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입문
나의 빈소를 차리자
장례식장에 조문을 다녀오면 느낀 삶과 죽음. 누군가 돌아가셔서 조문을 다녀오게 되는 일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조문은 관례화된 의식이다. 조의금을 준비하고 영정에 절을 하고 유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지인들과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돌아가신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은 고작 2~3분 남짓이다. 내가 고인의 입장이 되어 나의 빈소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나는 죽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유족들이나 조문객들에게도 더이상 나는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삶은 1인극 판토마임과 같아서, 타인은 나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짐작할 뿐, 나와 완벽하게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못한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과 배우의 관계가 끝나듯, 삶이 끝나면 세상과 타인에게서 나는 사라지고 그 관계 역시 끊어진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인 무아이다. 무명으로 가득 찬 아상을 털어내고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잘 사는 길이며, 잘 죽는 길이며, 불교를 제대로 실천하는 길이다.
길따라절따라 일본 답사기
2023년 3월 다녀온 길따라절따라 일본 답사기. 길따라절따라 일본 교토 탐방을 통해 11개 사찰을 돌아보며 일본불교와 우리불교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라 지역의 사찰들은 삼국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백제, 신라시대 사찰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불교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밀교적 측면이 두드러지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밀교에 등장하는 여러 불보살이나 화려한 장식들이 불상 배치에 드러나고 있다. 선종의 경우, 초기에는 참선을 하고 대중생활을 하는 전통이 유지되었지만 이후 사무라이 정신과 맞아 떨어지면서 기교적인 방식만 활성화되었고, 이는 다시 일본의 토속신앙인 신도와 결합하는 형태를 보인다. 불교의 한 부분만을 떼어 파편화하고 도구화하다 보면 불교의 중심인 '계정혜 삼학'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들의 신행이 어떠해야 할지, 현재 일본 불교의 모습을 보며 고민한다.
나를 위한 수행, 생전예수재
윤달에 한 번 돌아오는 생전예수재는 살아생전 공덕을 쌓는 나를 위한 수행이다. 생전예수재는 내가 죽었을 때 자식들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생전 내가 스스로 지어놓은 선업 공덕의 힘으로 중음계 시왕들에게 좋은 판결을 받아 더 좋은 다음 생을 받음으로써 깨달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생전예수재에서는 경전과 돈을 올린다. 경전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인 연기법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돈을 올리는 것은 세상 만물에게 빚진 것을 갚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전예수재는 지금 이 순간 미리 열심히 수행하는 의식이다. 수행의 끝과 시작은 육바라밀이다. 모든 수행의 결과는 보시해을 하는 것이며, 이렇게 스스로 수행하고 선업 공덕을 쌓는 것이 생전예수재의 핵심이다.
여행을 통해 수행 하는 법 알아차리기
배낭 메고 혼자 다녀온 길따라절따라 일본 답사에서 길어 올리는 '여행을 통해 수행하는 법'. 여행은 관광과 다르다. 관광은 돈만 내면 모든 것이 알아서 세팅되는 일상의 연장선상이고, 여행은 낯선 환경에 자발적으로 놓여져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행위이다. 여행에서는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과 내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음을 경험한다. 낯선 말, 낯선 글자, 낯선 문화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어떤 정보가 들어와도 내면이 자극되지 않는다. 이렇게 내면이 외부와 분리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나 자신을 향하게 된다. 주변 환경에 내 마음이 끌려다니지 않는 것, 이것이 수행이다. 또한 여행은 일부러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해서 어려운 미션을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이다. 어려운 것을 풀어가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면밀하게 스스로를 살피게 된다. 여행이 수행과 맞닿아 있는 이유다.
연기법 대로 인생 사는 법 (feat. 도연명)
혼란스러운 시기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농사를 일구고 살았던 시인이 일러주는 처세술. 중국 동진 후기에서 남조 송대까지 살았던 전원시인 도연명의 '신석'에서 길어올리는 연기법대로 인생 사는 법. 인간은 날 때부터 제각각이지만 서로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나이로 지혜와 무명을 가늠할 수 없고 무언가에 중독된다 하여 세상의 시름에서 비켜갈 수 없다. 무주상보시라 하지만 내가 상을 내지 않는 것 보다는, 남들이 내게 관심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니 지나치게 생각하여 도리어 삶을 해치지 말고 마땅히 운명에 맡겨두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끝내야 할 곳에서 끝내버리고 다시는 혼자 깊이 생각 않는 것. 걱정도 적당히, 화도 적당히,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적당히 하고 끝낼 때 인생을 연기법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인연 따라 사는 방법 (feat. 법정스님)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 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내 안에서 발견한 순수한 욕망을 어떻게 지혜롭게 다스릴 것인가?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알아보는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방법. 마음이 좋고 싫음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이 감정에 대해 분별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 그대로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기를 바라며 집착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지 말라'고 하니 마음이 괴롭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할뿐 아니라 서로의 의지함으로써 무언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할 뿐 자성은 없으니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즉 무명에서 벗어나야 연기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마음, 슬퍼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연기의 도리에 의해서 움직인다. 때문에 변하지 말라고 집착할 일이 아니라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지혜롭게 마음을 다스리는 길이다.
우리가 심심한 이유는?
심심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흔히 혼자 있을 때 "심심하고 외롭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심심함과 외로움은 다른 종류의 감정이다. 심심함은 현재 해결해야 할 목적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반면 외로움은 내가 가진 애착과 집착이 해소되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심심함은 마음의 허기와 같다. 끊임 없이 외부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이 하는 일인데, 외부에서 자극이 없으니 또 다른 자극을 달라고 보채는 현상이다. 심심함을 다스리는 방법은 수행이다. 바깥으로 달려 나가려는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연습을 하면, 그리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게 되면 비로소 마음 밖에 있는 세상이 환하게 비추어 보일 것이다.
[길따라절따라] 서산 마애여래삼존불을 친견하다
길따라절따라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답사기. 백제시대에 조성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 백성들에게 소원을 이뤄주는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실제 마애부처님이 취하고 있는 수인(手印)은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는 시무외인과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여원인이다. 따지고 보면 부처님은 신(神)이 아니라 깨달음을 증득한 수행자일 뿐인데 사람들은 왜 소원을 빌었을까? 고대 인도사회의 푸자(공양) 문화가 변화한 것으로,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고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큰 복을 받는다는 통념이 이어져온 때문이다.불교는 수행을 하는 수행자와 수행자를 의지하고 공양하는 신도라는 두 개의 축이 상호 교류함으로써 유지, 발전된다. 불교의 수행과 정신문화를 후대에 이어나가는 것도 이 두 개의 축임을 잊지 말고 신행과 수행에 임하자.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이유
불교의 의식이나 경전은 삼귀의로 시작한다. 삼귀의는 거룩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겠다는 다짐이다. 귀의란 '피난처로 삼겠다'는 뜻이며, 이는 유일신 신앙에서 흔히 말하는 순종 혹은 복종과는 달리 나 자신과의 약속에 다름 아니다. 지혜와 자비를 동시에 구족한 부처님은 이 세상의 이치인 연기를 깨달은 분이다. 모든 것이 서로서로 의지하고 있으며 모든 것은 한몸이라는 데에서 나오는 커다란 자비심이 바로 동체대비이다. 이러한 동체대비를 낼 수 있도록 언제나 부처님을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이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의 참뜻이다.가르침에 귀의한다는 말은 '마음은 마치 화가와 같아 욕심에 따라 세상을 그려낸다'는 마음의 진리, 실상을 바로 본다는 말이며, 그러한 길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믿는 것이다.승가에 귀의하는 것은 수행자 공동체를 유지하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이렇게 불법승 삼보에 귀의할 때 우리의 삶은 보다 행복해지고 부처님의 진리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왜 화를 낼까?
심리학 연구 결과 사람들은 불공평한 상황,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상황, 부도덕한 것을 목격한 상황에서 화를 낸다. 이렇게 화가 나는 상황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 혹은 '나의 생각'이 공격 당한다고 느낄 때 화가 나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화는 내가 있다는 생각,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즉 무명에서 발생한다. 또한 화는 오로지 내가 공격받는 상황에서 나오며, 내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표출된다. 화가 치솟을 때에는 화가 생기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기보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아서 그 문제를 해결하면 분노 상황은 대부분 원만하게 해결된다.
[길따라절따라] 불국토 경주를 가다
경주 남산은 고대 신라인들의 불교에 대한 간절하고 깊은 신심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신라인들에게 남산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불국토였고 부처님 그자체였다.중생에게는 무언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 불상과 탑과 같은 조형물은 우리 중생들에게 의지처가 되어 준다. 우리가 불상 앞에서 기도하고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순간에 우리의 마음은 보살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부처님을 친견할 때의 마음을 믿고 의지처로 삼아 일상생활에서의 온갖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수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12처(處)로 풀어본 김춘수의 꽃
시인 김춘수는 말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상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애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에게만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자신의 세계에 인식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것을 "작자는 없지만 행위는 영원하다"고 말했다. 행위에 대해 욕망을 가지면 이름을 부여하게 되고, 이름을 부여하면 마음에 이미지가 생성되고, 마음에 이미지가 생성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은 나에게 있어 '존재하는 것'이 된다. 내가 따로 있고 대상이 따로 있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행위, 듣는 행위, 행위가 있기에 여기에 따라서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생겨난다. 때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은 없다. 중생은 욕망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을 보살의 원력으로 바꾸는 것이 수행이며, '원래 있는 세계'라는 것이 우리의 뒤바뀐 헛된 생각임을 깨닫는 방법 역시 오직 수행이다.
불교식 제사의 의미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시식과 법식을 베풀어서 영가님들로 하여금 하루 빨리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사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만남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인식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나 전기에너지와 같이 분명하게 작용하고 있다. 제사는 부처님을 청해 법을 설하는 자리이다. 부처님이 설법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여러 부류들이 참석한다. 불보살님은 물론 대상이 되는 영가와 유주무주 고혼애혼들이 두루 참석한다. 이렇게 부처님의 법을 설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공덕을 쌓는 것이다. 공덕을 쌓아 나도 모르게 지은 악업을 소멸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불교식 제사는 부처님의 법을 베푸는 깨달음의 장이자 공덕을 짓는 수행의 장임을 명심하자.
절에서 왜 제사를 지낼까?
예전에는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요즘은 절에 제사를 맡기는 경우가 많다. 절에서 제사를 지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정성을 다하는 것 같지 않고, 조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같아서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사의 본래적 의미와 불교적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본디 제사는 인간 주위에 있는 광범위한 대상을 향해 제물을 바치는 행위였다. 이것은 살아있는 인간이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기도이자 발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행하는 제사는 유교적 의미로 재해석된 제사이다. 유교에서는 나의 근원인 조상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제사를 재해석했다. 불교적 의미의 제사는 영가님이 깨달음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다양한 층위의 제사라는 개념이 혼재되어 있으면 제사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것이 당연하다. 시대에 맞게 변화해오는 제사의 흐름 속에서 불자인 우리가 길어올려야 할 것은 보다 불교적 의미의 재일 것이다.
명상은 불교인가?
템플스테이에서는 명상을 한다. 불교박람회의 주제를 명상으로 삼기도 한다. 불교와 명상은 일견 아주 밀접한 관계처럼 보인다. 과연 명상은 불교일까? 명상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힌두교가 있다. 제사를 지내는 바라문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베다시대에 이러한 바라문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행자들이 등장한다. 바라문은 형식과 의례에 치우친 제사에서 한 발 나아가 신과 바라문의 합일점을 찾는 수행으로 명상을 내세운다. 힌두교에서 명상은 신과 합일하기 위한 수행이었으며, 명상에 들기 위한 신체적 준비를 하는 것을 요가라고 이름 붙였다. 요가와 명상은 기실 불교의 핵심인 삼법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삼법인을 깨닫기 위한 불교의 지관수행이나 위빠사나, 참선 수행 등과 외형적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에 명상을 불교적 수행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명상이 불교가 아니라고 해서 배척할 필요는 없다. 불교적 수행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불교의 경쟁력
대만 법고산사를 창건한 큰스님 성엄선사 일화로 생각해보는 불교의 경쟁력. 비행기에서 만난 목사와 성엄선사의 대화에서 우리는 불교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는 절대적인 신, 전지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런 것 없다!'고 주창한 것이 불교의 사상이기 때문에 불교는 교주인 부처님마저 부정할 수 있는, 종교면서 종교가 아닌 종교다.불교의 핵심 바탕은 수행이고 그 위에 종교라는 옷을 입고 있기에 타종교와 충돌할 필요도 없고 타종교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불교는 타종교를 보완하기도 하고 타종교의 믿음을 성숙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갈수록 종교가 쇠락해져가는 시대에 불교의 이러한 유연성은 큰 경쟁력이 되는 일이며, 오히려 세계를 무대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올바로 듣기 올바로 말하기
말하기와 듣기는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잘 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올바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말의 액면 그대로를 듣는 것이 아니라 말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화자의 생각과 의도를 수용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머리로 듣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들어야 제대로 듣는 것이다. 올바로 말하기는 더욱 어렵다. 말은 화의 문이라 한 구산스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도 그렇다. 잘 말하는 것은 해야 할 말은 하고 안 해야 할 말은 안 하는 것이다. 잘 말하는 것은 지혜와 용기를 동시에 구현하는 것이다.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듣는 것만 해도 어느 정도 현자의 삶을 살 수 있다.
믿음의 바탕
뮤지컬 '싯다르타'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직전의 싯다르타가 "죽음을 불사한 수행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있기나 할까?"라는 의구심을 가지는 모습이 묘사된다. 자기 수행에 대한 확신, 수행을 하면 정각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인생의 불확실성이 신을 만들어낸 것이다.부처가 신이 아닌 불교에서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서 믿음이 나온다. 우리의 삶이 고통이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때, 그것이 바로 초발심이고 수행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져온다.
원효스님이 유학을 포기한 이유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기로 한 이유는 '원효대사 해골물'이라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에서 기인했다. 깜깜한 밤에 마신 감로수가 알고 보니 해골물이었다는 데에서 착안한 일체유심조. 흔히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표현하는 일체유심조의 참 뜻은 "세상은 마음이라는 화가가 그리는 그림과 같다"는 화엄경의 진리와 같은 것이다. 원효스님이 깨달은 것은 중생들이 칠흑같은 무명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고, 무명에서 벗어나면 실상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그린 그림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 곧 실상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며,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화두이다. 욕망에 마음을 뺏겨 마음이 그린 대로 세상을 보지 말고, 실상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해야만 일상 속에서 진리를 찾아갈 수 있다.
