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생을 돌아본다든가 삶의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할 때는 뭔가 심오하고 고상하고 멋있는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처님 말씀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내용들이 곧 삶에 대한 성찰과 맞닿아있습니다. 오늘은 삶이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인생에 대한 성찰을 어떻게 말씀하셨나 하는 것을 두 개의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겠습니다.
쌍윳다니까야 <뱀의 독> 이야기
먼저 아함경 쌍윳다니까야에 보면 <뱀의 독>이라는 품이 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네 마리의 독사가 우리를 쫓아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네 마리 독사가 쫓아와서 도망가는 와중에 다섯 명의 살인자가 또 나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나와 가까운 친구가 나를 죽이려고 쫓아옵니다.
네 마리의 독사와 다섯 명의 살인자와 한 명의 친구가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와중에 도망가다 보니 한 마을이 있고 마을은 텅 비어있습니다. 몸을 숨기기 위해 마을에 들어서니 여섯 무리의 도적들이 나를 쫓아옵니다. 이들을 피해 도망가다 보니 큰물이 흐르고 그 건너에 몸을 피할 수 있는 언덕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나무와 풀을 모아 뗏목을 만들고 두 손과 두 발로 노를 저어 건너편 언덕으로 가야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마치고 각각의 비유를 풀어서 설명하십니다.
지수화풍이 모인 육신은 언젠가 흩어진다
네 마리의 독사는 지수화풍의 사대(四大)입니다. 사대라고 하는 것은 나의 육신을 말합니다. 내 몸뚱이는 지수화풍의 네 가지 성질이 일시적으로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대를 독사에 비유했을까요.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 보고 싶은데 눈이 뿌예서 잘 안 보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싶은데 무릎이 시원찮고, 잠을 잘 자고 싶은데 한 시간마다 소변이 마려워서 깹니다.
네 마리 독사 중 한 마리만이라도 성질을 부리면 내가 고통을 받고 심하면 죽음에 이릅니다. 결국 사대는 언젠가는 흩어진다, 몸뚱이는 잠시 모여 있는 것이고 언젠가는 흩어진다는 비유를 든 겁니다.
‘나’는 오온의 총체
다섯 명의 살인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온입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로 이뤄졌습니다. 여기에서 온(蘊)이라는 것은 쌓여있다, 모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온은 실제로 내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 속의 무언가를 말합니다. 색온은 내 앞에 뭔가(장미)가 있다는 느낌입니다. 수온은 장미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마음이고, 상온은 이 장미를 저 장미와 비교해서 만들어내는 이미지입니다. 행온은 아름다운 장미를 꺾고자 하는 의도이며, 식온은 저기에 장미가 있고 저것을 장미라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것이 나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는 내 마음을 말합니다. 오온이 모여 있는 것, 오온의 총체는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느끼는 ‘나’라는 것입니다. 오온을 살인자로 비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계속 보고 싶고 자꾸 빠져듭니다. TV 프로그램이 내 안의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자극하여 계속 마음을 독차지합니다. 마음은 그 프로그램에 눈이 멀어버립니다. 그러면 결국 이런 것들이 나를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살인자로 비유한 것입니다.
욕망과 쾌락 사이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는 무엇일까요. 쾌락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탐욕과 욕망, 쾌락과 욕망은 구별해야 합니다. 욕망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에너지입니다. 먹고 싶다는 욕망, 자고 싶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습니다.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욕이 없다면 인간은 멸종합니다. 이러한 욕망과 쾌락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쾌락은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한 것입니다.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 쾌락입니다. 지근거리에 있다가 조금이라도 선을 넘어가면 욕망이 쾌락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쾌락을 가장 가까운 친구로 비유했습니다.
내 안과 밖의 도적, 12처
텅 빈 마을과 그곳에 만난 여섯 명의 도적은 6내입처와 6외입처 즉 12처를 말합니다. 저기 뭔가가 보인다고 할 때 보이는 뭔가가 있고 보는 뭔가가 있습니다. 보이는 뭔가는 6외입처 중 색에 해당하고, 보는 무언가는 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봅시다. 보니까 눈이라고 말하면 맞는 말이지만 눈이니까 본다고 말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시체도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지 않습니까. 본다는 행위가 중요한 거지 무엇이 보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보는 행위가 주로 이뤄지는 장소가 주로 눈에서 이뤄지니까 우리는 착각하고는 합니다. 눈이 보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보는 것이 눈입니다.
여기에서 텅 빈 마을은 내 안에 있는 보는 무언가, 듣는 무언가, 냄새 맡는 무언가, 소리를 듣는 무언가, 느끼는 무언가, 지난 기억들을 되새겨서 생각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 즉 6내입처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여섯 무리의 도적들이 쳐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저기 뭔가 보이는 게 있다는 생각, 들리는 무언가가 마치 내 밖에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무언가를 말합니다. 육외입처, 밖에서 쳐들어오는 도적입니다. 내 안에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6내입처와 밖에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되는 6외입처가 합쳐져서 텅 빈 마을의 도적떼가 되고 그것이 나를 피폐하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을 계속 하고 싶고, 아름다운 이성과 계속 함께 하고 싶고, 도박의 스릴을 계속 느끼고 싶습니다. 그 결과 자기 욕망과 집착을 다스리지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를 텅 빈 마을과 마을을 약탈하는 도적으로 비유했습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뗏목, 팔정도
이런 마을에서 도망치다보니 큰물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내가 도망쳐온 세계는 오온이 나라고 생각하는 세계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가 바로 이 언덕이고, 물 건너의 저 언덕은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는 깨달음의 언덕입니다.
