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사는 법

사람들은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공동체가, 행복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행복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긍정심리학자 마틴 샐리그만은 행복의 세 가지 요소로 즐거움, 몰입, 의미를 제시했다.
이 세 가지는 행복의 조건이라기보다는 현상에 가깝다. 즐거움은 유지되거나 증가하지 않고 갈수록 감소하고, 몰입은 유지하기 어렵다. 삶의 의미 역시 부여하기 어렵고 또는 너무 주관적이어서 늘 변동하게 된다.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부수적인 감정에 불과하다. 반드시 행복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이것이 행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지 말고, 최소한의 부정적인 상태가 아닌 모든 것을 행복으로 설정해놓아야 보다 자주, 보다 쉽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용기

광주항쟁, 최후의 11인인 김동수 열사 추모재에 즈음하여 생각하는 진정한 용기.
진정한 용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보살의 용기와 중생의 용기다.
보살의 용기는 자비심에서 비ㄹㅅ된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는 마음에서 자비심이 나오며, 공과 지혜에 대한 통찰에서 자비가 나온다.
중생으로서의 용기는 마음의 무게와 반비례한다. 마음의 애착과 욕심을 버릴 때 용기 있는 행동이 나온다.
늘 마음의 때를 털어내는 일상을 보낼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 안의 수행이 되어 보살심으로 깃들 것이다.

올바른 정치인의 자격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즈음하여 불교적으로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인의 자격.
정치인을 판단하는 두 가지 중요한 덕목은 정직과 헌신이다. 정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양설을 하거나 기만하는 말도 거짓말의 일종이다.
헌신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비심이 넘친다는 것은 도둑질 하지 않는 것이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정직과 헌신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 가지 계율의 현대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정직과 헌신은 불자들의 삶의 자세이자 공직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를 가질 때에만 올바른 정치인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올바른 정치인을 가려낼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코로나19로 인류의 사회활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멈춘 세상에서 자연은 스스로 자정하며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필연적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고 효율에서 위기대응으로 전환하는 것은 소극적인 대처법이다. 일상생활, 생활 습관, 인류문화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고통의 완전한 종식에서 온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에서 코로나19 이후 우리 삶의 태도를 길어올려보자.

왜 칠성인가

칠성신앙은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민간신앙 중 하나이다. 절집에도 칠성각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중국에서 시작된 칠성신앙은 불두칠성의 신앙 안에 도교적인 내용을 담아낸 것으로, 우리나라 민간신앙과 불교문화 속에도 자리잡았다.
칠성성군은 비를 내리게 하고, 수명을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 불교에서는 이들 칠원성군이 여래의 화현이라고 보며, 그중 북극성을 상징하는 중심인물은 치성광여래라 한다.
민간신앙은 미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신앙 속에는 물 한 잔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마음과 인간이 아닌 만물을 신성시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돈이 신이 되는 물질만능의 시대에 칠성신앙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코로나19를 대하는 불자의 자세

사회를 지탱하는 서로간의 신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깨지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사회를 병들게 한 모습의 일례이다.
코로나19 대응은 의료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제 시스템을 복구하는 것, 우리 생활속에 깊이 스며든 문화를 바꾸는 것, 또한 정부의 지침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모두가 우리 사회를 자정하려는 노력이다.
불자로서는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를 수행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모습을 직시하고,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더욱 불자답게 사는 것이 코로나19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길이다.

공감하는 마음

새해를 맞이하며 전하는 덕담.
인간은 이기적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마음이 솟아난다. 그런가하면 잘 모르는 상황에는 오해와 편견에서 이기적인 생각이 피어오르는 때도 있다.
그러나 오해가 걷히고 오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면, 미안함에서 다시 공감의 마음이 생겨나고는 한다. 사소한 계기일지라도 배려심과 자비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끔은 나를 위한 기도, 내 가족을 위한 기도가 아닌 남을 위하는 기도, 모두를 위한 기도를 하도록 하자.

다시 생각하는 ‘개미와 베짱이’

‘개미와 베짱이’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 겨울을 대비할 수 있고 베짱이처럼 놀고 먹으면 겨울이 왔을 때 고생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솝우화다. 그러나 이 교훈이 꼭 현대사회의 현실에 들어맞지는 않는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 우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개미처럼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할까? 베짱이처럼 현재를 즐기며 살아야 할까?
부처님께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실재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과거 현재 미래에 집착하는 것은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삼세가 있고 내가 있다는 무명에서 벗어나며, 다만 행위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내가 모두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종교는 문화다 (미얀마 성지순례)

불교가 국교인 미얀마에서는 출퇴근길에 자연스럽게 법당을 참배하고, 생일이나 기념일 등 삶의 순간에는 어김 없이 불교와 함께 한다. 미얀마에서 불교는 특별한 종교의식이나 신앙활동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문화에 가깝다.
종교가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근현대 역사의 질곡을 겪으며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여 기존에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던 도덕과 윤리 같은 덕목이 희미해져버렸다.
불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일상의 문화가 되도록, 내 삶에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당신의 나한님은 누구십니까?

증심사는 매년 오백전의 500 나한님들과 불자들의 인연을 맺는 오백대재를 봉행하고 있다. 나한은 부처님 당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깨달은 분들이다.
깨달은 분들과 인연을 맺는 것의 의미는 첫째, 언제나 삼보를 생각한다는 데에 있고 둘째, 오계를 지키겠다는 다짐에 있다.
오계를 지키고 삼보를 항상 생각하는 것은 열심히 수행을 하겠다는 의미이며, 그 자체로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일년에 한 번 봉행되는 증심사 오백대재는 각별하게 나한님과 인연을 맺으며 보다 부단히 정진하고 수행할 것을 스스로와 약속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