일상 속의 중도
오백전 등을 500개로 맞춰 달자는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500개로 맞추지는 못하고, 등만 새로 갈고, 기존의 오백전 등은 진입로를 장엄하는 데에 쓰기로 한 사연. 사연의 끝은 "세상 일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깨달음이다. 세상 일이 왜 마음대로 안 될까? 세상 일은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나도 모르게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나의 어떠한 행동으로, 노력으로, 수고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것이 곧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이다. 모든 것이 얽히고설켜있다는 진리이다. 연기의 구체적인 실천은 중도이다. 수행적 측면에서 중도는 고행과 게으름의 양 극단을 여의는 것이고,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적 측면에서의 중도는 단멸론과 상주론의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세상 일은 연기의 흐름이 만들어간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되 그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그러한 마음을 '삼국지'에서는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있는 그대로’ 말의 함정
긴 숟가락만 있는 극락과 지옥에서 극락 중생들은 서로에게 음식을 떠먹여주고 지옥 중생들은 자기 것만 먹으려다가 밥 한 톨도 먹지 못해 고통 받는다는 우화가 있다.숟가락이 길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고통 받을 필요가 없는데 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까? 앞뒤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괴롭기 때문이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마음이 고요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생각 사이를 넓혀야 한다. 논리, 감정, 느낌, 공상, 망상과 같은 생각과 생각 사이를 넓히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고요한 마음에 세상이 비치면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도리이고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 탄생게의 진정한 의미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모두 고통스러우니 내가 마땅히 그를 편안케 하리라.'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말이 실은 불교의 모든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자들도 잘 알지 못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이 세상 모두를 통틀어서 살펴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세상을 발견했다는 지혜의 영역이다. 부처님이 잘나서, 이 세상에 부처님부터 잘난 사람이 없어서 한 말이 아니라 말이다.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자비의 영역이다. 공성의 자리, 지혜의 자리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체득하지 못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중생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마땅히 부처님께서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는 연민의 마음이다.
출가의 의미
고타마 싯다르타는 전륜성왕의 길을 포기하고 수행자가 되기 위해 출가를 한다. 싯다르타가 출가를 하고자 할 때 숱한 반대에 맞딱뜨렸다. 부모와 아내, 막 태어난 자식까지 '궁극적인 행복'을 얻고자 수행하고 싶은 싯다르타에게는 장애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장애를 뛰어넘은 싯다르타는 출가 후 맹렬한 수행을 통해 6년만에 열반을 증득한다. 장애를 뛰어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오직 수행에 일로매진함으로써 어려움을 극복했다. 우리가 싯다르타의 출가라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의 역경, 고난 같은 것들이 실제 객관적으로 힘든 상황인 것인지 단지 내 마음이 힘들다고 말할 뿐인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럴 수 있으려면 자기의 마음을 잘 관찰해야 한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괴로움이라는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그 실체를 바로 보는 것을 체득해야 한다.
불자들의 소원
공원에 가면 일상의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중생들에게 행복이란 지금보다 조금 덜 행복한 삶, 지금보다 조금 덜 괴로운 삶이다. 이런 평범한 사람들에게 불교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사회적, 물질적 의미의 무언가를 해줄 수는 없다. 다만 불교에서는 '걱정할 시간에 공을 들이라.'고 제안한다. 공을 들이는 목적은 결코 현재 여기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에 있지 않다. 공을 들이는 것은 삶 너머에 있는 궁극적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다. 현대인들은 매우 축소된 종교의 역할 속에서 단지 힐링, 명상, 쉼 같은 것을 원하지만 불교가 추구하는 행복, 불자가 추구해야 할 행복은 궁극적 행복이다. 궁극적인 행복인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원을 세워야 한다. 매일 아침 행선축원을 읽는 것부터 궁극의 행복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보자.
내가 내가 아니야
내것이라 생각한 내 몸과 내 감정이 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내가 아니야.",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분노, 욕심, 근심처럼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은 실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들 감정이 나에게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런 감정들에 구속되어 있고 속박당하고 있다. 감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조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중생이 살아가는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삶이다. 중생은 다양한 정보 중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에 얽매여 반응하게 되는데, 이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함을 멈추고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수행이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내 마음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 이것이 알아차림이며 깨달음을 증득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
가을이 와 낙엽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낙엽은 사실 나뭇잎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일 뿐인데 우리는 왜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그 이유는 우리는 실제 세계를 보지 않고 마음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길에서 깨달은 것도 이와 같다. 원효스님의 '일체유심조'은 세상이 마음 먹은 대로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린 그림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데에 그 참뜻이 있다. 우리는 마음이 그린 그림을 실제 세상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낙엽이 아름답다. 연기실상을 깨친다는 것은 낙엽을 아름답게 보는 것이 아니라 낙엽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이 모든 세상이 다 연결되어 있고 그 실제 모습과 내가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삶이 완전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요즘 절에서 미륵부처님을 모시지 않는 이유
익산과 완주 지역에는 백제시대 불교유적이 남아있다. 백제를 비롯해 삼국시대의 불교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미륵불은 56억7천만 년 뒤에 이 세계(용화세계)에 와서 진리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할 미래불이다. 미륵신앙은 선업을 쌓은 공덕으로 미륵보살이 계신 도솔천에 가 깨달음을 얻겠다고 하는 미륵상생 사상과 훗날 왕림하는 용화세계에서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겠다는 미륵하생 신앙으로 구분된다. 특히 미륵하생 신앙에는 미륵불의 파트너로 '전륜성왕'의 존재가 예고되는데,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지나오면서 통치, 정치, 혁명의 이념으로 미륵신앙을 차용하는 배경이 된다. 미륵사상은 꾸준히 변화해왔고 현대에 와서는 그 흔적조차 미미한 수준으로 희미해졌다. 달라진 시대에 우리는 불교는 어떻게 차용할 것인가? 역사 속에서 그 힌트를 엿본다.
불교의 자비 vs 기독교의 사랑
계를 지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행위다. 불교에 자비가 있다면 기독교에는 사랑이 있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그 차이점을 알아보자. 불교의 자비는 나와 남이 모두 이로워야 한다는 자리이타의 정신, 나아가 나와 남의 분별이 없다는 연기법의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자비의 실천 자체가 깨달음을 향한 탐구이자 수행에 다름 아니다.반면 기독교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하느님에 대한 섬김의 증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이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불교의 자비는 진리와 수행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기독교의 자비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종교(불교)의 여러 가지 모습
하나의 종교에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불교도 그렇다. 혹자는 불교를 수행 시스템이라고 하고, 포교 현장에서는 기복신앙의 모습을 목도하며, 일상 행동의 기준 즉 실천윤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합쳐진 모습의 불교가 불교로 역할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불교의 얼굴 가운데 내가 아는 모습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습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불교의 여러 면면을 하나의 뿌리로 융합해내는 자세가 필요하다.특별한 공간과 신성한 시간 속에서 일상의 불안함을 떨쳐내고, 신성한 의식을 일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실천윤리로써의 불교가 등장하며, 윤리를 관철시키기 위한 힘으로써 절대적인 존재를 성정하게 되는 일련의 사이클을 이해할 때 불교의 여러가지 모습을 큰 틀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참된 불자, 불자의 정체성
"과연 나는 진정한 불자일까?"불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면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파헤쳐보자. 정체성이란 무언가를 무언가이게끔 하는 본질을 말한다. 인간은 인간의 본질을 몰라 괴로워하고 혼란을 겪는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는 데에서 착각과 혼란이 시작된다. 참된 불자는 어떤 사람일까? 사회에서 제시되는 기준에 맞춰 교리공부를 하거나, 부처님이라면 어떨까 가늠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행이 그대로 부처 자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나의 본질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매 찰나 나의 행이 부처라는 마음으로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모습이다.
자연재해와 무아사상
2020년 여름, 증심사는 수해를 입었다. 연이틀 퍼붓는 비에 건물과 진입로, 배수로 등에 피해를 입은 것이다. 피해 당사자가 남이 아니라 내가 되는 순간 이성은 사라지고 감정이 앞선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모든 초점이 '나'로 모아진다. 내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자연의 온갖 변화 앞에서 분노하고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마음만 들끓을 것이다. 자연재해 앞에서 파국으로 가지 않으려면 내가 있다는 생각에 눈 멀어 있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수행이 곧 지구를 정화하는 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믿음의 4대 요소
'종교'의 대표적인 키워드는 '믿음'이다. 그런데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믿음은 욕망, 욕망의 대상, 기존의 믿음, 실행능력 등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행동하게 하는 욕망이 있고,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대상을 알아야 한다. 이어서 욕망의 대상에 대한 기존의 검증된 믿음에 기대어만이 안정적인 믿음으로 거듭나며, 욕망에 대한 믿음을 실행할 능력이 '믿음'의 마지막 요소가 된다. 이밖에도 믿음의 네 가지 오류를 살펴보며 신행생활의 바탕이 되는 믿음이라는 것, 그리고 내 안의 믿음을 점검한다.
관세음보살님은 어떤 분인가?
관세음보살은 우리 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보살이자 일반 신도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사바세계 중생들의 고통을 살피고 어려움을 들어주는 분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이지만, 대승불교에 와서 일반 대중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신'적인 존재로 관세음보살을 상정한 것이다. 이처럼 중생들에게 신적인 믿음을 갖게 한 관세음보살이기 때문에, 서방정토 아미타세계의 제2인자로, 아미타부처님의 사바세계에서 대신 실현해주는 분이기도 하다. 또한 인도에서 태동한 불교가 종교의 외피를 입으면서 이웃종교, 또는 전파된 나라의 토착문화를 흡수한 결과 천수천안, 백의관음 등 다양한 형태로 화현했다.
믿음은 깨달음의 근본
돌로 만든 조각상일 뿐인 석조입상을 보고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돌조각을 부처님으로 보게 하는가? 믿는 마음 때문이이다. 내 마음의 믿는 마음, 신심이 평범한 돌덩어리를 관세음보살로 탈바꿈시킨다. 믿음은 도의 근본이다. 믿음은 수행을 시작하게 하는 것, 계속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이다. 믿음은 수행의 바탕으로, 수행하는 마음 자세로 보시를 행하면 그 공덕이 오롯이 선업으로 쌓이게 된다. 우리는 중생의 마음으로 살지 않되 보살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돌덩어리를 보살로 마주하게 하는, 내 안의 보살의 마음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자.
입춘대길 건양다경
새해가 오고 입춘을 맞이하며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라는 문구를 대문에 붙인다.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기를 바라며, 양의 기운이 일어서니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봄이 오나 겨울이 오나 바라는 바 없이 그저 '스스로 스러한' 자연일 뿐인데, 왜 인간은 소원하는 바가 있고 목적이 있는 걸까?마음으로 무언가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경사스럽기만을 바라나 자연은 그럴 수 없다. 꽃 피우는 진달래와 개나리, 그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평상심이 도'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본다.
종교는 문화다 (미얀마 성지순례)
불교가 국교인 미얀마에서는 출퇴근길에 자연스럽게 법당을 참배하고, 생일이나 기념일 등 삶의 순간에는 어김 없이 불교와 함께 한다. 미얀마에서 불교는 특별한 종교의식이나 신앙활동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문화에 가깝다.종교가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근현대 역사의 질곡을 겪으며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여 기존에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던 도덕과 윤리 같은 덕목이 희미해져버렸다. 불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일상의 문화가 되도록, 내 삶에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자비에 대하여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증심사 목요봉사팀은 매주 목요일 자비를 행하고 있다. 자비심이란 무엇일까?자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서양 학자들은 사랑을 에로스, 필리아, 노도스, 프라그마, 아가페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불교의 자비도 사랑의 하나이다. 이처럼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연애감정'만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을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라"고 하는 부처님의 을 구절구절 살펴보며 불교의 사랑과 자비를 다시금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운명을 믿습니까?
사람들은 왜 운명을 믿는가?만일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를 바꾸는 어떤 노력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연'이 전적으로 지배하는 세계라면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신조차 미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불교의 인연설은 어떠한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연설을 숙명론이나 운명론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하신 인연설은 인연의 고리가 마치 그물망처럼 촘촘하여 미처 우리가 상관관계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누군가 대신 말해주길 바라지 말고, 자신의 욕망을 의지와 비전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보시하는 마음
불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번뇌의 불꽃을 완전히 꺼버리는 니르바나 즉 열반이다.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고, 선정에 들고, 지혜의 눈을 여는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이 계정혜 삼학에 매진할 수는 없는 일. 일반 불자들이 금생과 내생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해야 할 일로 보시와 지계를 제시한다.보시의 의미를 넓게 설정하면, 다른 사람에게 내 자신을 낮추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요즘 말로 '봉사'라고 한다. 또한 불자 5계를 지키는 지계 또한 선업을 쌓는 훌륭한 방법이다. 이번 생에 쌓은 보시와 지계, 두 가지 선업으로 하여금 내생에 분명히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교리
종교란 무엇인가?
현대인들이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이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나'라는 존재 그 자체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답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답이 없으니까 고민을 한다. 이 말을 서양철학자들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표현했다. 나라는 실체를 상정하는 오류에서 고민과 불안이 나온다. 이런 근본적인 오류를 위로하기 위해 종교가 등장했다. 신이라는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하고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위로한다.불교는 신을 상정하지 않고 스스로 수행을 통해 고통의 완전한 종식에 이르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종교면서 종교가 아닌 종교다. 세상 모든 일이 신의 뜻이 아니라 연기임을 깨달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수행해야한다는 것의 불교라는 종교의 핵심이다.
부처님의 열반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죽음이나 큰스님의 죽음을 두고 "열반했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열반이라는 말은 깨달음을 얻은 경지를 말하기에 엄밀히 말하면 성인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반열반' 또는 '입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하다.부처님은 돌아가시면서 세 가지 유언을 남겼다. 부처님 당신이 아닌 스스로를 의지하고 부처님이 설한 법을 의지하라는 의미를 담은 '자등명 법등명'. 자기 자신을 의지하기 위한 방법으로써의 '사념처'. 사념처 수행을 대하는 자세로써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정진할 것'이 그것이다.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으로 하여금 현재의 불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과 공부해야 할 과제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인도사상과 불교 2
기원전 5세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제사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나'에 대한 고대인도인들의 본질적인 탐구가 시작된다. 인도 전통사상에서는 나와 세계의 관계를 아트만과 브라흐만으로 설명한다. 육체적 나는 거짓된 나이며 진실된 나는 아트만이다. 진실된 나를 주체로써 생각하면 아트만이고, 내 밖의 객체로 대하면 브라흐만이라 이름 붙인다. 본질은 같으나 이름이 다를 뿐이다.부처님은 이러한 인도사상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비판하고 자신만의 논리를 펼친 사상가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아트만이나 브라흐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해체하고 관찰하면 실체 없음이라는 것이다.
인도사상과 불교 1
현재 우리가 접하는 불교의 모습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가 등장하기 이전에 인도사회를 지배했던 인도사상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불교가 어떠한 사상적 토대 위에서 등장했는지, 인도사상과 불교사상은 과연 어떤 것이 비슷하고 어떤 것이 다른지를 구별하고자 한다. 인도사상은 선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베다'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제사를 통해 신에게 공양물을 전달하는 데에는 제사를 정확하게 아는 브라만의 역할이 중요했으며, 브라만의 권위가 높았다.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환생하지 못하고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훗날 윤회사상의 기반이 되는 동시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이끌어내는 배경이 된다.