그 사이에 커다란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건너가려면 뗏목을 만들어서 노를 저어 가야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뗏목은 바로 팔정도입니다. 정견, 정사, 정법, 정업, 정명, 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쉽게 말하면 행주좌와 어묵동정입니다. 먹고 자고 말하고 쓰고 느끼고 생각하고 걷는 모든 삶이 팔정도입니다.
올바른 견해를 갖고, 생각을 올바르게 하고, 말을 올바르게 하고, 업을 올바로 짓고, 올바른 생계활동을 하고, 올바르게 꾸준히 물러섬이 없이 노력하고, 위빠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을 항상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열거한 여섯 가지의 올바른 생활이 있은 후에 지관, 즉 마지막 두 부분의 위빠사나와 사마타 수행은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런 수행 없이는 깨달음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위빠사나와 사미타 수행을 지관수행이라고 합니다. 위빠사나가 관(觀), 사마타가 지(知)를 말하는데, 염불을 열심히 하고 절을 열심히 하는 것도 지관수행입니다. 이런 수행을 통해서 삼매에 들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뗏목이라는 것은 팔정도를 의미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관수행을 올바로 하려면 먼저 여섯 가지 올바른 행위를 갖춰야 합니다.
열심히 뗏목을 만들었다 해도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뗏목을 가만히 두면 흐르는 물에 쓸려 내려가 버립니다. 열심히 두 손 두 발로 노를 저어서 가야 합니다.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이 노력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갖춰져야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잘못된 생각에 내가 쫓기다가 팔정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세계로 가는 것이 부처님이 말한 인생에 대한 올바른 성찰입니다.
백유경 <거울 속의 한 사람> 이야기
한 가지 경전의 비유를 더 들겠습니다. 백유경의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아견에 집착하여 보물상자를 버린 ‘거울 속의 한 사람’입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아주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빚쟁이에 쫓기다 못해 야반도주를 하는 와중에 첫 눈에도 귀해 보이는 보물상자를 발견합니다. 뚜껑을 열자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있는데 뚜껑 안쪽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보물상자를 버리고 도망가고 맙니다. 뚜껑 안에 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거울속에 비친 그 자신이었습니다.
아공(我空) 법공(法空) 양구공(兩俱空)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전생에 지은 좋은 업이 많지 않아서 사는 게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실재하는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여 금은보화를 팽개치고 도망갔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거울에 비친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았다면 금은보화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삶을 자세히 보면 두 명의 내가 나옵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내가 있고, 그것을 보고 있는 육신의 덩어리가 있습니다.
거울을 보는 나와 거울 속의 나
흔히 불교에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무아입니다. 무아는 거울에 비친 나를 말하는 것입니까, 실제 육신을 가지고 있는 나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아닙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거울에 빛이 반사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내가 아니라 거울입니다. 부처님이 거울에는 너라고 할 만한 게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무아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울을 보고 있는 이 무언가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아까 이야기 했지만, 뭔가 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실제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생각입니다.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무엇인지 모르는데, 이것을 시계라고 생각하고 마이크라고 생각하고 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시계가 아닙니다. 플라스틱과 잉크와 나사가 들어 있는 무엇입니다. 더 작게는 원자, 전자, 양성자이고 전자와 전자 사이의 암흑물질이 있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것을 시계라고 하는 것은 잘 못 된 것입니다. 다만 내가 시계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거울에 비친 것이 내가 아니라 거울일 뿐이라고 깨닫는 것이 무아를 깨닫는 것이고. 거울을 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색수상행식으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이 공하되 마음이 만들 뿐
이걸 다시 말하면 일체유심조라고 합니다. 실제 무언가가 아니고 내 마음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일체입니다. 그래서 일체는 오직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일체유심조를 사람들이 잘 못 생각하기를 ‘뭐든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내가 마음먹는다고 여기에 있던 무등산이 저기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유심조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무엇이 존재하는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를 법공이라고 합니다.
거울 속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 아공, 모든 존재는 공하다는 것이 법공입니다. 아공과 법공 모두 공하다는 것을 양구공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올바로 알고 성찰하는 것이 인생을 올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알아본 두 가지 게송의 이야기는 사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앞서 쌍윳따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소상하게, 인도사람답게 비유를 들어주셨고, 백유경에서는 문학적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인생, 아공과 법공의 지혜로 성찰해야
인생을 불교적으로 어떻게 성찰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오온과 사대와 아공과 법공 등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치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막상 인생 살기가 힘들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도대체 사는 게 뭐지?’,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거지?’….
다른 게 아닙니다. 아공과 법공의 지혜를 제대로 아는 게 인생을 올바르게 성찰하는 것입니다. 아공 법공의 지혜와 일상생활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힘들고 괴롭고 슬프고 화나는 일들을 별개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불교의 교리와 삶에 대한 회의를 왜 별개로 생각하게 됩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순한 지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식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지혜입니다. 불교를 지식으로 생각하면 삶에서 힘든 일에 부딪쳤을 때 불교의 가르침이 인생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절에서 공부하는 부처님 말씀들은 어떻게 보면 재미없고 따분한 이야기들의 반복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을 내 인생에 비추어서 생각하는 마음의 훈련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님 말씀이 여러분 인생의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끝으로 백유경 서른다섯 번째 비유에 붙은 취미대사의 게송을 읊어보겠습니다.
山非招我住 我亦不知山 (산비초아주 아역불지산)
山亦相忘處 方爲別有閑 (산역상망처 방위별유한)산이 나를 불러 머문 것이 아니고
나 또한 산을 잘 알지 못했도다
산도 나도 서로 잊는 곳이 되어야
그제야 특별한 한가함이 있으리라– 취미대사, 산거
하나는 아공이고 하나는 법공입니다. 어떤 게 아공이고 어떤 게 법공인지는 여러분이 잘 생각해보십시오. 아공과 법공을 지혜로서 체득하면 비로소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