 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화살의 상처를 만들듯 사람들은 마음으로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스스로가 만든 세계를 잘 살펴볼 일이다. 이것이 내가 만든 감정인지 밖에서 온 행위인지를 잘 관찰하면 두 번째 화살 역시 자연스럽게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혼자가 나아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족 형태는 1인 가구이다. 학생, 취업한 청년, 주말부부 등 다양한 형태의 1인 가구가 존재하지만 최근 급증하고 있는 것은 55세 이상의 '황혼 이혼' 가구이다. 오랜 세월 살아온 부부가 결별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왜 나의 배우자가 남보다 못한 사람이 되었는가? 그것은 그 사람에게 덧칠한 나의 감정 때문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에게 나의 감정을 덧칠한다. 내 감정으로 덧칠하기 전 원래 그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졌을까? 오랫동안 덧칠한 감정을 걷어내고 볼 때 비로소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희망에 대하여
희망, 소망, 바람, 소원 같은 말은 모두 '무언가를 바란다'는 뜻이다. 절에 기도를 하러 오는 사람들도 갖가지 희망을 진고 있다. 희망은 삶의 필수 요건이지만, 희망이 삶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아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흔히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를 또렷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들어주는 의존적인 소원을 내 스스로 이뤄나가는 희망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음의 환승역
나는 화를 내고 싶지 않은데 왜 주변 사람들은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왜 세상은 나를 화나게 하는 걸까?'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화는 누군가와 주고 받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마음이 거친 상태에서 고요한 상태로 갈 때는, 마음 중간에 만들어 놓은 환승역으로 찾아가자. 환승역이란 다름 아닌 평상시에 습관적으로 해왔던 수행이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버럭!' 대신 '옴!' 하고 외치는 것. 그것이 화를 해결하는 비결이다.
자신만의 침묵
해외여행을 떠나면 느껴지는 편안함이 있다. 낯선 사회와 낯선 언어로 하여금 그 나라와 내가 차단되는 데에서 오는 해방감이다. 세계와의 차단은 일상생활에서 나도 모르게 받는 스트레스를 풀어 준다. 이런 상태를 침묵이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의 의미를 확장시키면 보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으로부터의 차단까지 나아간다. 침묵이 중요한 이유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나가는 마음을 잠시 중단시키는 일, 그 연습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두 갈래 길: 보살과 중생
마녀의 함정에 빠져 위험해진 헨젤과 그레텔 남매는 기지를 발휘해 위험에서 벗어나고 마녀를 물리친다. 환경을 극복하고 상황을 바꾸어 쟁취한 인과응보는 중생의 길이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전생에 조리와 속리라는 어린이였다. 이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다음 생에는 의지할 바 없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이는 보살의 길이다. 역사 속에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늘 선택과 맞딱뜨린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보살의 길과 중생의 길, 당신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노년의 삶
산업화, 현대화, 도시화가 가속하면서 경로사상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경로사상이 사라진 것은 마을의 실종, 공동체의 해체와 연관되어 있다. 마을공동체의 대안은 무엇일까? 느슨한 관계이다. 개인의 사생활은 침범하지 않으면서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느슨한 관계는 시골의 마을회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찰이 또 다른 대안일 수 있다. 절에 나와 참배도 하고 밥도 먹고 법우들과 차도 마시고 노닥거리는 것이 느슨한 관계에 다름 아니다. 불자라면, 여기에 대해 내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수행을 해야 한다. 매 순간 내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 번뇌가 사라지는 부처님의 경지에 다가가기 위해 수행하며 사는 것이 바로 노년의 삶이며 지혜이다.
화를 치료해주는 특효약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아서, 내 마음 대로 되지 않아서 우리는 화를 낸다. 그러나 세상일은 내 마음 대로 할 수 없고, 세상을 나 혼자 사는 것도 아니다. 화가 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화를 다스릴 수도 있고 끌려갈 수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화를 제거하는 것이다. 화를 치료하는 특효약은 화가 나고 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감정을 알아차리면 감정이 사라진다. 그리고 순간순간의 감정을 잘 보기 위해서는 평소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어두어야 한다.
나의 정체성은?
영화 으로 톺아보는 정체성 이야기. 나를 나이게끔 하는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1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변함 없는 나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변수이고 '정체성'은 상수이다. 나는 정해져 있는 무엇이 아니며 무엇이든 대입할 수 있는 존재이다. 정체성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말한다. 이제는 질문을 바꾸어보자. '나는 누구인가?'에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자. 나라고 하는 것이 늘 변하는 가운데 지금 여기의 나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직업 선택의 기준
직업은 동전의 양면처럼, 봉사의 측면과 생계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우리 모두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세상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직업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열정이나 욕망보다 적성으로 직업을 고르되, 직업이 가지는 봉사의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원망하는 마음
미운 마음이 커지면 원망이 되고, 원망이 커지면 원한이 되고, 원한이 사무치면 저주를 품는다. 원망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내가 힘든 원인이 내가 아닌 타인에게 있다는 전제로 원망은 자라난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남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남의 인생에 간섭하여 이 길로 가라, 저 길로 가라고 통제하는 것은 부처님도 못(안) 하는 일이다. 와 에 비추어 원망하는 마음의 근원을 찾아본다.