보리심에 대하여
티벳불교문학의 정수, 샨티데바 스님의 '입보리행론'으로 일깨우는 보리심과 초발심.깨달음과 열반을 증득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깨달음과 열반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이에 티벳불교에서는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으로 보리심을 강조한다. 보리심이란 보살의 마음이다. 보리심이란 중생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을 버릴 때 나의 중생심과 이기심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다. 나를 좋게 대하든 나쁘게 대하든 오직 나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인연이 생기게 해달라고 하는 것, 이러한 원이 보리심이며 자타일시성불도하는 진정한 보살의 마음이다.
깨달음과 열반
불자와 불자 아닌 사람을 나누는 기준은 '원력'에 있다. 모든 사람들의 원력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적 원력은 부처님의 설파한 가르침인 연기법과 공성을 지혜를 깨닫겠다는 초발심이다. 그것을 깨달아야만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다.한편, 흔히 같은 말로 쓰이는 깨달음과 열반은 그 의미가 엄밀하게 다르다. 깨달음은 '안다'는 것이며, 아는 것의 깊이는 사람에 따라 수행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열반은 어떠한 지점이나 목표가 아니다. 다만 말 그대로 '번뇌의 불길이 완전하게 꺼진 상태'이다. 불자들은 괴로움을 벗어나겠다는 서원을 세운 사람들이다. 절에 가는 이유가 희미해졌다면, 그저 관성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초발심을 되새김으로써 불자로써의 기준을 다시 세우자.
깨달음이란?
초기경전에는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들은 즉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왜 그럴까? 먼저 부처님과 같은 성인은 친견하기만 해도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자비심에 감화된다고 한다.다른 측면에서는 깨달음의 속성을 생각해봄직하다. 깨달음은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듯 단박에 온다. 자전거를 어느 순간 탈 수 있게 되는 것과도 같다. 우리네 신행도 그러하다. 막연하게 공부하고 이해가 되는 것 같은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자신이 완전하게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마음처럼 되지 않더라도 처음 먹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죽음과 제사 그리고 불교
백중 기도 기간 중에 생각하는 죽음과 제사, 그리고 불교.의학적 죽음은 뇌, 심장, 폐 등 세 가지 주요한 기관의 정지상태다. 사회적인 죽음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삶에서 고인을 배제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의학적 혹은 사회적 죽음의 개념이 아니다. 내가 없어지는 것, 그것이 두려운 것, 그렇기에 죽음을 두려워 한다. 49재는 돌아가신 영가가 염라대왕 등의 재판을 받으러 가기 전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하는 시간이다. 영가들은 삶에 대한 애착을, 그리고 산 사람들은 영가에 대한 애착을 털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백중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보다 공을 들여 영가를 잘 보내드리기 위한 의식이며, 이것은 부처님의 말하는 자비의 실천이자 봉사에 다름 아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불교의 전파 과정을 따라가면서 생각해봄직한 화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고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 고대 인도인들은 이미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고차원적인 철학과 고민에 천착했다. 그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탄생한 불교는 태생적으로 인도사상과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 속에서 불교의 외피를 입은 인도사상은 서쪽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티벳과 중국 등 동쪽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이곳에 전해진 광범위한 인도/불교사상 가운데서 불교를 불교이게끔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2019년 증심사 백중 2재 법문으로 함께 생각하는 부처님. 증심사 비로전은 부처님의 법신으로 불리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부처님은 보신, 법신, 화신의 삼신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보신은 선업의 과보로써 부처님이 된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법신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화신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이 세상에 화현한 모든 존재를 말한다. 신구의 삼업이 뻗어나가는 마음머리에 부처님을 붙여놓으시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든 것 중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의학적 죽음, 현실적 죽음
백중 기간에 생각하는 삶과 죽음.의학적으로는 장기 이상, 심폐사, 세포사 등 일정 부위를 기준으로 죽음을 판단한다. 반면 우리가 인식하는 죽음의 순간은 다르다. 육신의 모습이 살아있는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오늘의 화두는 이런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짓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언젠가는 죽을 송장을 사람이게끔, 살아있게끔 끌고가는 것은 무엇인가?
불교는 종교인가?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로 꼽힌다. 과연 불교는 종교인가? 종교의 3대 요소는 교주, 교리, 교단이며 불교 역시 부처님이라는 교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교리, 부처님의 제자들의 집단인 교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불교의 본질은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은 수행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서구에서 정의하는 종교에 부합하다기보다는 종교라는 외피, 즉 옷을 입고 있는 것에 다름 없다. 수행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행을 닦아 마음을 바꾸는 것이며, 우리가 다니는 절은 바로 '우리도 부처가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같이 수행하는 수행 공동체이다.
신행
당당한 수행자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은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하며, 청정한 삶을 사는 이유는 고통을 바로 알기 위해서다."라고 말씀하셨다.수행자는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중생들이 고통과 번뇌에 물들어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은 수행의 근본으로 방일하지 않음을 꼽았는데, 게으르지 않고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증득할 때야 비로소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오백나한대재 회향에 부쳐, 당당한 수행자란 어떤 수행자이며 나는 어떤 수행자인가를 되돌아보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일상 생활 속 수행 방법
누구에게나 할 일이 없어 무료한 순간이 있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하고 싶은 무언가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무엇이라도 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 자신을 살피는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dukkha)은 무언가 불만족스럽고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무언가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서 내 바깥에 있는 대상을 탐색하지만, 바깥의 대상으로는 내 안의 고통을 없앨 수 없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무의식에 끌려 결여된 무언가를 채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말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의 감정과 상태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알아차림이며 수행이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정진과 선정
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에서 목요일은 안정하는 날이고 금요일은 선정하는 날이다. 안정한다는 것은 안심인명하는 것이다. 마음을 안정되게 하면 곧 천명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마음이 잔잔한 호수와 같이 삼매에 든 상태는 곧 이 세상의 이치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인 상태를 말한다.목요일은 정진하는 날이다. 정진은 애써 힘쓰되 꾸준히, 골고루, 세밀하게,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힘을 쓰는 것이다.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이렇게 정진하면 대분심과 대용맹심, 대의심이 난다. 이 세 가지는 화두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로써 수행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러준다.
인욕, 수요일은 참는 날
구산스님은 법어집 '생활불교의 길'에서 활월화수목금토일 7일 동안 매일 해야 하는 수행으로 육바라밀과 만행을 제시했다. 그 중 수요일은 참는 날, 즉 인욕수행을 하는 날이다.무엇을 참는가? 욕됨과 억울함과 번뇌를 참는다. 욕됨과 억울함을 참는 것은 아상을 내려놓는 수행이며 번뇌를 참는 것은 고통의 뿌리를 완전히 뽑는 수행이다. 인욕하는 것은 자아를 깨우치는 수행이며, 선업을 성취하는 길이며, 스스로는 부처가 되고 중생을 구제하는 공덕을 성취하는 행위다. 인욕하는 방법은 투쟁하지 말고 양심을 속이지 말며 시비하지 않는 것이다. 인욕은 너무나 힘든 수행이므로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굳건하게 세우고 바다이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절에서 왜 동지기도를 할까?
동지는 팥죽의 붉은 기운으로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세시풍속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와해되는 현대사회에서는 그저 '팥죽을 먹는 날' 정도에 그치고 있다. 동지는 오히려 수행공동체가 이어지고 있는 사찰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찰에서는 동지가 되면 함께 모여 동지울력을 하고, 당일에는 불보살님께 동지죽을 올리고 동지불공을 드린다. 사찰에서 동지를 챙긴는 이유는 사심 없이 웃으면서 일하는 봉사의 장을 만들기 위함이고, 나 혼자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내 가족과 우리 사회를 위한 기도를 올리기 위함이다.
기도의 공덕과 가피
우리가 기도를 할 때는 가피와 공덕이 함께 한다. 가피는 보살님들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이롭게 함을 말한다. 중생들에게 이로움이란 나와 내 나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지만, 불보살님들이 보기에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번뇌를 뿌리 뽑고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이다. 불보살님이 우리에게 가피를 내린다면, 우리는 그러한 가피력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준비를 하여야 한다. 준비란 스스로 공덕을 쌓는 것이다. 늙고 병들고 약한 사람도 공덕을 지을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재산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7가지 공덕을 당신의 삶에서 행하여 공덕을 쌓기를 바란다.
관음기도의 의미
관음재일은 관세음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면서 의식을 치르는 날이다. 우리가 공양을 올리는 관세음보살이란 누구인가?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모든 고통의 소리를 관하는 분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대상으로 관법수행을 하고 있는 분이다. 관세음보살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전국에 수많은 관음사와 관음전이 있지만, 기실 '관세음보살이 어디에 있는고' 하며 화두 참구 하고 있는 나 자신이 관세음보살이다. '내가 왜 관세음보살인가?' 하는 의문 역시 아무 생각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 깨치게 되는 하나의 통로가 될 것이다.
신중기도 해설
신중청은 이러한 신의 무리, 신중들에게 청을 하는 의식을 말한다. 신중들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와 수행자를 마구니로부터 수호하는 신들이다. 흔히 법당 불상 뒤를 장식하고 있는 후불탱화의 가장자리나, 법당의 측면에 자리하고 있는 신중탱화에서 그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신중청의 순서는 거명-공양청-진언-찬탄-축원의 순으로 진행된다. 진언에는 신중님들의 본연의 역할인 마구니의 항복을 받는 항마진언이 포함되는데, 신중님들은 몸을 금강과 같이 수승하게 하고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 머무리게 하며 입으로는 '옴 남'이라는 글자로 광명을 낸다고 찬탄하는 것이다.
왜 칠성인가
칠성신앙은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민간신앙 중 하나이다. 절집에도 칠성각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중국에서 시작된 칠성신앙은 불두칠성의 신앙 안에 도교적인 내용을 담아낸 것으로, 우리나라 민간신앙과 불교문화 속에도 자리잡았다. 칠성성군은 비를 내리게 하고, 수명을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 불교에서는 이들 칠원성군이 여래의 화현이라고 보며, 그중 북극성을 상징하는 중심인물은 치성광여래라 한다. 민간신앙은 미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신앙 속에는 물 한 잔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마음과 인간이 아닌 만물을 신성시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돈이 신이 되는 물질만능의 시대에 칠성신앙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불교와 민간신앙
불교를 믿는 불자라 하더라도 정초가 되면 정초기도를 하고 삼재풀이를 하는 등 민간신앙적 의식을 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식으로 생각하고, 유교식으로 생활하고, 어려울 때는 점집에 찾아가는 등 다중적 신앙형태를 띠고 있다. 조선시대, 불교는 사대부들부터 억압을 받았지만 백성들의 삶에는 항상 불교가 함께였다. 백성들은 불교와 관련은 없지만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날이 되면 절에 가서 부처님께 불공을 올렸다. 사대부의 억압과 백성들의 관행에 따라 불교는 자연스럽게 민간신앙을 흡수하게 되었으며, 해방 이후 서구식 교육이 도입된 이후 불교와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종교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종교는 인간에게 마음의 평화, 안락한 인생, 희망과 같은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준다. 반면 종교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도 있다. 욕심을 줄이고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종교 안에 들어온 민간신앙의 형태를 잘 살펴보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해나가자.
초파일 연등과 인등
법당에 불 밝힌 인등은 곧 나의 분신이다. 나 자신 혹은 나의 자식의 이름으로 불 밝힌 인등은 나나 나의 자식을 항상 부처님 곁에 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일상생활을 할 때도 내가 하는 싫은 소리, 미운 소리는 부처님 옆에 있는 내 분신도 똑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법당에 있으나 없으나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마음이 바로 인등이다. 한편 초파일에 켜는 연등은 가난한 여인 난타고 부처님을 위한 등 공양을 올린 데에서 유래했다. 일체 중생의 어둠을 밝히겠다는 서원, 일체 중생이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초파일 연등에 담을 수 있도록 하자.
혼자서 기도하는 법
기도는 함께 할 때 정진력이 강해지지만, 혼자서 성실하게 할 수도 있다. 혼자 기도할 때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형식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 좋다. 기본적인 기도의 순서는 천수경 - 수행 - 발원문(축원문) - 반야심경 순이다. 수행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을 다지기 위하여 먼저 천수경을 독송하고, 정근이나 참선 사경 주력 등 본인이 하고 싶은 수행을 한다. 수행은 최소 20분 이상 하는 것이 좋다. 수행의 공덕을 회향하는 발원문은 나옹선사의 행선죽원이나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이 대표적이다. 모든 발원이 끝난 후에는 반야심경으로 마무리 한다.
생전예수재의 두 축, 참회와 공덕
윤달에 한 번 돌아오는 생전예수재. 생전예수재는 죽기 전에 살아생전 몸과 마음으로 진 빚을 청산하여 청정한 몸과 마음으로 죽음에 대비하고자 하는 수행의식이다. 왜 생전에 미리 업보를 소멸하고 청정하게 해야 할까? 다음 생에는 어떤 몸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수행할 수 있는 육신을 갖고 있는 이 순간에 열심히 수행해야 함을 되새기는 날이다. 생전예수재는 나의 업을 참회하고 선근공덕을 쌓는 날이다. 이 의식으로 하여금 매일매일 수행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날이다.
텅 빈 절간에서 생각하는 사찰의 본질
2020년 봄, 코로나19 방역 지침으로 모든 법회와 행사를 취소했다. 그야말로 텅 빈 절간인 증심사에서 사찰의 본질을 생각한다. 사찰은 수행하고 참배하는 곳이다. 왜 불자들은 수행하고 참배하는가?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오욕과 탐진치와 같은 번뇌에서 벗어나 행복한 마음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절에 오는 것, 오는 행위보다 더욱 중요한 본질은 마음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노력이다. 빨리 절에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바라기에 앞서, 당신의 마음이 지금 건강한지, 따뜻한 질문을 건넨다.
명상의 시간
'명상'이라는 말이 일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요즘이다. 불교 밖에서 명상은 '힐링'의 이음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일반인들은 명상을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무언가' 혹은 '눈을 감고 고요하게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그러나 불교에서 명상의 목표는 팔정도를 이루는 것이며, 팔정도와 계정혜 삼학은 항상 같이 움직이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찾는 것. 불교 명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편화되고 있는 명상을 균형 있는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복은 비는 것인가, 짓는 것인가? (미얀마 성지순례)
미얀마의 불상들은 뚱뚱하다. 미얀마 불자들은 손이 닿는 곳이면 불상의 어디든 금박을 붙이는 공양을 올리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 부처님의 금박옷이 두꺼워진다. 금박공양을 올리며 무언가 간절하게 기도하고 복을 비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그저 무심하게 금박을 부처님에게 붙일 뿐이다. 금박공양을 올리는 것은 스스로의 공덕을 쌓기 위함이지, 개인의 복을 빌기 위함이 아니다. 간절한 신앙도 좋지만 부처님의 가르침, 특히 오계를 일상에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길이다.
