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와 템플스테이

일상에서 접하는 요가는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 건강 관리와 힐링을 위한 도구로써 널리 알려져 있다. 요가는 대중화되고 상품화된 가장 대표적인 인도문화의 하나이다.
원래 인도에서 요가는 신과 합일하기 위한 수행을 일컫는 것으로, 8단계 중 3번째 수행단계인 ‘아사나(행법)’가 ‘요가’ 전체를 대표하는 상품이 되어 전세계에 퍼져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인 템플스테이도 본래 객승이나 기도하러 온 신도들에게 방을 내어주던 것이 상품화된 것이다. 요가와 템플스테이는 문화가 상품으로 탈바꿈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불자라고 한다면 단지 불교문화를 소비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의 교리가 내 삶에 녹아들 때만이 진정한 불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정치인의 자격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즈음하여 불교적으로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인의 자격.
정치인을 판단하는 두 가지 중요한 덕목은 정직과 헌신이다. 정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양설을 하거나 기만하는 말도 거짓말의 일종이다.
헌신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비심이 넘친다는 것은 도둑질 하지 않는 것이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정직과 헌신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 가지 계율의 현대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정직과 헌신은 불자들의 삶의 자세이자 공직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를 가질 때에만 올바른 정치인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올바른 정치인을 가려낼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코로나19로 인류의 사회활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멈춘 세상에서 자연은 스스로 자정하며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필연적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고 효율에서 위기대응으로 전환하는 것은 소극적인 대처법이다. 일상생활, 생활 습관, 인류문화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고통의 완전한 종식에서 온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에서 코로나19 이후 우리 삶의 태도를 길어올려보자.

공인의 덕목

공인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자, 양도받은 권력을 대신 사용하는 사람이다. 양도받은 권력만큼 공인에게는 큰 권력이 있으며, 발언 하나 행동 하나에 커더란 파급력이 따른다.
공인과 수행자의 공통점은 언제나 자기성찰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시민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며, 자신은 단지 시민들의 대리인에 불과함을 잊지 말고 자기 성찰을 해만 양도 받은 권력을 올바로 쓸 수 있다.

코로나19를 대하는 불자의 자세

사회를 지탱하는 서로간의 신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깨지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사회를 병들게 한 모습의 일례이다.
코로나19 대응은 의료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제 시스템을 복구하는 것, 우리 생활속에 깊이 스며든 문화를 바꾸는 것, 또한 정부의 지침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모두가 우리 사회를 자정하려는 노력이다.
불자로서는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를 수행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모습을 직시하고,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더욱 불자답게 사는 것이 코로나19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길이다.

공동체주의, 개인주의

공동체주의는 좋은 것인가?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주의는 회복해야 할 정신적인 가치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견 공동체는 ‘폐쇄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집단주의로 변질될 소지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불교의 자비는 뜨거운 사랑이라기보다 차가운 배려에 가깝다. 나라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이 중요한 만큼 타인 역시 한 사람의 주체적 개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주창하는 공동체정신이 개인의 주체성을 말살시키지는 않는지, 개개인의 경험에 빗대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관용

2019년 8월, 일본 ‘표현의 부자유전’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헤프닝과 영화 ‘나랏말싸미’ 역사왜곡 논란으로 돌아보는 우리 사회의 관용 정신.
관용은 존중이다. 나와 당신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이야기의 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일본 우익들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사태와 일부 타종교인들의 ‘나랏말싸미’ 배급 중단 요청 등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기에 발생한 일이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일조한다.
관용의 정신이 바로서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이 다른 타인과 토론을 통해 자기 주장을 정당하게 펼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해본적 없엇 낯설고, 마음 편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본의 경제 침탈, 그 본질과 대응

2019년 8월, 일본의 아베 정권은 한국과의 경제적 협업을 반려하겠다는 의미의 ‘화이트 리스트 제외’를 공표했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일본의 경제 도발에 대응하고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도 소련을 견제해야만 하는 미국의 묵인 아래 일본의 국가주의, 제국주의는 청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쟁을 일으킨 각료들이 여전히 일본의 정치를 주름잡고 있다.
아시아를 제멋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과거의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일본 극우세력의 득세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또 국민은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가?

우리시대의 영웅

묻지마 살인, 총기난사… 국가가 방치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는 다양한 사건, 사고는 오로지 국가의 책임 방기 때문인가?
‘나는 힘이 없고 선량한 시민일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개인들은 힘이 막강하면서도 이타적인 영웅을 원한다.
영화의 주인공 같은 영웅도, 경전 속 불보살도 없는 현실에서 대안은 무엇일까? 공동체의 회복이다. 자율적인 소규모 마을공동체의 복원만이 책임 있는 개인을 만들고 이타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