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칠성인가

칠성신앙은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민간신앙 중 하나이다. 절집에도 칠성각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중국에서 시작된 칠성신앙은 불두칠성의 신앙 안에 도교적인 내용을 담아낸 것으로, 우리나라 민간신앙과 불교문화 속에도 자리잡았다.
칠성성군은 비를 내리게 하고, 수명을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 불교에서는 이들 칠원성군이 여래의 화현이라고 보며, 그중 북극성을 상징하는 중심인물은 치성광여래라 한다.
민간신앙은 미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신앙 속에는 물 한 잔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마음과 인간이 아닌 만물을 신성시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돈이 신이 되는 물질만능의 시대에 칠성신앙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코로나19를 대하는 불자의 자세

사회를 지탱하는 서로간의 신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깨지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사회를 병들게 한 모습의 일례이다.
코로나19 대응은 의료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제 시스템을 복구하는 것, 우리 생활속에 깊이 스며든 문화를 바꾸는 것, 또한 정부의 지침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모두가 우리 사회를 자정하려는 노력이다.
불자로서는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를 수행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모습을 직시하고,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더욱 불자답게 사는 것이 코로나19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길이다.

공감하는 마음

새해를 맞이하며 전하는 덕담.
인간은 이기적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마음이 솟아난다. 그런가하면 잘 모르는 상황에는 오해와 편견에서 이기적인 생각이 피어오르는 때도 있다.
그러나 오해가 걷히고 오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면, 미안함에서 다시 공감의 마음이 생겨나고는 한다. 사소한 계기일지라도 배려심과 자비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끔은 나를 위한 기도, 내 가족을 위한 기도가 아닌 남을 위하는 기도, 모두를 위한 기도를 하도록 하자.

다시 생각하는 ‘개미와 베짱이’

‘개미와 베짱이’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 겨울을 대비할 수 있고 베짱이처럼 놀고 먹으면 겨울이 왔을 때 고생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솝우화다. 그러나 이 교훈이 꼭 현대사회의 현실에 들어맞지는 않는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 우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개미처럼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할까? 베짱이처럼 현재를 즐기며 살아야 할까?
부처님께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실재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과거 현재 미래에 집착하는 것은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삼세가 있고 내가 있다는 무명에서 벗어나며, 다만 행위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내가 모두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종교는 문화다 (미얀마 성지순례)

불교가 국교인 미얀마에서는 출퇴근길에 자연스럽게 법당을 참배하고, 생일이나 기념일 등 삶의 순간에는 어김 없이 불교와 함께 한다. 미얀마에서 불교는 특별한 종교의식이나 신앙활동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문화에 가깝다.
종교가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근현대 역사의 질곡을 겪으며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여 기존에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던 도덕과 윤리 같은 덕목이 희미해져버렸다.
불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일상의 문화가 되도록, 내 삶에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당신의 나한님은 누구십니까?

증심사는 매년 오백전의 500 나한님들과 불자들의 인연을 맺는 오백대재를 봉행하고 있다. 나한은 부처님 당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깨달은 분들이다.
깨달은 분들과 인연을 맺는 것의 의미는 첫째, 언제나 삼보를 생각한다는 데에 있고 둘째, 오계를 지키겠다는 다짐에 있다.
오계를 지키고 삼보를 항상 생각하는 것은 열심히 수행을 하겠다는 의미이며, 그 자체로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일년에 한 번 봉행되는 증심사 오백대재는 각별하게 나한님과 인연을 맺으며 보다 부단히 정진하고 수행할 것을 스스로와 약속하는 것이다.

자비에 대하여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증심사 목요봉사팀은 매주 목요일 자비를 행하고 있다. 자비심이란 무엇일까?
자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서양 학자들은 사랑을 에로스, 필리아, 노도스, 프라그마, 아가페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불교의 자비도 사랑의 하나이다.
이처럼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연애감정’만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을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라”고 하는 부처님의 <자비경>을 구절구절 살펴보며 불교의 사랑과 자비를 다시금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수행의 배터리

자동차가 잘 달리려면 평소에 고장이 없는지 확인하고 꾸준히 주행하여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도록 해야 하듯, 수행에도 배터리 충전이 필요하다.
수행을 해야 수행할 수 있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평소에 꾸준하게 예불하고 기도해놓아야만 인생의 배터리가 방전됐을 때 자연스럽게 부처님에게 기대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부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 하기 싫어도 하고 바빠도 하고 습관적으로 그냥 하는 예불과 수행. 이것만이 우리를 부처님처럼 가는 길 위로 인도한다.

운명을 믿습니까?

사람들은 왜 운명을 믿는가?
만일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를 바꾸는 어떤 노력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연’이 전적으로 지배하는 세계라면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신조차 미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불교의 인연설은 어떠한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연설을 숙명론이나 운명론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하신 인연설은 인연의 고리가 마치 그물망처럼 촘촘하여 미처 우리가 상관관계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누군가 대신 말해주길 바라지 말고, 자신의 욕망을 의지와 비전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관용

2019년 8월, 일본 ‘표현의 부자유전’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헤프닝과 영화 ‘나랏말싸미’ 역사왜곡 논란으로 돌아보는 우리 사회의 관용 정신.
관용은 존중이다. 나와 당신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이야기의 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일본 우익들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사태와 일부 타종교인들의 ‘나랏말싸미’ 배급 중단 요청 등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기에 발생한 일이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일조한다.
관용의 정신이 바로서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이 다른 타인과 토론을 통해 자기 주장을 정당하게 펼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해본적 없엇 낯설고, 마음 편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