당신의 나한님은 누구십니까?
증심사는 매년 오백전의 500 나한님들과 불자들의 인연을 맺는 오백대재를 봉행하고 있다. 나한은 부처님 당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깨달은 분들이다. 깨달은 분들과 인연을 맺는 것의 의미는 첫째, 언제나 삼보를 생각한다는 데에 있고 둘째, 오계를 지키겠다는 다짐에 있다. 오계를 지키고 삼보를 항상 생각하는 것은 열심히 수행을 하겠다는 의미이며, 그 자체로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일년에 한 번 봉행되는 증심사 오백대재는 각별하게 나한님과 인연을 맺으며 보다 부단히 정진하고 수행할 것을 스스로와 약속하는 것이다.
생활불교
시장기 같은 외로움 (feat. 법정스님)
외로움과 고독은 우리의 오랜 친구와 같다. 외로움은 나의 소유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의 손아귀를 벗어났을 때 느끼는 상실감이자 빈자리이다. 소속감의 부재에서 오는 고독감이다. 법정스님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하며, 이를 통해 자기 정화를 할 수 있다"고 썼다. 외로움은 눈에도 귀에도 입에도 코에도 있다. 이러한 외로움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리하여 그 감정의 원천이 소유욕과 갈애라는 것을 깨닿고, 이것을 털어내는 연습일 해야만 진정한 홀로 있음, 고독을 누릴 수 있다.
사랑은 김치다
김치와 사랑에는 닮은 점이 있다. 첫째, 김치는 주재료인 배추에 각종 양념과 복잡한 레시피가 첨가되어 복합적인 맛을 낸다. 사랑도 집착과 소유욕 등 다양한 감정과 욕망으로 양념되어 있다. 둘째, 김치는 매운 맛이고 사랑은 집착 맛이다. 김치의 매운 맛이 고춧가루의 매운 맛이 아니라 김치 고유의 매운 맛이듯, 사랑의 대표적인 맛은 업그레이드 된 집착이다. 셋째, 김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어가듯 사랑도 시간과 공력을 들인 후에야 익어간다. 익다가 더 오랜 세월이 지나면 묵은지 같은 살아이 된다. 다른 양념 필요 없이 오직 배추 하나로 맛있는 맛을 내는. 어떻게 하면 잘 사랑할 수 있을까? 연기에 입각한 처세술로 사랑을 대해야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며 진인사대천명이다. 스쳐가는 많은 인연들을 정심으로 대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연기에 입각한 사랑이다.
광주는 극락이다
지금은 없지만 광주에는 조선시대 세종대왕 시절 지어진 인공 저수지 '경양방죽'이 있었다. 당시 광주 목사 김방은 경양방죽을 만들던 중 발견한 개미굴을 무등산으로 옮겨주었고, 개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경양방죽을 완공할 수 있었다. 또한 개미들의 힘으로 세종대왕이 현몽을 꾸고, 그 덕으로 목숨을 구한 김방 목사는 무등산 증심사에 오백전을 건립할 것을 염원한다. 무등산 증심사와 오백전과 경양방죽은 빛고을 광주 자체가 아미타 부처님이 상주하는 극락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땅을 극락으로 여기고 극락으로 만들었던 백성들의 굳건한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불교가 바라보는 부부의 관계
불교에서는 부부를 도반의 관계로 본다. 함께 수행하고 서로 존중해야 할 가장 가까운 선우로 여긴다.흔히 우리는 '선지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스승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선지식의 본 뜻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친구인 '선우'이다. 경전에서는 도반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에 대하여 나에게 유익한 일이며, 자애로운 행위를 일으키며, 나의 마음을 버리고 당신의 마음을 따르려는 한마음이 생긴다고 표현했다.부부관계에서도 '성격차이'로 포장한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를 선지식과 도반으로 여기는 마음자세가 중요하다.
불안은 어떻게 다스릴까?
불안이 너무 심하면 의료적 치료가 필요하고, 불안이 너무 없으면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다. 불안은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내보내는 신호로,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적인 감정이다.중생은 '나'를 지키기 위해 불안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나를 지키고자 하는 뿌리 깊은 생각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을 피하라는 신호가 불안한 감정으로 표출된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나를 지키는 데에서 나아가,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생한다. 때문에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내 안에 뿌리 깊은 나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직시해야 한다. 그 방법은 일상 속 수행이다.
행복하게 사는 법
사람들은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공동체가, 행복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행복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긍정심리학자 마틴 샐리그만은 행복의 세 가지 요소로 즐거움, 몰입, 의미를 제시했다. 이 세 가지는 행복의 조건이라기보다는 현상에 가깝다. 즐거움은 유지되거나 증가하지 않고 갈수록 감소하고, 몰입은 유지하기 어렵다. 삶의 의미 역시 부여하기 어렵고 또는 너무 주관적이어서 늘 변동하게 된다.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부수적인 감정에 불과하다. 반드시 행복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이것이 행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지 말고, 최소한의 부정적인 상태가 아닌 모든 것을 행복으로 설정해놓아야 보다 자주, 보다 쉽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보다 뒤처질 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남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은 불안함과 우울함 등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하여 마음을 괴롭게 한다. 인간의 진화는 비교에서 비롯된 만큼 비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다. 특히 모두가 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한 무리 속에 살아가는 현대사회는 비교하기 더욱 쉬운 환경이기도 하다.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이 드는 원인은 '나는 OO이다'라는 고정관념이다. 내가 설정해놓은 지금 현재의 나의 모습이 마음이 들지 않아, 또 다른 특정한 모습을 갈구하게 된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도 같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소소한 것, 혼자서 행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놓는 것이 도움이 된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무엇이 될 것인가?' 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남들과 비교하고 뒤처지는 마음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 명상으로 다스리기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마음이 괴롭다.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첫째, 평소에 꾸준히 마음을 단련해야 하고 둘째, 상비약처럼 평상시 좋아하는 경전이나 책 구절을 꺼내 억지로라도 외는 것이며 셋째, 그래도 어려울 때에는 본인의 상태를 인정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마음을 단련하는 방법은 명상이다. 명상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이다. 요즘 사회에서 유행하는 멍때리기와 본질적으로 같다. 그렇지만 멍때리는 동안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명상은 우리의 마음을 찾는 연습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 행위다. 찰나 생 찰나 멸하는 생각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직전에 생겼다 사라진 마음을 보는 순간 우리는 직전 감정을 끊어낼 수 있다.
진정한 효도
중국에서 유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경전 '부모은중경'은 어버이의 은혜를 찬탄하고 이에 보답하기를 독려하는 경전이다. 이 경전에는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가 제시되어 있는데, 갓난아기를 살피는 어머니의 정성과 노력 그리고 평생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학습하는 능력을 가졌지만, 동시에 태어난 후 1~2년간은 혼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타인의 절대적인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상정된다. 이렇게 절대적인 보살핌을 쏟아준 부모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부파불교인 설일체유부의 율장(비나야약사)에 따르면 몸과 재력으로 효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부모가 깨달음을 증득하여 영원한 행복을 얻기를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효도라고 말한다. 이것은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나 자신에게도 통용되는 원칙으로, 삼보를 믿도록 하고 계행을 지키고 보시를 잘 하고 지혜를 갖추도록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
봄비 2
신라시대 골품제에 부딪쳐 좌절한 당대의 문장가 최치원은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 날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 '추야우중'을 썼다. 이 시는 흔히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해석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데에서 오는 좌절감이 묻어난다.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것은 중생들이 가지는 가장 큰 병인 무명, 즉 '내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맥락은 중국의 시성 두보의 시에서도, 사형선고를 받은 70년대 참여시인 김지하의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진각국사 혜심스님은 이렇게 무명에 젖어 있는 중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비가 내리는데 어디를 쏘다니느라고 쓸 데 없는 노력을 하는가?" 라고. 스님은 장대비가 쏟아지면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올 때는 가만히 앉아 그물코처럼 연결된 인드라망을 떠올리자. 그 화두에 골몰해보자.
봄비 1
비가 오면 감상에 젖어든다. 지나간 옛 인연을 떠올리기도 하고 괜스레 울적한 심상이 되기도 한다. 옛날 사람들은 내리는 봄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중국의 시성 두보는 '춘야희우'라는 시에서 비가 내리는 정취를 묘사하면서도 아직 버리지 못한 사대부의 꿈, 즉 중생심을 드러낸다. 반면 진각국사 혜심스님은 내리는 보슬비를 보며 딴 생각 피우지 말고 연기실상의 이치를 깨닫도록 노력하라는 당부의 말을 했다. 알듯말듯한 연기실상의 세계. 진리. 오로지 그 생각만 하는 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며,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은 무엇일까? 자기 성찰이다. 알아차림이다. 법구경 33, 34, 35번 게송을 통해 마음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보자. 마음은 본디 흔들리고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을 잘 다스리겠다고, 중생심에서 벗어나 해탈로 가는 수행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가장 먼저 몸부림치고 반항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수행하지 않은 마음이 바로 중생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을 믿지 말고 항상 다스리려고 노력해야 한다.마음을 다스릴 때에는 누군가 언제나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처럼 방일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마음을 길들이면 길들여진 마음이 행복을 가져온다.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 즉 자기 성찰은 비단 불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나랏일을 하는 정치인들과 위정자들 역시 다른 어떤 것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성찰할 줄 알아야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정책을 펼 수 있다.
올바른 인간관계, 진정한 친구란?
누구나 진정한 친구를 바란다. 변함 없는 친구에게서 위로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나 영원한 우정이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는 현실에 실재하는 친구가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어 놓은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친구라는 개념이 아바타임을 알고 현실의 친구와 끝임없이 동기화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의 친구도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변함 없는 우정과 친구를 바라는 것은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변함 없이 정신적, 정신적 이익을 주는 사람을 원한다. 이익을 바라는 것은 왜인가? 뿌리 깊은 아상이 있기 때문이다. 변함 없는 친구를 만들고 싶다면 나를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 자기 성찰의 힘을 통해 아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 대로 사는 길이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갖는 방법이다.
좋은 습관을 들이는 방법
나도 몰랐던 나의 나쁜 습관을 발견할 때가 있다. 스스로 알아차리지는 못했고 영상과 같은 객관적인 매체를 통해서 스스로의 나쁜 습관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스스로의 나쁜 습관을 알아차리는 것은 힘든 반면, 남의 나쁜 습관을 알아차리는 것은 쉽다.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기 때문이다. 내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을 불교에서 무명이라 한다. 우리는 타인을 향해 있는 감각을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에 활용해야 한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바라보는 데에서 나의 나쁜 습관을 발견하고, 수정하고, 좋은 습관으로 바꾸어갈 수 있는 단초가 나온다. 나 자신을 매 순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에서 자연스럽게 좋은 습관이 생긴다.
아모르파티(Amor fati)
흔히 처세술에서 “노력하는 것 자체가 곧 목적이다.”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그러나 마치 시지프스의 형벌과 같이 괴로운 삶을 계속 이어나가야만 하는 우리네 삶에 대입하기에는 어패가 있다. 서양의 근대 철학자 니체의 말이자, 트로트 가수 김연자의 노래 제목으로 유명세를 탄 “아모르 파티”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아모르파티는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다. 니체는 인간의 삶이 윤회로써 계속된다는 영원회귀 사상을 펼쳤다. 이는 불교의 무시무종과도 닮아 있다. 인생은 목표가 아니고 원칙이다. 목표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 순간순간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것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나
시험을 준비하든, 인생에 고비를 지나가든, 사람들은 무언가 믿을 대상이 필요하다. 믿음의 대상이 필요하다는 말은 현재 상태가 불안하다는 뜻이다. 불안함은 미래를 알 수 없는 데에서 기인한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불안해 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믿을 대상을 찾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은 확인된 지식이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올바로 아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인된 지식에서 자신감이 생겨난다.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이 끊어진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은 평소에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가 습관이 되었을 때 보다 수월하게 불러올 수 있다. 자기를 알아차리는 것은 수행이자 믿음이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
누구나 일상에서 자잘한 짜증이나 스트레스, 화와 맞딱뜨린다. 화는 우리의 일상을 힘들게 하고 심하게는 병들게도 한다. 화가 날 때 도움이 되는 3단계를 소개한다. 1. 화를 윤리적인 잣대로 대하지 말 것. 화는 선과 악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화를 냈으니까 잘한 것이다, 잘못한 것이다, 착한 것이다, 나쁜 것이다라고 자책하지 말자. 화라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행복하게 하는가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불교적 관점이다. 2.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릴 것. 화를 참거나 화를 안 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화라는 감정이 일어날 때는 자비라는 감정으로 대응해야 한다. 3. 분노하는 마음의 실상을 알 것. 화라는 감정의 실체가 있거나 화를 유발한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조건에 따라 상황에 따라 화가 생겨난다. 화가 나는 조건과 인연이 바뀌면 화가 사라진다는 본질을 제대로 알자.
입장과 관점
공양간 옆 왕벚꽃나무가 흐드러지게 개화했다.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핸드폰 카메라를 들게 만든다. 과연 사진으로 찍은 왕벚꽃나무 중 가까이 찍은 것이 진짜 왕벚꽃나무일까, 멀리에서 찍은 것이 왕벚꽃나무일까? 만일 누군가 증심사에 왕벚꽃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 왕벚꽃나무는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대상은 입장과 관점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한다. 모습이 다른 대상 중 어떤 모습이 진짜 그 대상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저런 생각을 하는 나. 보살의 마음을 내는 나, 중생의 마음을 가진 나. 이런저런 '나'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 나일까? 부처님은 무엇을 무엇이게끔 하는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단지 그것을 둘러싼 모든 상황들이 어느 순간 일시적으로 모여서 그것이 되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의 이치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곰곰이 생각해보자.
길 위의 시간
일상 속에서 육체의 건강을 영위하기 위한 방법으로 산책을 하곤 한다. 산책은 육체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좋은 처방전이 된다.사람들은 일상을 떠나 여행길에 나선다. 제주 올레길, 산티아고 순례길, 시코쿠 순례길 등 길을 걸으며 무언가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털어내고는 한다. 일상을 떠나 여행을 떠나는 것. 일상에서 길을 떠나오는 것. 그것은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다. 낯선 곳에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큰 지혜이다. 일상에서는 나와 남 회사, 크게는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봉사의 자세로 살고 일상을 벗어난 시간은 내 마음의 수행을 위해서 쓸 수 있다면 지혜와 자비 양 날개를 두루 갖추는 불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무처럼 살자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한다. 젊을 때는 내 앞에만 길이 막혀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생을 '나무'에 비유해보는 것은 어떨까? 다소 고달픈 젊은 시절은 씨앗을 뿌리는 시간이다. 뿌린 씨앗 중 어떤 것이 싹을 틔울 지는 모르지만 그중 하나가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으면 주변의 동물과 곤충, 그리고 사람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씨앗의 싹을 틔우는 것은 숱한 인연이다. 나의 의지와 우연이 만나 인연을 맺고 숙명이 된다. 내 인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인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앞서거나 뒷서가는 길에서 벗어나 나무처럼 살자. 나
폭력과 비폭력
'하늘도 무심하시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런 일을!' 하고 경악하게 만드는 사건사고들이 전파를 탄다. 사회적 규칙을 어긴 죄로 사회적인 처벌을 받는 것과 별개로 범인을 향한 비방이 쏟아진다. 그러나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일어난 조건을 살펴야 한다. 그 사람에게 분노하기보다 그의 분노를 촉발한 조건에 분노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다. 비방하는 마음자세는 무엇보다 내 안에 분노와 악의와 악업을 만들어내기에 내려놓아야 한다. 화를 내는 것은 악업이며 악업은 반드시 고통이라는 과보를 동반한다. 같은 조건에 놓여있더라도 내 안에 악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과로써의 폭력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악업을 키우는 대신 자비의 마음을 키우는 불자가 되자.