사회
우리시대의 영웅
묻지마 살인, 총기난사... 국가가 방치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는 다양한 사건, 사고는 오로지 국가의 책임 방기 때문인가?'나는 힘이 없고 선량한 시민일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개인들은 힘이 막강하면서도 이타적인 영웅을 원한다. 영화의 주인공 같은 영웅도, 경전 속 불보살도 없는 현실에서 대안은 무엇일까? 공동체의 회복이다. 자율적인 소규모 마을공동체의 복원만이 책임 있는 개인을 만들고 이타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일본의 경제 침탈, 그 본질과 대응
2019년 8월, 일본의 아베 정권은 한국과의 경제적 협업을 반려하겠다는 의미의 '화이트 리스트 제외'를 공표했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일본의 경제 도발에 대응하고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도 소련을 견제해야만 하는 미국의 묵인 아래 일본의 국가주의, 제국주의는 청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쟁을 일으킨 각료들이 여전히 일본의 정치를 주름잡고 있다. 아시아를 제멋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과거의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일본 극우세력의 득세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또 국민은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가?
관용
2019년 8월, 일본 '표현의 부자유전'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헤프닝과 영화 '나랏말싸미' 역사왜곡 논란으로 돌아보는 우리 사회의 관용 정신.관용은 존중이다. 나와 당신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이야기의 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일본 우익들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사태와 일부 타종교인들의 '나랏말싸미' 배급 중단 요청 등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기에 발생한 일이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일조한다. 관용의 정신이 바로서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이 다른 타인과 토론을 통해 자기 주장을 정당하게 펼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해본적 없엇 낯설고, 마음 편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공동체주의, 개인주의
공동체주의는 좋은 것인가?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주의는 회복해야 할 정신적인 가치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견 공동체는 '폐쇄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집단주의로 변질될 소지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불교의 자비는 뜨거운 사랑이라기보다 차가운 배려에 가깝다. 나라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이 중요한 만큼 타인 역시 한 사람의 주체적 개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주창하는 공동체정신이 개인의 주체성을 말살시키지는 않는지, 개개인의 경험에 빗대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경전
오백 명 산적을 교화한 상낏짜 사미
법구경 110번째 게송, 500명의 도적을 교화시킨 쌍낏짜 사미의 이야기. 7살 난 어린 사미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기 그지 없다. 이는 성인인 수행자들보다 높은 경지의 바른 수행의 결과이다. 넓은 의미에서 수행자는 불교를 믿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좁은 의미로는 전업하여 수행자인 '프로 수행자'를 말할 것이다. 다만 성직자와 수행자는 별개의 의미이다. 좁고 넓은 수행자를 알아보며, 우리 자신은 어떤 수행자가 되어야 하는지 또한 수행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알아본다.
마음의 눈이 멀면
법구경 1, 2번째 게송과 함께 하는 행복의 조건. 아라한과를 증득했지만 눈이 멀어버린 짝꾸빨라 스님과 치료비를 아끼려다 죽음에 이른 구두쇠의 일화를 통해 수행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한다. 마음의 눈이 멀었다는 것은 지금 여기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본다는 것은 바로 전 찰나의 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내 마음을 보지 못하면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반야심경의 핵심
불교의 방대한 가르침의 요약본인 반야심경. 그리고 반야심경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첫 구절."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첫 구절이 담고있는 6개 키워드로 반야심경의 핵심을 설명한다. 불교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와 수행의 목표, 방법이 이 안에 다 들어있다.
보왕삼매론(2019)
인생은 욕계와 사바세계 사이에서의 줄타기이다. 욕계는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이며 사바세계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세상이다. 욕망이 시키는 대로 살면 이 세상에는 고통밖에 없지만 욕망을 잘 다스리면 세상은 자비로 가득 찬다.은 아주 평이하고 쉬운 경구이지만, 역으로 읽으면 사바세계의 현실이 오롯이 드러난다.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장애가 됨을 알고,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그 어떤 일도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임을 알자. 봉사하는 생활과 도덕적인 생활로 보살이 되는 길을 걷자.
불교윤리
선과 악
영화 '사바하'로 생각하는 선과 악.기독교에서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을 상정하고, 죄를 씻기 위한 첫 계명으로 순종을 말한다. 우리 일반 사회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사회적 판단에 의해 동일한 행위가 선이 되기도, 악이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선과 악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죄에는 자성이 없다. 다시 말하면 공하다. 다만 탐진치에 사로잡힌 행이 악이요, 무명을 벗어나 자비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선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