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처(處)로 풀어본 김춘수의 꽃

시인 김춘수는 말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상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애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에게만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자신의 세계에 인식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것을 "작자는 없지만 행위는 영원하다"고 말했다. 행위에 대해 욕망을 가지면 이름을 부여하게 되고, 이름을 부여하면 마음에 이미지가 생성되고, 마음에 이미지가 생성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은 나에게 있어 '존재하는 것'이 된다.
내가 따로 있고 대상이 따로 있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행위, 듣는 행위, 행위가 있기에 여기에 따라서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생겨난다. 때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은 없다.
중생은 욕망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을 보살의 원력으로 바꾸는 것이 수행이며, '원래 있는 세계'라는 것이 우리의 뒤바뀐 헛된 생각임을 깨닫는 방법 역시 오직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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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식 제사의 의미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시식과 법식을 베풀어서 영가님들로 하여금 하루 빨리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사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만남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인식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나 전기에너지와 같이 분명하게 작용하고 있다.
제사는 부처님을 청해 법을 설하는 자리이다. 부처님이 설법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여러 부류들이 참석한다. 불보살님은 물론 대상이 되는 영가와 유주무주 고혼애혼들이 두루 참석한다.
이렇게 부처님의 법을 설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공덕을 쌓는 것이다. 공덕을 쌓아 나도 모르게 지은 악업을 소멸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불교식 제사는 부처님의 법을 베푸는 깨달음의 장이자 공덕을 짓는 수행의 장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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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가는 지름길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은 무엇일까? 자기 성찰이다. 알아차림이다.
법구경 33, 34, 35번 게송을 통해 마음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보자. 마음은 본디 흔들리고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을 잘 다스리겠다고, 중생심에서 벗어나 해탈로 가는 수행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가장 먼저 몸부림치고 반항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수행하지 않은 마음이 바로 중생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을 믿지 말고 항상 다스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마음을 다스릴 때에는 누군가 언제나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처럼 방일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마음을 길들이면 길들여진 마음이 행복을 가져온다.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 즉 자기 성찰은 비단 불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나랏일을 하는 정치인들과 위정자들 역시 다른 어떤 것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성찰할 줄 알아야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정책을 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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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인간관계, 진정한 친구란?

누구나 진정한 친구를 바란다. 변함 없는 친구에게서 위로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나 영원한 우정이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는 현실에 실재하는 친구가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어 놓은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친구라는 개념이 아바타임을 알고 현실의 친구와 끝임없이 동기화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의 친구도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변함 없는 우정과 친구를 바라는 것은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변함 없이 정신적, 정신적 이익을 주는 사람을 원한다. 이익을 바라는 것은 왜인가? 뿌리 깊은 아상이 있기 때문이다.
변함 없는 친구를 만들고 싶다면 나를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 자기 성찰의 힘을 통해 아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 대로 사는 길이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갖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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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왜 제사를 지낼까?

예전에는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요즘은 절에 제사를 맡기는 경우가 많다. 절에서 제사를 지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정성을 다하는 것 같지 않고, 조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같아서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사의 본래적 의미와 불교적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본디 제사는 인간 주위에 있는 광범위한 대상을 향해 제물을 바치는 행위였다. 이것은 살아있는 인간이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기도이자 발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행하는 제사는 유교적 의미로 재해석된 제사이다. 유교에서는 나의 근원인 조상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제사를 재해석했다. 불교적 의미의 제사는 영가님이 깨달음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다양한 층위의 제사라는 개념이 혼재되어 있으면 제사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것이 당연하다. 시대에 맞게 변화해오는 제사의 흐름 속에서 불자인 우리가 길어올려야 할 것은 보다 불교적 의미의 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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