인생의 고통과 행복
왜 중생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가? 고통은 일종의 신호이다. 화, 우울, 두려움, 불안함, 짜증 등의 고통의 감정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과연 고통의 신호를 받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고통을 회피하거나 무시해서는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고통의 원인을 없애야만 고통의 보상으로써의 행복을 맛볼 수 있다. 고통은 우리 안에 있는 나 밖에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 즉 중생이 보낸다. 중생이 보내는 신호를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중생의 길이다. 지혜로운 중생의 길을 보다 발전시킬 때 지혜로운 수행자의 길, 지혜로운 부처님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삶의 기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길 잃은 산행 경험에서 비추어보는 올바른 인생의 기준. 잘못된 길을 갈 때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내가 잘못 가고는줄 모르고 가는 경우. 둘째, 올바른 길의 안내자가 없는 경우. 셋째, 올바른 길에 대한 절실함이 없는 경우. 넷째, 지금 있는 곳을 성찰하지 않는 경우. 바꿔 말하면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과, 그 승이 제시한 길에 대한 믿음 혹은 간절함과,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우리를 '행복'이라는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다시 생각하는 ‘개미와 베짱이’
'개미와 베짱이'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 겨울을 대비할 수 있고 베짱이처럼 놀고 먹으면 겨울이 왔을 때 고생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솝우화다. 그러나 이 교훈이 꼭 현대사회의 현실에 들어맞지는 않는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 우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개미처럼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할까? 베짱이처럼 현재를 즐기며 살아야 할까? 부처님께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실재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과거 현재 미래에 집착하는 것은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삼세가 있고 내가 있다는 무명에서 벗어나며, 다만 행위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내가 모두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무언가를 할 때 행복해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가족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과 애착이 생긴다. 애착이 굳어지면 소유욕이 된다. 사랑을 이유로 소유 심리가 생겨난다. 불안한 마음은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내 것' 이라는 소유는 증표가 없다. 단지 내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가족에게만 그러한가? 다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유물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사진에 대한 소유욕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에게서 불안이 생겨난다. 나에 대한 애착, 생존에 대한 애착을 버릴 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음의 상처
부처님은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쓸데없이 비탄에 잠기고 혼미해지는 두 번째 화살을 스스로 자초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과 듣지 않은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을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차이를 드러낸다. 두 번째 화살을 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생각을 불려가면서 기분이 좋다 나쁘다 화가 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화살의 상처를 만들듯 사람들은 마음으로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스스로가 만든 세계를 잘 살펴볼 일이다. 이것이 내가 만든 감정인지 밖에서 온 행위인지를 잘 관찰하면 두 번째 화살 역시 자연스럽게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혼자가 나아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족 형태는 1인 가구이다. 학생, 취업한 청년, 주말부부 등 다양한 형태의 1인 가구가 존재하지만 최근 급증하고 있는 것은 55세 이상의 '황혼 이혼' 가구이다. 오랜 세월 살아온 부부가 결별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왜 나의 배우자가 남보다 못한 사람이 되었는가? 그것은 그 사람에게 덧칠한 나의 감정 때문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에게 나의 감정을 덧칠한다. 내 감정으로 덧칠하기 전 원래 그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졌을까? 오랫동안 덧칠한 감정을 걷어내고 볼 때 비로소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희망에 대하여
희망, 소망, 바람, 소원 같은 말은 모두 '무언가를 바란다'는 뜻이다. 절에 기도를 하러 오는 사람들도 갖가지 희망을 진고 있다. 희망은 삶의 필수 요건이지만, 희망이 삶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아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흔히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를 또렷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들어주는 의존적인 소원을 내 스스로 이뤄나가는 희망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갈래 길: 보살과 중생
마녀의 함정에 빠져 위험해진 헨젤과 그레텔 남매는 기지를 발휘해 위험에서 벗어나고 마녀를 물리친다. 환경을 극복하고 상황을 바꾸어 쟁취한 인과응보는 중생의 길이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전생에 조리와 속리라는 어린이였다. 이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다음 생에는 의지할 바 없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이는 보살의 길이다. 역사 속에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늘 선택과 맞딱뜨린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보살의 길과 중생의 길, 당신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노년의 삶
산업화, 현대화, 도시화가 가속하면서 경로사상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경로사상이 사라진 것은 마을의 실종, 공동체의 해체와 연관되어 있다. 마을공동체의 대안은 무엇일까? 느슨한 관계이다. 개인의 사생활은 침범하지 않으면서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느슨한 관계는 시골의 마을회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찰이 또 다른 대안일 수 있다. 절에 나와 참배도 하고 밥도 먹고 법우들과 차도 마시고 노닥거리는 것이 느슨한 관계에 다름 아니다. 불자라면, 여기에 대해 내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수행을 해야 한다. 매 순간 내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 번뇌가 사라지는 부처님의 경지에 다가가기 위해 수행하며 사는 것이 바로 노년의 삶이며 지혜이다.
화를 치료해주는 특효약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아서, 내 마음 대로 되지 않아서 우리는 화를 낸다. 그러나 세상일은 내 마음 대로 할 수 없고, 세상을 나 혼자 사는 것도 아니다. 화가 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화를 다스릴 수도 있고 끌려갈 수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화를 제거하는 것이다. 화를 치료하는 특효약은 화가 나고 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감정을 알아차리면 감정이 사라진다. 그리고 순간순간의 감정을 잘 보기 위해서는 평소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어두어야 한다.
나의 정체성은?
영화 으로 톺아보는 정체성 이야기. 나를 나이게끔 하는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1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변함 없는 나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변수이고 '정체성'은 상수이다. 나는 정해져 있는 무엇이 아니며 무엇이든 대입할 수 있는 존재이다. 정체성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말한다. 이제는 질문을 바꾸어보자. '나는 누구인가?'에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자. 나라고 하는 것이 늘 변하는 가운데 지금 여기의 나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부적은 희망이다
"정초에 부적을 찾으시나요?"부적은 미신이라고 치부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부적을 찾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적은 희망이다. 소원은 다만 바랄 뿐이지만, 희망은 바라는 바가 강해서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낳는다. 인간은 마음 속의 희망이 빛바래고 변하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 밖에 희망을 형상화하여 이를 통해 희망을 키우고 다진다. 소원이 강하면 희망이 되고, 희망을 키우면 의지가 되고, 의지가 있으면 뭐든 실현할 수 있다. 희망을 형상화한 것 중의 하나가 부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적도 우리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회
[길따라 절따라] 전쟁과 평화
'길따라 절따라' 답사 프로그램을 통해 진주성에 다녀왔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첨예한 싸움을 벌인 치열한 전투의 땅이자, 7만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 당한 아픔의 땅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전쟁을 아주 먼 옛날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임진왜란의 양상은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또렷하게 반복되고 있다. 인류는 전쟁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하지만, 전쟁은 어떤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만이 전쟁인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국전쟁 혹은 80년 광주의 경험을 통해서 전쟁의 다른 얼굴을 본다. 지나온 역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연장이며, 우리의 삶이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점철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더욱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신냉전시대, 불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2022년 봄, 코로나가 종식되어 간다.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앞에 새로운 위기가 등장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표되는 '신냉전'이다. 신냉전은 독주하고 있는 미국의 질주를 막으려는 러시아,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반격이다. 과거 냉전시대는 총칼로 싸웠지만 현대 신냉전의 싸움은 해당국이 아닌 제3국에서 펼쳐진다. 신냉전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다. 개개인의 삶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현대, 또한 앞으로 펼쳐질 지난한 경제상황을 앞두고 불자가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은 청빈과 소욕지족이다. 덜 입고 덜 먹고 덜 쓰는 청빈의 삶이 체화되어야 앞으로 다가올 신냉전 상황에서 잘 적응할 수 있다.
가족의 의미 3
가족 속 형제자매의 관계를 조명한다. 2021년 11월, 고인의 형제 자매에게 돌아가는 상속 유류분 권리 조항 삭제가 예고됐다. 대가족적 관념이 남아있던 과거와 달리 핵가족마저 깨져 1인 가구가 주류가 된 사회상이 법적인 측면에도 반영된 사건이라 하겠다. 가족관계의 핵심은 직계존속과 직계비속 등 수직적인 관계에 있다. 형제 자매는 수평적인 관계로 부모를 통한 간접적인 혈연이기 때문에 늘 갈등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 형제 자매간의 관계에서 갈등을 줄이는 방법은 가족, 식구라는 특별한 관계성보다 일반론적 인간관계에 의거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관계성 때문에 각별한 집착이나 소유욕, 지배욕으로 상대방을 대하지 않는지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또한 갈등 상황이 나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상대방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내 감정은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타인에게 교정을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의미 2
가족을 위해 하는 기도의 공덕은 오롯이 가족에게 갈까? 불교에서는 가족을 어떻게 해석할까?부처님께서는 전생의 일화를 통해 부부관계나 부모자식간의 관계에 대해 정립해주었다. 부부는 도반의 관계다. 함께 수행하며 서로의 수행을 독려하는 관계다. 부모자식간에 부모는 자식에게 스승이 되어주어야 한다. 자식이 선업을 쌓을 수 있게, 악업을 멀리할 수 있게 가르쳐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가족은 인생이라는 여관방에서 어쩌다 같이 묵은 것일 뿐, 애착하거나 집착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그네가 아침에 일어나면 이내 흩어지는 것과 같이 미혹하여 얽매여서는 안 된다.
가족의 의미 1
우리는 나를 기준으로 부모와 자식을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혹은 식구는 흔히 한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1인 가구가 전체의 40%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같이 살지 않는 가족에 대해 '우리 가족' '우리 식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짜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어떤 사람들은 실제 가족이 아닌데도 가족처럼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간다. 가족은 이러해야 한다는 통념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부처님은 대중처소에서 살지 않고 혼자 수행하는 수행자에게 혼자 사는 미덕에 대해 말씀하셨다. 혼자 사는 사람은 소유와 집착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조차 소유하려고 한다. 나 자신에 대해 소유하려고 한다. 이런 소유에 대한 탐욕과 갈애를 버릴 때 오롯이 혼자 살아갈 수 있다.
민식이법 놀이, 어떻게 봐야 하나?
민식이법 개정 이후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민식이법 놀이'가 유행하고 있다. 달리는 차량에 뛰어들어 운전자를 놀래키는 아이들. 도대체 왜 이런 위험천만한 놀이를 하는 걸까?그것은 그동안 사회적 약자로 존재해온 아이들이 법 조항을 방어막으로 삼아 행하는 복수에 다름 아니다. 부처님 당시에 서로 원한을 품은 여인들이 있었다. 여인들은 생을 거듭하며 서로에게 쫓고 쫓기는 삶을 살다가 부처님 앞에 이르러서야 서로에 대한 증오의 불길을 끌 수 있었다. 원한은 원한으로 갚을 수 없다. 악업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과보가 있다. 계속해서 나쁜 과보를 주고 받으면 그 악순환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원한의 악순환, 악업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꺼이 손해보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다. 욕망의 사바세계에서는 착한 일을 하면 손해 본다. 그러나 누군가는, 어느 선에서는 악업의 연쇄작용을 끊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불자로써의 마음가짐이고 불자로써의 수행이다.
나 혼자 산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불교 최초의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 유명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결국 '혼자서 가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1인 가구가 대세가 된 현대사회에 주는 울림이 적지 않다. 사자가 소리에 놀라지 않는 것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상황에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스스로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바람은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다. 바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얽매이지 않고 붙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집착과 애착을 덜어내자.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 역시 집착과 애착에서 자유롭게 때문에 홀로 청정할 수 있다. 이렇게 두려움과 집착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진정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존재이다.
병든 지구를 살리는 길
2020년 8월, 코로나19 재유행 상황에서 생각하는 '병든 지구를 살리는 길'. 자연은 기후위기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류를 총공격하는 상황에 인류는 제각각 분열과 갈등으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전지구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해결책이 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인간만이 자성할 수 있는 존재이다. 부처님이 전륜성왕의 길을 버리고 수행자의 길로 나선 것도 같은 이유이다. 현재의 인류도 오랫동안 지구와 공존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본능을 다스리고 무명이라는 허상을 깨쳐야 한다. 병든 지구를 살리는 길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다듬어나가는 데에 있다.
코로나시대 뉴스 보기
2020년 7월, 뉴스 헤드라인의 대부분은 코로나19와 기후위기로 채워진다. 불안해서 뉴스를 보고 뉴스를 보고 더 불안해지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뉴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사회를 본다. 코로나19로 대표되는 자연과의 싸움. 그 최전선에는 근거 없는 가짜뉴스와 미신에 빠져 방역지침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후방에서는 사회 내부에 쌓였던 갈등요소가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목도한다. 모두 불안함 때문이다.인본주의와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현대인이 자연을 정복한 것 같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는 낯설고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신화적 세계관이 내재해있다. 위기상황에서 신화적 세계관과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엎치락뒤치락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으로 들끓게 한다.해답은 2500년 전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적 세계관에 있다. 개인은 스스로를 성찰하는 마음 단련을 해야 하고, 국가는 개인들이 그런 노력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교육과 문화를 통해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요가와 템플스테이
일상에서 접하는 요가는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 건강 관리와 힐링을 위한 도구로써 널리 알려져 있다. 요가는 대중화되고 상품화된 가장 대표적인 인도문화의 하나이다. 원래 인도에서 요가는 신과 합일하기 위한 수행을 일컫는 것으로, 8단계 중 3번째 수행단계인 '아사나(행법)'가 '요가' 전체를 대표하는 상품이 되어 전세계에 퍼져있다.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인 템플스테이도 본래 객승이나 기도하러 온 신도들에게 방을 내어주던 것이 상품화된 것이다. 요가와 템플스테이는 문화가 상품으로 탈바꿈했다는 데에 있다.그러나 우리가 불자라고 한다면 단지 불교문화를 소비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의 교리가 내 삶에 녹아들 때만이 진정한 불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정치인의 자격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즈음하여 불교적으로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인의 자격. 정치인을 판단하는 두 가지 중요한 덕목은 정직과 헌신이다. 정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양설을 하거나 기만하는 말도 거짓말의 일종이다. 헌신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비심이 넘친다는 것은 도둑질 하지 않는 것이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정직과 헌신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 가지 계율의 현대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정직과 헌신은 불자들의 삶의 자세이자 공직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를 가질 때에만 올바른 정치인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올바른 정치인을 가려낼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코로나19로 인류의 사회활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멈춘 세상에서 자연은 스스로 자정하며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필연적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고 효율에서 위기대응으로 전환하는 것은 소극적인 대처법이다. 일상생활, 생활 습관, 인류문화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고통의 완전한 종식에서 온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에서 코로나19 이후 우리 삶의 태도를 길어올려보자.
