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빈소를 차리자

장례식장에 조문을 다녀오면 느낀 삶과 죽음.
누군가 돌아가셔서 조문을 다녀오게 되는 일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조문은 관례화된 의식이다. 조의금을 준비하고 영정에 절을 하고 유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지인들과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돌아가신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은 고작 2~3분 남짓이다.
내가 고인의 입장이 되어 나의 빈소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나는 죽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유족들이나 조문객들에게도 더이상 나는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삶은 1인극 판토마임과 같아서, 타인은 나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짐작할 뿐, 나와 완벽하게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못한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과 배우의 관계가 끝나듯, 삶이 끝나면 세상과 타인에게서 나는 사라지고 그 관계 역시 끊어진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인 무아이다. 무명으로 가득 찬 아상을 털어내고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잘 사는 길이며, 잘 죽는 길이며, 불교를 제대로 실천하는 길이다.

길따라절따라 일본 답사기

2023년 3월 다녀온 길따라절따라 일본 답사기. 길따라절따라 일본 교토 탐방을 통해 11개 사찰을 돌아보며 일본불교와 우리불교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라 지역의 사찰들은 삼국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백제, 신라시대 사찰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불교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밀교적 측면이 두드러지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밀교에 등장하는 여러 불보살이나 화려한 장식들이 불상 배치에 드러나고 있다.
선종의 경우, 초기에는 참선을 하고 대중생활을 하는 전통이 유지되었지만 이후 사무라이 정신과 맞아 떨어지면서 기교적인 방식만 활성화되었고, 이는 다시 일본의 토속신앙인 신도와 결합하는 형태를 보인다.
불교의 한 부분만을 떼어 파편화하고 도구화하다 보면 불교의 중심인 ‘계정혜 삼학’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들의 신행이 어떠해야 할지, 현재 일본 불교의 모습을 보며 고민한다.

나를 위한 수행, 생전예수재

윤달에 한 번 돌아오는 생전예수재는 살아생전 공덕을 쌓는 나를 위한 수행이다.
생전예수재는 내가 죽었을 때 자식들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생전 내가 스스로 지어놓은 선업 공덕의 힘으로 중음계 시왕들에게 좋은 판결을 받아 더 좋은 다음 생을 받음으로써 깨달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생전예수재에서는 경전과 돈을 올린다. 경전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인 연기법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돈을 올리는 것은 세상 만물에게 빚진 것을 갚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전예수재는 지금 이 순간 미리 열심히 수행하는 의식이다. 수행의 끝과 시작은 육바라밀이다. 모든 수행의 결과는 보시해을 하는 것이며, 이렇게 스스로 수행하고 선업 공덕을 쌓는 것이 생전예수재의 핵심이다.

시장기 같은 외로움 (feat. 법정스님)

외로움과 고독은 우리의 오랜 친구와 같다. 외로움은 나의 소유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의 손아귀를 벗어났을 때 느끼는 상실감이자 빈자리이다. 소속감의 부재에서 오는 고독감이다.
법정스님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하며, 이를 통해 자기 정화를 할 수 있다”고 썼다. 외로움은 눈에도 귀에도 입에도 코에도 있다. 이러한 외로움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리하여 그 감정의 원천이 소유욕과 갈애라는 것을 깨닿고, 이것을 털어내는 연습일 해야만 진정한 홀로 있음, 고독을 누릴 수 있다.

여행을 통해 수행 하는 법 알아차리기

배낭 메고 혼자 다녀온 길따라절따라 일본 답사에서 길어 올리는 ‘여행을 통해 수행하는 법’.
여행은 관광과 다르다. 관광은 돈만 내면 모든 것이 알아서 세팅되는 일상의 연장선상이고, 여행은 낯선 환경에 자발적으로 놓여져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행위이다.
여행에서는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과 내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음을 경험한다. 낯선 말, 낯선 글자, 낯선 문화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어떤 정보가 들어와도 내면이 자극되지 않는다. 이렇게 내면이 외부와 분리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나 자신을 향하게 된다. 주변 환경에 내 마음이 끌려다니지 않는 것, 이것이 수행이다.
또한 여행은 일부러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해서 어려운 미션을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이다. 어려운 것을 풀어가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면밀하게 스스로를 살피게 된다. 여행이 수행과 맞닿아 있는 이유다.

