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윤리

오계(五戒) : 불망어(不妄語)

아함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말씀을 통, 해 이해하는 오계, 불망어. "라훌라야,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의 출가수행이란 이와 같이 조금 남아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과, 고의로 거짓말을 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과, 특히 부끄러워하지 않는 출가수행자를 경책했다. 출가수행자는 언제나 철저하게 계를 지켜야 하며, 불망어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재가자의 경우에는 엄격하게 불망어계를 지키기 어려운 현실이므로, 최소한 법회날이나 포살일만이라도 제대로 계를 지키고자 하는 스스로의 의지가 필요하다.
Read more

불교교리

종교(불교)의 여러 가지 모습

하나의 종교에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불교도 그렇다. 혹자는 불교를 수행 시스템이라고 하고, 포교 현장에서는 기복신앙의 모습을 목도하며, 일상 행동의 기준 즉 실천윤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합쳐진 모습의 불교가 불교로 역할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불교의 얼굴 가운데 내가 아는 모습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습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불교의 여러 면면을 하나의 뿌리로 융합해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별한 공간과 신성한 시간 속에서 일상의 불안함을 떨쳐내고, 신성한 의식을 일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실천윤리로써의 불교가 등장하며, 윤리를 관철시키기 위한 힘으로써 절대적인 존재를 성정하게 되는 일련의 사이클을 이해할 때 불교의 여러가지 모습을 큰 틀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Read more

신행

요즘 절에서 미륵부처님을 모시지 않는 이유

익산과 완주 지역에는 백제시대 불교유적이 남아있다. 백제를 비롯해 삼국시대의 불교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미륵불은 56억7천만 년 뒤에 이 세계(용화세계)에 와서 진리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할 미래불이다. 미륵신앙은 선업을 쌓은 공덕으로 미륵보살이 계신 도솔천에 가 깨달음을 얻겠다고 하는 미륵상생 사상과 훗날 왕림하는 용화세계에서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겠다는 미륵하생 신앙으로 구분된다. 특히 미륵하생 신앙에는 미륵불의 파트너로 '전륜성왕'의 존재가 예고되는데,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지나오면서 통치, 정치, 혁명의 이념으로 미륵신앙을 차용하는 배경이 된다. 미륵사상은 꾸준히 변화해왔고 현대에 와서는 그 흔적조차 미미한 수준으로 희미해졌다. 달라진 시대에 우리는 불교는 어떻게 차용할 것인가? 역사 속에서 그 힌트를 엿본다.
Read more

불교교리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이유

불교의 의식이나 경전은 삼귀의로 시작한다. 삼귀의는 거룩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겠다는 다짐이다. 귀의란 '피난처로 삼겠다'는 뜻이며, 이는 유일신 신앙에서 흔히 말하는 순종 혹은 복종과는 달리 나 자신과의 약속에 다름 아니다. 지혜와 자비를 동시에 구족한 부처님은 이 세상의 이치인 연기를 깨달은 분이다. 모든 것이 서로서로 의지하고 있으며 모든 것은 한몸이라는 데에서 나오는 커다란 자비심이 바로 동체대비이다. 이러한 동체대비를 낼 수 있도록 언제나 부처님을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이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의 참뜻이다.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말은 '마음은 마치 화가와 같아 욕심에 따라 세상을 그려낸다'는 마음의 진리, 실상을 바로 본다는 말이며, 그러한 길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믿는 것이다. 승가에 귀의하는 것은 수행자 공동체를 유지하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이렇게 불법승 삼보에 귀의할 때 우리의 삶은 보다 행복해지고 부처님의 진리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Read more

불교교리

12처(處)로 풀어본 김춘수의 꽃

시인 김춘수는 말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상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애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에게만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자신의 세계에 인식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것을 "작자는 없지만 행위는 영원하다"고 말했다. 행위에 대해 욕망을 가지면 이름을 부여하게 되고, 이름을 부여하면 마음에 이미지가 생성되고, 마음에 이미지가 생성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은 나에게 있어 '존재하는 것'이 된다. 내가 따로 있고 대상이 따로 있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행위, 듣는 행위, 행위가 있기에 여기에 따라서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생겨난다. 때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은 없다. 중생은 욕망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을 보살의 원력으로 바꾸는 것이 수행이며, '원래 있는 세계'라는 것이 우리의 뒤바뀐 헛된 생각임을 깨닫는 방법 역시 오직 수행이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