코로나19를 대하는 불자의 자세
사회를 지탱하는 서로간의 신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깨지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사회를 병들게 한 모습의 일례이다.코로나19 대응은 의료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제 시스템을 복구하는 것, 우리 생활속에 깊이 스며든 문화를 바꾸는 것, 또한 정부의 지침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모두가 우리 사회를 자정하려는 노력이다. 불자로서는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를 수행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모습을 직시하고,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더욱 불자답게 사는 것이 코로나19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길이다.
공동체주의, 개인주의
공동체주의는 좋은 것인가?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주의는 회복해야 할 정신적인 가치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견 공동체는 '폐쇄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집단주의로 변질될 소지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불교의 자비는 뜨거운 사랑이라기보다 차가운 배려에 가깝다. 나라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이 중요한 만큼 타인 역시 한 사람의 주체적 개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주창하는 공동체정신이 개인의 주체성을 말살시키지는 않는지, 개개인의 경험에 빗대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관용
2019년 8월, 일본 '표현의 부자유전'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헤프닝과 영화 '나랏말싸미' 역사왜곡 논란으로 돌아보는 우리 사회의 관용 정신.관용은 존중이다. 나와 당신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이야기의 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일본 우익들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사태와 일부 타종교인들의 '나랏말싸미' 배급 중단 요청 등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기에 발생한 일이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일조한다. 관용의 정신이 바로서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이 다른 타인과 토론을 통해 자기 주장을 정당하게 펼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해본적 없엇 낯설고, 마음 편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본의 경제 침탈, 그 본질과 대응
2019년 8월, 일본의 아베 정권은 한국과의 경제적 협업을 반려하겠다는 의미의 '화이트 리스트 제외'를 공표했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일본의 경제 도발에 대응하고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도 소련을 견제해야만 하는 미국의 묵인 아래 일본의 국가주의, 제국주의는 청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쟁을 일으킨 각료들이 여전히 일본의 정치를 주름잡고 있다. 아시아를 제멋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과거의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일본 극우세력의 득세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또 국민은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가?
경전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4
지식을 많이 쌓는 '똑똑한 분별'은 수행에는 쓸모가 없는 일이다. 내가 죽는다는, 나도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마음을 깨치기 위한 '간절함'이 생긴다. 마음을 깨치기 위해서는 수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음심과 탐심, 진심을 멀리해야 하고 재물과 색이라는 재앙중의 재앙을 조심해야 한다. 착한 마음 나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착하다 나쁘다 하는 분별 자체를 떠나야 하며, 주변의 상황에 상관 없이 동요가 없고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상태 그대로가 부처의 마음이다.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3
불교 공부는 할수록 쌓이는 공부가 아니라 평생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공부이다. 간절한 동기부여가 없으면 말짱도루묵이 되는 공부이기도 하다. 재물욕과 권력욕과 명예욕을 바라는 중생심은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생긴다. 목숨이라는 것에 뿌리를 깊게 내린 중생심을 걷어내는 것은 목숨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공부를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밖으로 끄달리거나 안으로 분별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잘난 체 말고 숙맥처럼, 어린아이처럼, 귀머거리처럼, 벙어리처럼, 여행자차럼 관찰자 모드로 지낼 때야 비로소 내 마음을 가지고 있는 망상들을 없앨 수 있다.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2
생사를 면한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닌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서 중생들의 수행은 시작된다. 내 마음을 다스리고 내 생각을 다스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수행은 나아가 생각의 본질의 무엇인지를 탐구하게 하며, 생사를 면하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화두는 의심하는 것이되, 의심하기 전에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을 한군데 가만히 두는 연습을 먼저 해야 한다. 주력이나 독경, 염불 등 다양한 수행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딴생각이 들더라도 수행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딴생각을 하는 간격이 길어질수록 수행에 몰입하는 시간이 길어진다.이렇게 마음을 붙잡아두는 연습이 끝나면 붙잡은 마음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관찰한다. 이렇게 수행할 수 있도록 사람으로 태어난 인연이 얼마나 지중한 것인가를 느끼는 것도 훈련을 통해서 증장시켜 나가야 한다.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1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을 통해 알아보는 수행자의 덕목. 스님(중)은 성직자, 수행자, 생활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경허선사의 '중노릇'의 대상은 수행자로서의 스님이다. 스님뿐만 아니라 수행하며 살겠다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허스님이 말하는 중노릇을 삶의 태도로 체화해야 한다. 왜 수행자로 살아야 하는가?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내가 없음을, 삶도 죽음도 없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 몸은 내가 아님을 알고, 모든 것이 그물코처럼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은 전생과 이생, 내생 역시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찾아야 하며, 마음을 찾고자 하는 자는 수행해야 한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8 (完)
이 시간에는 초기불교의 수행법을 공부하기보다 현재 우리의 수행 모습을 점검해본다. 수행을 해야 한다고 불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수행하는 불자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과연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왜 강력한 동기를 갖고 수행하지 못하느냐고 다그칠 수 있을까? 인도사상과 인도불교의 핵심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수행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수행 전통이 한 번도 메인 컬쳐가 되본 역사가 없다. 종교라는 외피를 입고 우리나라에 유입된 불교는 기존의 민간신앙, 토속신앙 등 주술성을 기반으로 한 제례의식에 풍부한 사상과 이론을 제공하는 역할에 그쳤을 뿐, 참선이나 간화선 수행은 소수 엘리트를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개인이 열심히 수행하는 기반이 단단하지 않은 현재 우리사회에서 수행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을 공유하면서 초기불교 공부를 마친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7
12연기를 언뜻 들으면 이해하기 쉽다고 착각하지만 12연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주 심오하고 어려운 일이다. 마치 너무 맑고 투명한 호수는 언뜻 보면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12연기를 설명하는 네 가지 방식 중에서 남방불교에서는 '분위연기'를 채택한다. 12연기의 12개 요소가 과거, 현재, 미래의 생에 걸쳐 5온을 상속한다고 풀이하는 해석이다. 이 같은 분위연기적 해석은 삼세양중인과설로 이어진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인과가 두 번 반복되는 것으로 과거의 인이 현재의 과가 되고, 현재의 인이 미래의 과가 된다. 이때 등장하는 무명 행 식 명색 촉 수와 같은 12연기의 요소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단어의 개념과 달리 아비달마만의 독자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이해한다 하더라도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언어로 12연기를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실참수행을 통해 12연기를 체득해야 할 것이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6
아비달마 불교의 철학적 성격을 규명한다. "일체는 12처다."라는 진리는 생문 바라문의 질문에 따른 부처님의 대답이다. 부처님은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힌두교적 사상을 토대로 "이 세상을 주재하는 근원적인 존재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질문한 생문 바라문에게, 세상은 브라흐만이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고 경험한 것"일 뿐이라고 파격적으로 답했다. 또한 아비달마에서는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적 존재를 해체하는 기준으로 '법'을 내세운다. 5온, 12처, 18계와 같은 개념은 아비달마에서 법을 해체(그룹핑)하는 각각의 범주이다.아비달마에서는 이러한 법을 객관적인 실재로 규정하고, 대승불교에서는 법의 '실재'를 비판하지만 중요한 것은 법의 실재성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법의 공상을 통찰하여 열반으로 간다는 수행 그 자체이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5
오온은 무엇인가? 흔히 '색수상행식'이라고 답한다. 답을 할 때, 불교의 교리를 일반적인 지식이나 실용 논리로써 인식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았는지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오온은 단지 색수상행식이 어떤 것이다 하는 지식이 아닌 나라는 존재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라는 것을 통찰하기 위해 나를 해체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오온은 곧 '나'다. 세상에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했던 '나'가 실은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고정관념일 뿐 다섯 가지 무더기가 모여있는 것이 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온을 통해 아공과 법공을 깨달으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이 염오의 과정이며, 염오의 과정으로 내 안에 쌓여있던 탐욕이 빛바래는 과정을 거쳐 궁극적인 열반에 이른다. 오온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이며, 수행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4
사성제는 불교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부처님이 불교란 무엇인지 1분 요약으로 설명한 것이다. 당시 인도사회의 보편화된 개념이었던 열반을 주제로 어떻게 열반에 이를 것인가를 이야기한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의 키워드를 '괴로움'으로 삼았다. 열반이란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사성제의 전반부에서 괴로움이 무엇인지, 왜 괴로운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이어서 열반이 무엇이다는 것을 괴로움의 소멸로 정의하고, 소멸에 이르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한다.불교의 핵심은 괴로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개념을 해체하는 것을 통해 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는 것이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3
불교에서 말하는 법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써의 법(담마)이요, 둘째는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써의 법(다르마)이다.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 의미의 법이다. 존재의 기본 단위로써의 법은 또한 두가지 성질로 나뉘는데, 먼저는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고, 이어서는 그러한 고유성질을 유지하는 최소단위인 찰나이다. 우리가 현실에 실제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고유성질로 해체할 수 있으니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아공이다. 또한 법은 찰나생 찰나멸이기에 무상하고 이는 법공을 의미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아공과 법공을 공히 성찰해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2
제1장에서 초기불교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2장에서는 초기불교의 기본 주제가 '행복 추구'라고 설명했다. 제3장 '열반-초기불교의 궁극적 메시지'는 앞의 두 장이 더욱 심화된다. 행복의 추구라는 인간 공통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목표에 도달하는 레시피(법칙)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이 제시한 행복 레시피는 사성제이며, 사성제는 곧 불교가 인간을 어떻게 보는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인식과 존재론을 어떻게 제시하는지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불교의 시각을 정리한 것이 초기불교의 교학체계이며, 이러한 교학체계는 단순히 지식으로써의 불교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 라는 우리 인생의 명제와 맞닿아 있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이해 1
각묵스님의 로 알아보는 불교의 원형.부처님 당대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초기불교는 다양화된 한국불교의 원형을 알 수 있게 하고, 대승 중심의 한문 경전이 익숙한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과 시사점을 제시하기에 중요하다. 초기불교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초기불교는 명칭과 개념을 해체한다. 개념의 해체를 통해 연기실상을 통찰할 때 존재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떨어지며, 그랬을 때 연발이 실현된다. '어떻게 하면 궁극적인 행복으로 갈 수 있는가?'에 불교는 대답을 제시한다. 초기불교에서는 보시, 지계, 수행이 궁극적인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며, 세 가지 영역이 모두 잘 이루어질 때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증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8
참선요지 마지막 시간. 허운스님의 법문으로 알아보는 공부하는 방법. 공부하면서 많은 조사어록과 큰스님들의 법문을 접하게 된다. 끽다거, 차나 한 잔 들라는 말과 모든 연을 쉬어버리라는 말, 있음과 없음의 두 갈래 길이 난 곳을 간다는 말, 생사에 윤회한다는 말, 모든 사물이 꿈이고 허깨비 같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모든 비유가 향하는 곳은 결국 처음이다. 참선의 목적이다. 마음을 밝혀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위의 모든 비유는 화두를 드는 마음 자세에 대해 이르는 말이며, 모든 망상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참 마음이 드러난다는 것을 다시금 다시금 설명하는 말이다. 때문에 깨닫지 못한 우리 같은 범부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정진 수행하는 일이다. 참선의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그것이 곧 수행의 동력이 되며, 그것이 바로 불교의 참된 신심의 요체다.
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7
참선을 하면서 마주치는 네 가지 경계(장애)와 이를 극복하는 방법.화두 참선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혼침하거나 망상을 하고 조금 지나면 화두를 들기는 들되 화두(생각의 머리)가 아니라 화미(생각의 꼬리)에 끌려다니다가 결국 염화두를 하게 된다. 염불하듯 화두를 해서는 안 된다. "도대체 누구" "대체 어째서"라는 질문에 집중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일으켜야 한다. 궁금증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다음 단계로 이 궁금증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를 살펴야 한다. 염불로 시작하여 결국은 궁금증이 어디에서 시작됐는가를 탐구하는 과정이 염불시수 화두이다. 수행하면서 환시, 환청, 특별한 체험을 하는 마장이 생길 때에는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랬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야 한다. 궁극적으로 참선의 목적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다. 삼매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백척간두 진일보하여 연기실상을 보는 본연의 목적으로 성큼 다가서야 한다.
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6
참선의 네 번째 방법은 '조고화두와 반문문자성'이다. 참선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돌이켜서 자성을 듣는 것이며, 화두를 환하게 비추어서 살피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것은 순류이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이 끌려다니고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은 역류다. 순류의 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물인 망상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이다. 참선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부차적으로 생사심과 장원심이 있어야 한다. 생사심은 이 몸을 가지고 있는 이 생에 수행해야 한다는 간절함이고, 장원심은 잘되는 못되든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이다.초심자는 습과 아만으로 인해 공부가 어려우나, 단지 놓아버리고 일념만을 들 수 있으며, 구참자는 백척간두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으나 해온대로 면밀하게 공부할 수 있는 쉬움이 있다.
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5
본격적으로 참선의 방법을 알아본다. 좌선을 할 때 몸은 자연스럽고 올바르게 자세를 취해야 하고 마음은 너무 초조하거나 급박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신이 피폐해지고 심한 경우 마가 붙게 된다. '공부에 착수하는 법'은 손님과 주인을 인식하는 것이다. 마음은 생각(망상)과 다르며, 생각은 조건에 따라 생하고 멸하는 객과 같고 마음은 주인처럼 허공처럼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화두와 의정'은 본래 성품으로 가는 수단이다. 한 생각 일어나기 전, 즉 화두 이전이 바로 마음이고, 화두를 관하며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자성을 보는 다양한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외부세계를 인식하지 않을 때 참 공부가 시작되며, 이렇게 참 공부에 들어가 망상을 제거했다면 망상을 제거한 무기의 세계에 머물지 말고 참선의 목적인 자성을 보는 것으로 즉시 나아가야 한다.