사랑은 김치다

김치와 사랑에는 닮은 점이 있다. 첫째, 김치는 주재료인 배추에 각종 양념과 복잡한 레시피가 첨가되어 복합적인 맛을 낸다. 사랑도 집착과 소유욕 등 다양한 감정과 욕망으로 양념되어 있다.
둘째, 김치는 매운 맛이고 사랑은 집착 맛이다. 김치의 매운 맛이 고춧가루의 매운 맛이 아니라 김치 고유의 매운 맛이듯, 사랑의 대표적인 맛은 업그레이드 된 집착이다.
셋째, 김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어가듯 사랑도 시간과 공력을 들인 후에야 익어간다. 익다가 더 오랜 세월이 지나면 묵은지 같은 살아이 된다. 다른 양념 필요 없이 오직 배추 하나로 맛있는 맛을 내는.
어떻게 하면 잘 사랑할 수 있을까? 연기에 입각한 처세술로 사랑을 대해야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며 진인사대천명이다. 스쳐가는 많은 인연들을 정심으로 대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연기에 입각한 사랑이다.

연기법 대로 인생 사는 법 (feat. 도연명)

혼란스러운 시기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농사를 일구고 살았던 시인이 일러주는 처세술. 중국 동진 후기에서 남조 송대까지 살았던 전원시인 도연명의 ‘신석’에서 길어올리는 연기법대로 인생 사는 법.
인간은 날 때부터 제각각이지만 서로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나이로 지혜와 무명을 가늠할 수 없고 무언가에 중독된다 하여 세상의 시름에서 비켜갈 수 없다.
무주상보시라 하지만 내가 상을 내지 않는 것 보다는, 남들이 내게 관심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니 지나치게 생각하여 도리어 삶을 해치지 말고 마땅히 운명에 맡겨두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끝내야 할 곳에서 끝내버리고 다시는 혼자 깊이 생각 않는 것. 걱정도 적당히, 화도 적당히,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적당히 하고 끝낼 때 인생을 연기법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인연 따라 사는 방법 (feat. 법정스님)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 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
내 안에서 발견한 순수한 욕망을 어떻게 지혜롭게 다스릴 것인가?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알아보는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방법.
마음이 좋고 싫음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이 감정에 대해 분별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 그대로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기를 바라며 집착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지 말라’고 하니 마음이 괴롭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할뿐 아니라 서로의 의지함으로써 무언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할 뿐 자성은 없으니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즉 무명에서 벗어나야 연기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마음, 슬퍼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연기의 도리에 의해서 움직인다. 때문에 변하지 말라고 집착할 일이 아니라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지혜롭게 마음을 다스리는 길이다.

마음먹은 대로 사는 방법(feat. 유재석)

“그러던 어는 날 내 맘에 찾아온 작지만 놀라운 깨달음이 내일 뭘 할지 내일 뭘 할지 꿈꾸게 했지.”
유재석, 이적의 ‘말하는 대로’를 놓고 생각하는 마음먹은 대로 사는 방법.
많은 젊은이들이 불안으로 고통스러워 한다. 미래를 알 수 없어 불안하고, 불안하니까 고톱스럽고, 고통스러우니 자포자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일상의 작은 깨달음을 계기로 삶을 달리 꾸리기도 한다. ‘내가 미친듯이 매달리지 않았구나’라는 작은 깨달음으로도 희망과 믿음을 불러올 수 있다.
인간은 욕망함으로써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러나 그 욕망이 나의 마음이 원하는 순수한 욕망인지, 주변에서 말하고 권하는 남의 욕망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더욱이 삶과 세상의 법칙 즉 진리에 순응하지 않는 욕망은 일궈내기가 굉장히 어렵다.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해서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내며, 그 모든 것은 연기하고 있으므로 변화한다는 것. 연기의 법칙을 알고 그 위에서 욕망을 풀어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욕망이며 실현 가능한 욕망이다.

광주는 극락이다

지금은 없지만 광주에는 조선시대 세종대왕 시절 지어진 인공 저수지 ‘경양방죽’이 있었다. 당시 광주 목사 김방은 경양방죽을 만들던 중 발견한 개미굴을 무등산으로 옮겨주었고, 개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경양방죽을 완공할 수 있었다.
또한 개미들의 힘으로 세종대왕이 현몽을 꾸고, 그 덕으로 목숨을 구한 김방 목사는 무등산 증심사에 오백전을 건립할 것을 염원한다.
무등산 증심사와 오백전과 경양방죽은 빛고을 광주 자체가 아미타 부처님이 상주하는 극락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땅을 극락으로 여기고 극락으로 만들었던 백성들의 굳건한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