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수행, 생전예수재

윤달에 한 번 돌아오는 생전예수재는 살아생전 공덕을 쌓는 나를 위한 수행이다.
생전예수재는 내가 죽었을 때 자식들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생전 내가 스스로 지어놓은 선업 공덕의 힘으로 중음계 시왕들에게 좋은 판결을 받아 더 좋은 다음 생을 받음으로써 깨달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생전예수재에서는 경전과 돈을 올린다. 경전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인 연기법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돈을 올리는 것은 세상 만물에게 빚진 것을 갚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전예수재는 지금 이 순간 미리 열심히 수행하는 의식이다. 수행의 끝과 시작은 육바라밀이다. 모든 수행의 결과는 보시해을 하는 것이며, 이렇게 스스로 수행하고 선업 공덕을 쌓는 것이 생전예수재의 핵심이다.

여행을 통해 수행 하는 법 알아차리기

배낭 메고 혼자 다녀온 길따라절따라 일본 답사에서 길어 올리는 ‘여행을 통해 수행하는 법’.
여행은 관광과 다르다. 관광은 돈만 내면 모든 것이 알아서 세팅되는 일상의 연장선상이고, 여행은 낯선 환경에 자발적으로 놓여져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행위이다.
여행에서는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과 내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음을 경험한다. 낯선 말, 낯선 글자, 낯선 문화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어떤 정보가 들어와도 내면이 자극되지 않는다. 이렇게 내면이 외부와 분리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나 자신을 향하게 된다. 주변 환경에 내 마음이 끌려다니지 않는 것, 이것이 수행이다.
또한 여행은 일부러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해서 어려운 미션을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이다. 어려운 것을 풀어가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면밀하게 스스로를 살피게 된다. 여행이 수행과 맞닿아 있는 이유다.

우리가 심심한 이유는?

심심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흔히 혼자 있을 때 “심심하고 외롭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심심함과 외로움은 다른 종류의 감정이다. 심심함은 현재 해결해야 할 목적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반면 외로움은 내가 가진 애착과 집착이 해소되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심심함은 마음의 허기와 같다. 끊임 없이 외부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이 하는 일인데, 외부에서 자극이 없으니 또 다른 자극을 달라고 보채는 현상이다.
심심함을 다스리는 방법은 수행이다. 바깥으로 달려 나가려는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연습을 하면, 그리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게 되면 비로소 마음 밖에 있는 세상이 환하게 비추어 보일 것이다.

[길따라절따라] 서산 마애여래삼존불을 친견하다

길따라절따라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답사기. 백제시대에 조성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 백성들에게 소원을 이뤄주는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실제 마애부처님이 취하고 있는 수인(手印)은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는 시무외인과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여원인이다.
따지고 보면 부처님은 신(神)이 아니라 깨달음을 증득한 수행자일 뿐인데 사람들은 왜 소원을 빌었을까? 고대 인도사회의 푸자(공양) 문화가 변화한 것으로,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고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큰 복을 받는다는 통념이 이어져온 때문이다.
불교는 수행을 하는 수행자와 수행자를 의지하고 공양하는 신도라는 두 개의 축이 상호 교류함으로써 유지, 발전된다. 불교의 수행과 정신문화를 후대에 이어나가는 것도 이 두 개의 축임을 잊지 말고 신행과 수행에 임하자.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이유

불교의 의식이나 경전은 삼귀의로 시작한다. 삼귀의는 거룩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겠다는 다짐이다. 귀의란 ‘피난처로 삼겠다’는 뜻이며, 이는 유일신 신앙에서 흔히 말하는 순종 혹은 복종과는 달리 나 자신과의 약속에 다름 아니다.
지혜와 자비를 동시에 구족한 부처님은 이 세상의 이치인 연기를 깨달은 분이다. 모든 것이 서로서로 의지하고 있으며 모든 것은 한몸이라는 데에서 나오는 커다란 자비심이 바로 동체대비이다. 이러한 동체대비를 낼 수 있도록 언제나 부처님을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이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의 참뜻이다.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말은 ‘마음은 마치 화가와 같아 욕심에 따라 세상을 그려낸다’는 마음의 진리, 실상을 바로 본다는 말이며, 그러한 길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믿는 것이다.
승가에 귀의하는 것은 수행자 공동체를 유지하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이렇게 불법승 삼보에 귀의할 때 우리의 삶은 보다 행복해지고 부처님의 진리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불안은 어떻게 다스릴까?

불안이 너무 심하면 의료적 치료가 필요하고, 불안이 너무 없으면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다.
불안은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내보내는 신호로,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적인 감정이다.
중생은 ‘나’를 지키기 위해 불안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나를 지키고자 하는 뿌리 깊은 생각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을 피하라는 신호가 불안한 감정으로 표출된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나를 지키는 데에서 나아가,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생한다. 때문에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내 안에 뿌리 깊은 나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직시해야 한다. 그 방법은 일상 속 수행이다.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4

지식을 많이 쌓는 ‘똑똑한 분별’은 수행에는 쓸모가 없는 일이다. 내가 죽는다는, 나도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마음을 깨치기 위한 ‘간절함’이 생긴다.
마음을 깨치기 위해서는 수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음심과 탐심, 진심을 멀리해야 하고 재물과 색이라는 재앙중의 재앙을 조심해야 한다.
착한 마음 나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착하다 나쁘다 하는 분별 자체를 떠나야 하며, 주변의 상황에 상관 없이 동요가 없고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상태 그대로가 부처의 마음이다.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3

불교 공부는 할수록 쌓이는 공부가 아니라 평생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공부이다. 간절한 동기부여가 없으면 말짱도루묵이 되는 공부이기도 하다.
재물욕과 권력욕과 명예욕을 바라는 중생심은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생긴다. 목숨이라는 것에 뿌리를 깊게 내린 중생심을 걷어내는 것은 목숨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공부를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밖으로 끄달리거나 안으로 분별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잘난 체 말고 숙맥처럼, 어린아이처럼, 귀머거리처럼, 벙어리처럼, 여행자차럼 관찰자 모드로 지낼 때야 비로소 내 마음을 가지고 있는 망상들을 없앨 수 있다.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2

생사를 면한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닌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서 중생들의 수행은 시작된다. 내 마음을 다스리고 내 생각을 다스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수행은 나아가 생각의 본질의 무엇인지를 탐구하게 하며, 생사를 면하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화두는 의심하는 것이되, 의심하기 전에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을 한군데 가만히 두는 연습을 먼저 해야 한다. 주력이나 독경, 염불 등 다양한 수행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딴생각이 들더라도 수행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딴생각을 하는 간격이 길어질수록 수행에 몰입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렇게 마음을 붙잡아두는 연습이 끝나면 붙잡은 마음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관찰한다. 이렇게 수행할 수 있도록 사람으로 태어난 인연이 얼마나 지중한 것인가를 느끼는 것도 훈련을 통해서 증장시켜 나가야 한다.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1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을 통해 알아보는 수행자의 덕목.
스님(중)은 성직자, 수행자, 생활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경허선사의 ‘중노릇’의 대상은 수행자로서의 스님이다. 스님뿐만 아니라 수행하며 살겠다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허스님이 말하는 중노릇을 삶의 태도로 체화해야 한다.
왜 수행자로 살아야 하는가?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내가 없음을, 삶도 죽음도 없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 몸은 내가 아님을 알고, 모든 것이 그물코처럼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은 전생과 이생, 내생 역시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찾아야 하며, 마음을 찾고자 하는 자는 수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