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4
허운스님이 제시하는 공부의 입문방법은 네 가지다. 첫째, 인과를 깊이 믿을 것. 둘째, 계울을 엄히 지킬 것. 셋째, 신심을 굳게 지닐 것. 넷째, 수행의 문을 정할 것 등이다. 이는 도를 깨치는 선결조건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되기를 바라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이 인연의 법칙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계정혜 삼학의 첫 번째 단계이다. 계율을 지키면 선정이 생기고 선정이 갖춰지면 지혜가 생긴다. 계정혜는 처음에는 순차적인 단계로 가고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후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성장한다. 신심을 굳게 지닌다는 것은 모든 행위의 바탕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믿음이 없이 의심이 있으면 무언가를 행동할 수 없다. 믿음은 모든 일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다. 수행의 문을 정한다는 것은 입문의 단계에서는 어떤 수행이든 하나의 수행을 진득해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네 가지 선결조건을 깊이 알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3
요즘 감각으로 설명하는 ‘참선의 선결요건’. 인간은 공간적으로 사고한다. 시각으로 정보의 70% 이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도, 감정도, 생각도 공간적 사고 패턴으로 받아들인다. 참선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기 위해서 한다. ‘있는 그대로’는 인식된 세계, 허상, 말로 표현되는 세계 너머에 있는 실상을 의미한다.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기존의 인식을 통해 실상을 인식하는 데에 오류가 있다는 거는 아는 것이다. 나의 인식 패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생각의 전환 그 자체이다. 공간적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며, 그 수행의 방식이 화두를 관하는 것이다. 화두를 관하는 간화선른 다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로 바로 가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사고 패턴을 깨부술 때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자성을 볼 수 있고, 이것이 연기실상을 보는 것이고, 성품을 보는 것이고, 참선의 목적에 다름 아니다.
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2
마음은 말의 머리요, 생각의 머리요, 만법의 머리이다. 이것이 곧 화두(話頭)이다. 화두를 관할 때는 내 머릿속에서 이미 만들어놓은 이미지가 아닌 연기실상의 세계, 실상을 관해야 한다. 간화선은 실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 절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들 때, '부처님께 절을 하는 나'에 천착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느낌 그대로에 집중해야 한다. 마음을 느끼고, 망상드르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그 생각들이 어디에서 생겨 어디로 사라지는 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육근을 거두어들이고 마음을 고요하게 관찰할 때, 어느 순간 홀연히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1
근현대 중국불교 중흥조 허운스님의 '참선요지'로 공부하는 온라인 참선 강좌.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이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마음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이고 성품을 보는 것은 자성의 참모습을 실답게 보는 것이다.참선의 선결 조건은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성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망상을 제거한다는 말은 분별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는 보는 것이며, 이는 참선을 하는 목적이다.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내 밖의 모든 것들과 내 마음이 부딪쳐서 생멸하는 생각이 없어져야 한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생각을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을 돌이켜 통찰하는 것이 화두이며, 그 결과로써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은 모두 거짓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야심경 해설 7 총정리
공은 연기다. 공의 세계는 연기실상의 세계다. 우리의 인식 속 세계가 아닌 실재 연기실상의 세계인 공에는 오온도 없고, 육내입처도 없고, 18계도 없고, 12연기도 없고, 사성제와 지혜까지도 없다. 오온부터 사성제, 지혜까지의 개념은 모두 '나'라는 것이 있어야 생기는 인식들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깨달은 진여의 세계에는 '나'가 없으므로 앞서 말한 모든 개념들이 공의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다. 반야심경은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뿌리 깊은 착각을 깨라고 말한다. 그러한 뒤바뀐 생각을 멀리 떠나는 것이 바로 열반에 들어가는 길이다. 열반으로 가는 길은 수행을 통해서 이뤄지며, 반야심경에서는 말하는 것 자체로 신비한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방편, 진언을 수행의 방법으로 제안하고 있다.
반야심경 해설 6 반야심경의 구성과 의미
불교는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종교이다.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아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오온이 공한 것은 오온이 연기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생하고 저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멸하는 의지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나고 멸하는 것 또한 연기실상의 세계가 아닌 내 마음 속 이미지며 틀이 그러한 것이니, 공이라는 것에는 12처도 18계도 12연기도 없다.
반야심경 해설 5 오온, 내 마음이 만들어낸 이미지
오온은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으로 이루어졌다. 눈 앞에 어떤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이 아름답고 다른 꽃과 비교해 더욱 붉고 그래서 꺾어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오온이다. 오온은 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난다. 오온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초점이 맞은 곳에서 주어진 정보에 의해 내 마음이 만들어 낸 이미지이다. 대상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는 주체의 마음에 따라 대상은 백 가지 의미가 되고, 백 개의 세계가 된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은 내가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이미지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무언가에 조건 지어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무엇에 조건 지어졌는가? 내가 가진 관심에 조건 지어졌다. 그것을 인식하는 나에게 조건 지어졌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부가 설명하는 말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반야심경 해설 4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관자재보살은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아'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공(空)을 비어있다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공은 곧 연기다. 모든 것은 조건 지어져 있으며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무언가에 의지해서 생긴다는 진리다. 내 안에 괴로운 감정이 생기는 것은 연기의 이치이다. 이것을 똑바로 비추어 보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추어 보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고요한 마음의 힘을 키워야 하며, 마음의 여백을 통해 나 자신의 감정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중생의 고통이 시작된다. 모든 것이 조건 지어져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추어 보아 아는 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을 아는 것이다.
반야심경 해설 3 집성제 멸성제
사성제 중 멸성제는 고통을 멸하는 방법을 이야기 한다. 반야심경 첫구절에 따르면 관자재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고통에서 벗어났다. 반야바라밀다는 곧 육바라밀이다. 지혜 바라밀이 나머지 지계, 인욕, 선정, 정진, 보시바라밀을 포함한다. 육바라밀은 곧 계정혜 삼학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계와 인욕은 계를, 선정과 정진은 정을, 혜에 해당한다. 육바라밀과 계정혜 삼학은 곧 팔정도이기도 하다. 이것들을 닦음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특히 다른 누구에게 보거나 듣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실참해야만 하는 정정과 정념 즉 정진은 반드시 마음을 내어 직접 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권한다.
반야심경 해설 2 고통과 행복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반야심경의 첫 구절에 불교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과연 고통이란 무엇일까? 고통의 원어인 두카(dukkha)는 수레바퀴가 어긋났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무언가 어긋나있어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가 두카이며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내 마음속 욕망과 나를 둘러싼 조건이 어긋날 때 일어난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생각과 마음이 따로 노는 상태가 괴로운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스스로 욕망과 불안, 분노를 다스릴 수 있으면 그것은 괴로운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괴로움 아닌 상태를 더욱 오래 유지하기 위해 수행을 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반야심경 해설 1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반야심경은 반야부 대승경전의 정수로써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압축해놓은 경전이자 불교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경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불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경전이기도 한 반야심경을 8회에 걸쳐 자세히 알아본다. 불교의 깨달음은 안다와 모른다로 나뉜다. 무엇을 아는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제대로 아는 것이 곧 깨닫는 것이다. 모르면 괴롭고 알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모르는 불자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지식에 불과한지 내 삶을 바꾸는 깨우침인지를 스스로 진단해보자.
보왕삼매론 해설 5
공덕을 베풀 때 과보를 바라지 말고, 이익을 분에 너치게 바라지 말며,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공덕을 베풀 때는 바라는 바 없이 베푸는 무주상보시를 하여야 하나 이를 장애로 알면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장애를 얻는다. 베푸는 마음은 평소 쌓아놓은 공덕에서 나온다. 세상의 이익이 본래 공함을 알면 베풀면서도 바라지 않을 수 있다. 공덕을 쌓는 방법은 선업을 쌓는 것이며, 선업을 쌓는 방법은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남들의 원한을 겸허히 수용하고 신구의 삼업으로 선업을 지어 장애 가운데서 공부에 매진할 것을 당부한다.
보왕삼매론 해설 4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세상 일은 인연에 따라 흘러간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곤란, 재앙이 닥쳐오는 경우에도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등대삼아야 한다. 세상 사는 것에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곤란이 찾아오는 것은 첫째,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인연법을 모르면 재앙(장애)이고 인연법을 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곤란은 인연의 이치에 따라 왔다가 감을 알고,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있다 하더라도 곤란을 스승 삼아, 경험 삼아 더 나은 계획과 대비책을 준비해야 한다.
보왕삼매론 해설 3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며,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 내가 이롭고자 하지 않음, 즉 이타심을 장애로 알면 의리가 상하게 되는 마음의 장애를 만난다. 내가 이롭고자 함 없이 그냥 함께 있는 것, 그냥 내어주는 것이 자연이다. 벗을 사귐에 있어서도 내가 이롭고자함 없이 그저 인연에 의지하여야 한다.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고 내가 남에게 순종하는 것을 장애로 여겨 이를 피한다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는 더 큰 장애를 만나게 된다. 내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 되레 내가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무심하고 주고받는 깨달은 이의 처세를 행할 수 있다.
보왕삼매론 해설 2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고, 수행하는 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장애가 없고 마가 없으면 마음공부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지 않은 것이며, 배움의 등급을 뛰어넘어, 깨닫지 못했는데도 깨달았다고 말하는 불망어죄를 저지르게 된다. 마음공부에 장애는 자연의 이치와 같이, 인간의 생로병사와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참선을 할 때 망상에 빠지고 포기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다. 마음은 찰나 생 찰나 멸한다. 장애라고 생각되는 마음도, 마장이라고 생각되는 현상도 생하고 멸할 것을 알아야 한다. 지레 이를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진정한 장애가 된다.
보왕삼매론 해설 1
보왕삼매론은 원나라 말기 묘협스님의 저서 '보왕삼매염불직지' 중 제17장 10대 애행만을 따로 떼어서 다시 한 번 축약한 경전이다. 열 가지 장애를 수행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어떤 장애도 생길 때부터 '누군가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본분으로 나지 않는다. 자연 그대로인 상태를 누군가가 장애로 느낄 뿐이다. 장애라는 생각에서 장애가 되는 것이다. 중생들은 내가 있다는 생각과 이것이 나라는 생각에 속박되어 있다. 나라는 무명에 속박되어 있는지를 살피면 자연 아닌 것이 없고 장애인 것도 없다. 때문에 몸에 병이 있는 것도 장애가 아니며, 병의 인연을 살펴 병의 성품이 공한 것을 알면 병이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천수경 해설 3. 참회하는 이유
천수경의 후반부는 참회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에서는 계율을 어긴 죄와 탐진치로 인하여 악업을 쌓은 죄를 참회해야 한다고 말한다. 악업이란 무엇인가? 수행에 방해되는 모든 것이다. 신구의 삼업으로 짓는 업이다. 천수경에서는 독송하는 '내'가 관세음보살의 입장에서, 불보살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한다. 중생심으로 지은 모든 업을 참회하며 여래의 마음으로 수행하고 발원한다. 중생의 마음으로 수행하고 기도하는 것이 힘들 때, 천수경의 구조를 다시 한 번 헤아려보며 거꾸로 톺아보기를 권한다. 불보살이 되어, 한 발짝 떨어져 중생심을 지켜보기를 권한다.
천수경 해설 2. 천수경의 특징
천수경의 특징은 진언이 아주 많다는 점이다. 천수경의 중심이 되는 신묘장구대다라니 역시 문맥적 의미를 담고 있다기보다 말 자체로 진리와 수행의 힘을 담고 있는 진언이다. 진언은 후기 대승불교에서 꽃을 피운 밀교의 수행법이다.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진리를 자각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하며, 부처임을 자각한다는 것은 곧 공성을 깨닫는다는 의미이다. 부처님이 찾은 수행법은 위빠사나와 사마따였으나, 후기 대승불교는 인도의 전통수행법 중 하나인 진언을 받아들여 일반인들도 쉽게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진언은 삼매에 들어 연기실상의 세계를 바로 보기 위한 또 하나의 수행법인 것이다.
천수경 해설 1. 천수경의 구성
천수경은 예불을 하는 불자들이 가장 처음 접하는 경이자 자주 접하는 경이다. 천수경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이기에 이토록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일까?천수경은 신묘장구대다라니라고 하는 진언을 중심으로 앞 부분에서는 귀의하고 뒷부분에서는 참회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는 귀의하고 서원하는 종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 기대겠다는 다짐 없이는 진정으로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며, 죄의 자성없음을 무아이며 무상임을 깨닫지 않고는 진정으로 부처님의 법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축원문, 제대로 알고 있나요?
예불이나 불공 등의 의식에 빠지지 않는 것이 축원문이다. 축원문은 1) 삼보에 귀의하고 2) 발원자가 누구인지를 고하고 3) 축원의 내용을 말하고 4) 서원하는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귀의는 부처님이 깨달은 바 '무상'을 깨닫기 위하여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겠다는 다짐이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곧 수행하는 일이며, 그 수행의 공덕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해달라는 것이 개인축원이다.축원문은 삼귀의로 시작하여 사홍서원으로 마치는 불자들의 수행 과정과 같으며, 모든 축원에는 귀의와 수행이 전제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자경문 해설 10
자경문 해설의 마지막 편.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며 대중을 향한 마음을 늘 평등하게 하라는 9~10번째 구절을 설명한다. 앞서 해설해온 자경문의 10가지 경책의 말씀은 결국 본능을 다스리라는 것과 집착을 버리라는 것, 두 가지 이야기로 귀결된다. 사람 몸 받기 어려운 육도윤회의 세계에서 지금 이 순간 부단히 수행하라는 당부이다. 우리는 부처의 경지라는 것도, 도라는 것도 언젠가 다다라야 할 미래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나와 내 밖에 무언가 있다는 생각, 주체와 객체로 모든 것을 분멸하는 것이 중생의 자연스러운 습이다. 그러나 세상의 성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내 밖에 무언가에 한눈팔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에 대한 원칙을 바탕으로 충실히 살아가는 그 순간이 부처의 삶이자 도에 이르는 길이다.
자경문 해설 9
사랑과 정의 본질은 같다. 그 본질은 모두 애착이고 집착이다. 누군가 정스럽게 행동한다면 그 이유는 친밀감과 애착을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애착이 생기니까 상대방에게 친밀하고 다정하게, 정스럽게 대하는 것이다. 수행자란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사람이다. 마음속으로 인정에 끌리고 이성을 흠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머리를 깎아도 수행자가 아니고 도를 닦는 사람이 아니라 할 것이다. 정은 일견 자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인정을 자비심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인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집착이며, 집착을 이용해서 우리 안에 키우는 이기심이다.
자경문 해설 8
여색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랑은 흔히 3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서로에게 눈이 맞아 이끌리는 성욕의 상태이다. 두 번째는 자기만의 영역에 상대방이 들어와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거리낌이 없는 친밀함의 단계이다. 세 번째는 애착, 곧 집착의 단계이다.자경문에서는 사람에 대한 소유욕, 애착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재물과 여색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방법이 바로 팔정도 가운데 하나인 정념이다. 비록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마음가짐, 초지일관의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재물과 여색을 다스리는 길이다.
