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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죽음을 생각하라

살아있는 우리는 살아온 경험밖에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가며, 심지어 천년만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욕심에 휘둘리고 번뇌에 휩싸이고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되는 부작용이 생긴다.
임종에 닥쳤을 때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지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직면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갈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부처님 법 뿐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의 빈소를 차리자

장례식장에 조문을 다녀오면 느낀 삶과 죽음.
누군가 돌아가셔서 조문을 다녀오게 되는 일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조문은 관례화된 의식이다. 조의금을 준비하고 영정에 절을 하고 유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지인들과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돌아가신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은 고작 2~3분 남짓이다.
내가 고인의 입장이 되어 나의 빈소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나는 죽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유족들이나 조문객들에게도 더이상 나는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삶은 1인극 판토마임과 같아서, 타인은 나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짐작할 뿐, 나와 완벽하게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못한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과 배우의 관계가 끝나듯, 삶이 끝나면 세상과 타인에게서 나는 사라지고 그 관계 역시 끊어진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인 무아이다. 무명으로 가득 찬 아상을 털어내고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잘 사는 길이며, 잘 죽는 길이며, 불교를 제대로 실천하는 길이다.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1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을 통해 알아보는 수행자의 덕목.
스님(중)은 성직자, 수행자, 생활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경허선사의 ‘중노릇’의 대상은 수행자로서의 스님이다. 스님뿐만 아니라 수행하며 살겠다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허스님이 말하는 중노릇을 삶의 태도로 체화해야 한다.
왜 수행자로 살아야 하는가?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내가 없음을, 삶도 죽음도 없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 몸은 내가 아님을 알고, 모든 것이 그물코처럼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은 전생과 이생, 내생 역시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찾아야 하며, 마음을 찾고자 하는 자는 수행해야 한다.

봄비 2

신라시대 골품제에 부딪쳐 좌절한 당대의 문장가 최치원은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 날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 ‘추야우중’을 썼다. 이 시는 흔히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해석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데에서 오는 좌절감이 묻어난다.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것은 중생들이 가지는 가장 큰 병인 무명, 즉 ‘내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맥락은 중국의 시성 두보의 시에서도, 사형선고를 받은 70년대 참여시인 김지하의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각국사 혜심스님은 이렇게 무명에 젖어 있는 중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비가 내리는데 어디를 쏘다니느라고 쓸 데 없는 노력을 하는가?” 라고. 스님은 장대비가 쏟아지면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올 때는 가만히 앉아 그물코처럼 연결된 인드라망을 떠올리자. 그 화두에 골몰해보자.

봄비 1

비가 오면 감상에 젖어든다. 지나간 옛 인연을 떠올리기도 하고 괜스레 울적한 심상이 되기도 한다. 옛날 사람들은 내리는 봄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국의 시성 두보는 ‘춘야희우’라는 시에서 비가 내리는 정취를 묘사하면서도 아직 버리지 못한 사대부의 꿈, 즉 중생심을 드러낸다.
반면 진각국사 혜심스님은 내리는 보슬비를 보며 딴 생각 피우지 말고 연기실상의 이치를 깨닫도록 노력하라는 당부의 말을 했다.
알듯말듯한 연기실상의 세계. 진리. 오로지 그 생각만 하는 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며,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