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열반
불자와 불자 아닌 사람을 나누는 기준은 '원력'에 있다. 모든 사람들의 원력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적 원력은 부처님의 설파한 가르침인 연기법과 공성을 지혜를 깨닫겠다는 초발심이다. 그것을 깨달아야만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한편, 흔히 같은 말로 쓰이는 깨달음과 열반은 그 의미가 엄밀하게 다르다. 깨달음은 '안다'는 것이며, 아는 것의 깊이는 사람에 따라 수행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열반은 어떠한 지점이나 목표가 아니다. 다만 말 그대로 '번뇌의 불길이 완전하게 꺼진 상태'이다.
불자들은 괴로움을 벗어나겠다는 서원을 세운 사람들이다. 절에 가는 이유가 희미해졌다면, 그저 관성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초발심을 되새김으로써 불자로써의 기준을 다시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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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고통과 행복
왜 중생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가? 고통은 일종의 신호이다. 화, 우울, 두려움, 불안함, 짜증 등의 고통의 감정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과연 고통의 신호를 받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고통을 회피하거나 무시해서는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고통의 원인을 없애야만 고통의 보상으로써의 행복을 맛볼 수 있다.
고통은 우리 안에 있는 나 밖에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 즉 중생이 보낸다. 중생이 보내는 신호를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중생의 길이다. 지혜로운 중생의 길을 보다 발전시킬 때 지혜로운 수행자의 길, 지혜로운 부처님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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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초기경전에는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들은 즉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왜 그럴까? 먼저 부처님과 같은 성인은 친견하기만 해도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자비심에 감화된다고 한다.
다른 측면에서는 깨달음의 속성을 생각해봄직하다. 깨달음은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듯 단박에 온다. 자전거를 어느 순간 탈 수 있게 되는 것과도 같다.
우리네 신행도 그러하다. 막연하게 공부하고 이해가 되는 것 같은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자신이 완전하게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마음처럼 되지 않더라도 처음 먹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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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하는 ‘개미와 베짱이’
'개미와 베짱이'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 겨울을 대비할 수 있고 베짱이처럼 놀고 먹으면 겨울이 왔을 때 고생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솝우화다. 그러나 이 교훈이 꼭 현대사회의 현실에 들어맞지는 않는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 우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개미처럼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할까? 베짱이처럼 현재를 즐기며 살아야 할까?
부처님께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실재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과거 현재 미래에 집착하는 것은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삼세가 있고 내가 있다는 무명에서 벗어나며, 다만 행위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내가 모두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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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은 비는 것인가, 짓는 것인가? (미얀마 성지순례)
미얀마의 불상들은 뚱뚱하다. 미얀마 불자들은 손이 닿는 곳이면 불상의 어디든 금박을 붙이는 공양을 올리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 부처님의 금박옷이 두꺼워진다.
금박공양을 올리며 무언가 간절하게 기도하고 복을 비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그저 무심하게 금박을 부처님에게 붙일 뿐이다. 금박공양을 올리는 것은 스스로의 공덕을 쌓기 위함이지, 개인의 복을 빌기 위함이 아니다.
간절한 신앙도 좋지만 부처님의 가르침, 특히 오계를 일상에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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