자경문 해설 7
식욕, 수면욕, 성욕의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다. 나 잘났다는 생각, 뽐내는 모습의 뿌리도 생존 욕망에 있다. 생존 욕망에 충실하여 본능적으로 살면 남을 업신여기고 내가 잘났다고 으스대게 된다. 아상에는 인정욕구가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다. 원시의 생존 양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아상을 키우는 삶을 살면 죽은 후에 삼악도에 떨어질 확률이 커진다. 도가 높을수록 더욱 경계해야 하는 것은 너와 나의 분별에 따른 아상이다. 언제나 마음을 겸손히 할 때 만복이 저절로 들어오며, 항상 자기 자신을 성찰할 때 아상에 빠지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자경문 해설 6
사바세계 중생들을 움직이는 힘은 욕망이다. 욕망에서 모든 행이 비롯된다. 욕망은 나쁜 것일까? 그릇된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욕망을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욕망에 반하는 고행 수행의 극단까지 체험했으나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욕망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욕망을 부정하는 것도, 욕망에 충실하는 것도 아니다.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도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매순간 깨어있어 나 자신을 살펴야 한다. 자경문에서는 본능적인 욕망을 다스리고 행동가지 하나하나를 성찰하는 지혜를 갖추기를 독려한다.
자경문 해설 5
불교에서는 선우(善友)를 사귀고 악우(惡友)를 멀리하라고 말한다. 좋은 도반이 없거든 차라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수행하라는 구절도 있다. 요즘은 처세술의 일환으로 이러한 말을 '손절'이나 '관계 끊기'의 근거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기실 이 말의 전제는 스스로가 충실한 수행자라는 데에 있다. 스스로를 수행자로 규정지어도 여러 현실의 여건상 타인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짓고 부러 가까이 하거나 부러 멀리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선우나 악인으로 분별하기에 앞서 스스로가 충실한 수행자인지를 살펴보고, 누군가를 분별하는 데에 나의 욕심이 개입되지는 않았는지 가려보아야 한다. 좋은 것을 가까이 하는 것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 수행에 전념하기 위함임을 명심해야 한다.
자경문 해설 4
삼악도 고통의 근본은 탐욕에 있다. 재물에 인색하지 말고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내 안의 탐심을 없애는 데에 제일 가는 수행은 보시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몸으로 봉사하거나, 재물로 보시하거나, 마음으로 뭇 중생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모두가 훌륭한 보시의 방법이다.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다고 말하지만, 기실 우리는 사는 동안 쌓아온 업의 과보를 지니고 떠난다. 보시하고, 수행하고, 말을 떠나 홀로 자신을 성찰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는 동안 쌓을 수 있는 선업이자 공덕에 다름 아니다.
자경문 해설 2
불교에서 법(法)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 번째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와 공의 진리이고, 두 번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연기의 진리이다. 연기법은 인연화합, 인과업보, 상의상관의 세 가지 특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법은 시간과 공간, 흥과 쇠의 분별이 없는 절대 진리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이러한 법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공안에 대한 믿음과 의심으로 끊임없이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겠다는 커다란 원을 세워야 한다.
자경문 해설 1
자경문은 불도에 입문한 자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만나고 외워야 하는 '스스로 경책하는 글'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주인공이 있듯이 우리 삶에도 우리 삶 전체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이 있다. 이 주인공은 번뇌에 끌려 다니는내가 아닌 열반을 증득하고 연기실상을 깨달은 나이다. 나의 본래면목이 부처님 법을 따르는, 그것을 지향하는 주인공임을 명심하는 것에서부터 자경문은 시작한다. 중생의 삶은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와 함께 하기게 괴로운 삶이다. 우리가 번뇌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에서 수행은 시작되며, 이를 알지 못하고 악업을 지으면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요원하다.
참선곡 해설 5
경허스님은 참선곡에서 수행의 중요성을 숱하게 강조한다. 수행하지 않는 삶, 무명에 둘러싸인 삶은 독한 술에 취한 채 사는 삶과도 같으며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의 삶과 다르지 않다. 마음을 닦지 않으면 조금이나마 지킨 계행과 조금이나마 쌓은 복덕 모두 허사가 되는 길이니, 참선곡을 책상에 붙여두고 항시 수행하여야 한다.한편 수행의 목표는 중생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내 가족의 행복, 나 개인의 양심적인 삶에서 현재의 코로나 위기가 닥쳤다. 궁극적으로 이 사회와 문명이 유지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수행하는 것이다. 참선하는 것이다.
참선곡 해설 4
참선곡 네 번째 파트는 경허스님이 다시금 전하는 당부로 이어진다. 경허스님은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참선곡 전체를 통하여 말하고 있다. 죽을 때의 고통은 사지가 쪼개지고 오장육부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말이다. 이렇게 극심한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참선을 하는 것이다. 참선을 해서 깨치는 것이다. 참선을 열심히 하면 나고 죽는 데에 얽매이지 않으며 살 때에도 번뇌나 고통에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부단하고 꾸준한 정진이 있어야 한다.
참선곡 해설 2
경허스님이 참선곡을 통해서 말하는 수행의 핵심은 나를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하고 듣고 웃고 울고 밥 먹고 옷 입는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지만 죽고 나서 움직일 수 없는 시체는 '나'가 아니며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도무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기에 내가 아니다.나를 알기 위해서는 의심해야 한다. 소리를 내고 소리를 듣는 놈이 무엇인지를 깊이 탐구해야 한다. 그렇게 탐구하다보면 한 생각이 만년 동안 이어지게 되며, 그렇게 탐구한 끝에 본래 내가 부처였음을 깨달으면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참선곡 해설 1
참선곡은 근현대 한국불교의 큰스님 경허스님이 참선수행을 권장하며 지은 노랫말이다. 경허스님은 우리 불교 간화선의 전통이 사그라지던 때에 쉬운 언어로써 참선수행의 방법과 이득을 일러주었다. 참선공부는 왜 해야 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꿈과 같기 때문이다. 삶이 무상하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부처님 공부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된 것이다. 경허스님은 부처가 되면 얻는 이득이로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상, 락, 아, 정의 네 가지 부처의 마음 경지에 이른다고 말한다.
행선축원 해설
새벽예불을 드릴 때 스님이 대표로 독송하는 '행선축원'은 '참선수행자가 올리는 축원'으로, 고려 말 선종의 기치를 드높인 스님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나옹스님은 행선축원문을 통하여 참선수행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수행의 목적을 개인의 깨달음에 두지 않고 모든 중생이 성불하는 것에 두어야 한다고 경책한다. 중생의 성불이 좌선하고 참선하는 목적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깨닫기를 바라는 원은 비단 참선수행자만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가자인 자신이 출가승려보다 못한 존재, 다른 존재라고 여기어 행선축원을 도외시 해서는 안 된다. 비록 아직은 미혹한 나 자신일지라도 지금 하는 이 수행이 모든 존재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야말로 참 수행자의 마음이다.
영가전에 8 (해제)
'영가전에'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부처님께 의지하여 삼독심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가지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락왕생을 하기 위해서는 탐진치 삼독심을 버리고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삼독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욕망하는가가 아닌 '무엇이' 욕망하는가를 바로 봐야 한다. 욕망하는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욕망이 강해지고, 집착이 되고, 소유하는 마음이 커지고, 종국에는 '내가 있다'는 생각이 더욱 견고해진다.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는 수행은 죽음을 통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다.
영가전에 7
불교에서는 중생들의 삶의 형태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태어나는 찰나 '생유', 임종하는 찰나 '사유', 태어나 죽기까지의 인생 '본유', 임종 후 다음 몸을 받기 전까지의 상태 '중유' 등이다. 이 중 태어나는 순간과 임종의 순간은 아주 중요한 순간으로 정의된다. 임종하는 찰나의 마음이 다음 생유의 마음에 결정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임종하는 순간에는 육신에 대한 애착, 가족에 대한 애착 없이 오로지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 마음으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상이며 이미지라는 일체유심조를 깨닫고, 여남은 애착마저 다 놓고 극락세계에 가서 좋은 몸을 받아 태어나시라는 당부로 '영가전에'는 마무리 된다.
영가전에 6
중생은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의 여섯 가지 세계를 오가며 육도윤회한다. 번뇌라는 이름의 미혹한 마음을 털어버리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뛰어넘어 극락으로 갈 수 있다. 그렇다면 가는 우리는 누구인가? '영가전에'에서는 물과 얼음을 예로 들어 우리의 삶을 설명한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는 것은 인간이 육신을 갖고 태어나는 것과 같고, 인연이 다해 얼음이 녹아 사라지는 것은 육신이 죽는 것과 같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이치에 왜 인간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가? 그런 마음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영가전에 5
이 생을 마치고 다음 생으로 갈 때 영가님의 발목을 잡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 윤회할 때 마음에 탐, 진, 치의 삼독심이 묻어있으면 다음 생도 삼독심으로 살아가게 된다. 불국정토란 곧 청정한 마음이다. 때문에 불국정토에 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된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은 탐진치 삼독을 버리는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 즉 치심에서 탐심과 진심이 생겨난다. 미혹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삿된 마음에서 벗어나야 하며, 삼독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반야지혜를 이루는 일이다.
영가전에 4
극락은 비행기나 차를 타고 이동해서 갈 수 있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다. 극락이란 번뇌망상이 없어져 무명업장을 벗어난 곳이다. 백중에 영가님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은 영가님이 삼독심을 버리고 무명업장을 벗어나기를 바라는 행위이다. 삼독심을 버리고 극락에 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무상임을 깨쳐야 한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생과 사, 생과 멸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주도함을 아는 것이다. 흔히 무상을 무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찰나찰나에 생하고 멸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이 몸을 떠나 다음 생을 받는 것 역시 생멸의 자연스러운 이치임을 이해한다면 떠나는 육신과 삶에 탐진치 하지 않고 극락에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영가전에 3
불교에서 말하는 '죄'는 탐진치 삼독이다. 내가 무엇인지 몰라서 집착하고 화를 낸다. 탐욕과 분노는 나를 제대로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무명으로 인한 악업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 모르고 지은 죄, 알고도 지은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죄의 실체가 본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알면 된다. 죄는 마음 따라 생겨날 뿐 그 자체로써 자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죄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한 후에는 참회를 해야 한다. 이해와 참회가 함께 갈 때 비로소 죄가 사라진다. 참회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수행과 참회는 같은 말이다.
영가전에 2
중생은 육신과 정신이 별개라는 것을 전제로로 하여 지수화풍으로 이뤄진 육신에 의지하여 한평생을 살아간다. 육신은 다만 인연에 따라 생기고 흩어질 뿐 영원한 것이 아니건만, 육신이 영원히 '나'일 것으로 착각하여 육신에 집착하게 된다. '육신=나'라는 생각은 내가 느끼는 외부의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은 다만 우리가 대상이라 생각한 것일 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이라는, 내 것이라는 집착과 소유욕을 알아차리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무상의 진리를 체득할 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보왕삼매론(2019)
인생은 욕계와 사바세계 사이에서의 줄타기이다. 욕계는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이며 사바세계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세상이다. 욕망이 시키는 대로 살면 이 세상에는 고통밖에 없지만 욕망을 잘 다스리면 세상은 자비로 가득 찬다.은 아주 평이하고 쉬운 경구이지만, 역으로 읽으면 사바세계의 현실이 오롯이 드러난다.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장애가 됨을 알고,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그 어떤 일도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임을 알자. 봉사하는 생활과 도덕적인 생활로 보살이 되는 길을 걷자.
오백 명 산적을 교화한 상낏짜 사미
법구경 110번째 게송, 500명의 도적을 교화시킨 쌍낏짜 사미의 이야기. 7살 난 어린 사미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기 그지 없다. 이는 성인인 수행자들보다 높은 경지의 바른 수행의 결과이다. 넓은 의미에서 수행자는 불교를 믿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좁은 의미로는 전업하여 수행자인 '프로 수행자'를 말할 것이다. 다만 성직자와 수행자는 별개의 의미이다. 좁고 넓은 수행자를 알아보며, 우리 자신은 어떤 수행자가 되어야 하는지 또한 수행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알아본다.
불교윤리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코로나19 교회 집단 감염 사건으로 보는 광신과 본능. 2020년 여름, 교회에서 코로나19 집단 감염 사태가 일어나 경각심을 일으켰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맹신'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교회는 인간의 본능에 내재되어 있는 '군집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놀거리가 있고 즐거움이 있고,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군집욕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에 강한 믿음의 대상으로 발전하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욕구와 본능을 다스릴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사람들과 어울려 있다보면 불필요한 번뇌가 생기므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리고 말씀하셨다. 자비심으로 본능을 다스릴 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부처님이라면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은 복으로 산다"고 말씀하실 것 같다. 선업의 과보로써 받는 복과 덕으로 인생을 살아가자. 올바른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오계(五戒) : 불망어(不妄語)
아함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말씀을 통, 해 이해하는 오계, 불망어."라훌라야,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의 출가수행이란 이와 같이 조금 남아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부처님은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과, 고의로 거짓말을 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과, 특히 부끄러워하지 않는 출가수행자를 경책했다. 출가수행자는 언제나 철저하게 계를 지켜야 하며, 불망어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재가자의 경우에는 엄격하게 불망어계를 지키기 어려운 현실이므로, 최소한 법회날이나 포살일만이라도 제대로 계를 지키고자 하는 스스로의 의지가 필요하다.
오계(五戒) : 불투도(不偸盜)
오계의 두 번째 항목, '불투도不偸盜'를 이해할 때 단순히 도둑질 하지 말라는 수준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주지 않은 남의 것을 가지지 말라는 말에는 '남의 것'과 '내 것'이라는 분별이 전제되는데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저 생각에 불과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기적인 관계에 있으므로 어떤 한 가지 것에도 모든 사람의 행위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단순히 남의 것이기에 탐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것에 기울인 노력이 얼마만큼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에 기울인 타인의 공을 부정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다. 불투도를 성숙하게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진다. 무주상부시는 연기의 도리를 아는 사람의 행동이다.
오계(五戒) 불살생(不殺生) 2
오계 중 첫 번째 계율인 '불살생'과 관련한 여러 사례와 생각할 거리.불교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에 대하여 죽음을 부추기거나 말로써 찬양하는 경우, 선동하는 경우는 불살생 계율에 준하여 엄격하게 금기한다. 그러나 중한 병에 걸려 자신과 주변인 모두가 고통받는 상황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는 경우, 그리고 깊은 삼매에 들어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그대로 열반에 이르는 경우에는 그것을 굳이 막지 않아도 된다. 불자의 육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면에서 순수한 고기를 섭취하는 것은 금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살생됨을 보지 않고, 그러한 사실을 듣지 않고, 그러했으리라고 의심할만한 정황이 전혀 없는 경우다. 수행자도 공양물을 선호의 대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대승불교적 견지에서 생활하되, 근본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오계(五戒) 불살생(不殺生) 1
오계 중 첫 번째인 불살생으로 우리 시대의 살인을 고찰하다. 살생 가운데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고 특별히 살인(殺人)이라 말한다. 살인은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문명, 문화권에서 금지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는 살인이나 전쟁 중의 살인, 자발적 안락사와 같이 판단을 고민하게 하는 상황에서도 일어난다. 어떠한 살인이라 하더라도 불교에서는 동기와 의도에 의해 판단한다. 동기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의도는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이다. 동기가 선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의도에 따라 업을 쌓으며 업의 과보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