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에게 이런 일이…’ 라는 생각이 들 때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나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하면서 분노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공은 나’, ‘세상의 중심이 되어라’라는 말을 사회적으로 학습하며 살아간다. 기억속에 있는 서사적인 나와 현재 존재하는 체화된 나가 결합되어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것은 거대한 착각이며, 그 착각에 의해 스스로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고통과 분노의 순간에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수렁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매일매일 꾸준히 수행해온 과거의 나이다. 정진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다리이지만 동시에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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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생각이 많은가
우리는 왜 과거의 일을 곱씹어 후회하고 미래의 일을 불안해 할까?
뇌의 기본모드신경망은 860억 개의 뇌세포를 연결하는 100조 개의 시냅스로 이루어져 있고, 뇌세포가 시냅스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대에 가깝다. 뇌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느낄 때에도 10초에 한 번씩 무언가를 생각하도록 작동하고 있다.
이렇게 작동하는 뇌는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다가올 미래를 불안해 하는 식으로 원시시대부터 현재까지 진화해 왔으며, 다른 한편 원시시대와 다른 환경에 사는 현대 인간들에게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신경망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고 발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인지조절신경망이며, 우리는 수행을 통해 뇌세포와 신경망을 개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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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수행, 생전예수재
윤달에 한 번 돌아오는 생전예수재는 살아생전 공덕을 쌓는 나를 위한 수행이다.
생전예수재는 내가 죽었을 때 자식들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생전 내가 스스로 지어놓은 선업 공덕의 힘으로 중음계 시왕들에게 좋은 판결을 받아 더 좋은 다음 생을 받음으로써 깨달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생전예수재에서는 경전과 돈을 올린다. 경전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인 연기법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돈을 올리는 것은 세상 만물에게 빚진 것을 갚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전예수재는 지금 이 순간 미리 열심히 수행하는 의식이다. 수행의 끝과 시작은 육바라밀이다. 모든 수행의 결과는 보시해을 하는 것이며, 이렇게 스스로 수행하고 선업 공덕을 쌓는 것이 생전예수재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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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자비 vs 기독교의 사랑
계를 지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행위다. 불교에 자비가 있다면 기독교에는 사랑이 있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그 차이점을 알아보자.
불교의 자비는 나와 남이 모두 이로워야 한다는 자리이타의 정신, 나아가 나와 남의 분별이 없다는 연기법의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자비의 실천 자체가 깨달음을 향한 탐구이자 수행에 다름 아니다.
반면 기독교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하느님에 대한 섬김의 증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이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불교의 자비는 진리와 수행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기독교의 자비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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