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의 의미

동지가 되면 절의 구성원들과 불자들이 모여 새알빚기 울력을 한다. 사심 없이 함께 모여서 즐겁게 일하는 것은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자 나도 모르게 공덕을 쌓는 일이다.
동지는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없었던 한국의 세시풍속이다. 그러나 사찰은 동지 새알빚기 등의 공동체 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돈이 곧 신이 된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봉사와 보시의 장을 제공해야 하며, 우리는 근본적인 종교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절에 나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공동체, 봉사, 사랑, 종교, 행복

동지 새알울력과 공덕

오늘 동짓날을 맞이하면서 어제는 신도분들과 함께 새알 울력을 했습니다. 약 마흔 분 정도 모여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즐겁게 울력을 하는 모습을 보자니 저도 덩달아 기분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보살님들은 어떤 마음으로 동지 울력에 소매를 걷어붙였습니까? 인형 눈 붙이는 아르바이트처럼 돈을 벌기 위해 새알을 빚은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팀별로 경쟁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동지니까 새알을 빚어서 오가는 신도분들에게 보시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더 솔직히 이야기 하면 뚜렷한 목적 없이, 사심 없이 그냥 함께 모여서 일하기 위해 걸음 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선업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선업을 짓는다는 것, 좋은 행위를 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그 일에 임하면 그것이 나에게 좋은 과보로 쌓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덕을 쌓는다고 할 때 힘들고 짜증나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인상 쓰면서 한다면 그것이 공덕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공덕은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저장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복을 지어야 좋은 과보가 되어 언젠가는 내게 돌아옵니다.

부처님 당시 문화 아니지만 공덕을 쌓는 일

기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 동지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동지는 북동아시아와 우리나라의 문화이지 인도의 문화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동지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경전에도 동지와 관련된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의 사찰에서는 동지를 챙기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동체가 사심 없이 모여서 즐겁게 울력하는 그 자체가 선업을 짓는 것이며 공덕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더라도 좋은 복을 짓는 일이기에 권유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몇 십 명의 사람들이 웃으면서 새알을 만드는 곳이 이 도심 어디에 있겠습니까? 요즘 같은 시대에 동지팥죽이 먹고 싶다면 배달시켜서 먹으면 그만이지 팥죽 먹자고 새알 빚는 풍경은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어제의 새알 울력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크나큰 행복의 경험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찰, 봉사와 보시의 장을 제공하다

우리가 새알 울력을 한 것은 요즘 말로 봉사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보시입니다. 사찰이 신도들에게 봉사의 장을 제공할뿐더러 이렇게 만든 팥죽을 지역사회와 함께 나눕니다. 이런 것들이 사찰이 사회에 기여하는 순기능입니다. 이처럼 사찰은 봉사의 장과 함께 하는 행복의 장을 마련하면서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지만 실제 사찰과 교회, 성당과 같은 기존 종교는 갈수록 쇠퇴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통계 수치가 이를 증명합니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동안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수는 10% 정도 증가했습니다. 2015년 기준으로 무종교인 수가 우리나라 인구의 과반을 넘습니다. 종교가 없는 무종교인이 56%, 불교가 약 17%, 카톨릭을 합친 기독교가 30%를 조금 상회합니다. 대도시는 더 심각합니다. 무종교자가 60%, 불교는 10% 정도입니다.

광주 인구가 150만 명이라고 할 때 그 중 불자라고 하는 10%는 15만 명인데, 그들이 다 절에 나가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불자 중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절에 간다는 사람은 6%에 불과합니다. 광주 인구에 대비하면 8천 명 정도 됩니다만 실제 초파일 행사에 최대 많이 모여도 3천 명 남짓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기성 종교를 믿는 사람이 줄어드는 와중에 불자의 경우에는 ‘나홀로 불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말입니다.

다른 각도로 보겠습니다. 불자는 줄어든다고 하는데 몇 년 전부터 참선수행이나 명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수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명상이라는 콘텐츠가 돈이 되고 비즈니스가 됩니다. 엄청난 규모의 신천지 교회가 교세를 확장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찮습니다. 무종교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신흥종교나 사이비종교는 사라지지 않고 활개를 칩니다. 점이나 굿이라고 하는 민간신앙 역시 아직까지도 우리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돈이 신(神)인 세상에서 종교는?

예전에는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신이고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돈이 신입니다.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 라는 말이 덕담입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전제가 아주 당연하고 돈이 많은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지극히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서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속으로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행복의 많은 부분은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대하던 내 집을 마련했다고 하면 행복합니다. 마음에 든 옷을 벼르고 벼르다 샀다면 행복합니다. 돈을 조금 더 주고 맛있는데다 비싼 음식을 먹으면 행복합니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하는 말은 그저 말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요즘은 돈을 신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돈이 하나의 신이 되어가는 와중에 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적 갈증에 허덕이고 있을까요?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왜 여러분은 종교를 찾습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종교는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인 물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 실존적 물음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일까? 사람은 왜 죽을까?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종교의 근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표현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말미암아 안정감이 위협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든 내 삶에 안정감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돈이 신이 된 이유는 은행에 돈이 많아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통장에 땡전 한 푼 없어야 마음이 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통장에 돈이 많아야 미래가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돈은 근시안적인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옵니다. 때문에 종교는 내세를 강조합니다. 신을 믿으면 천당에 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죽어서 극락 가라는 이야기보다 죽음을 직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면 티벳불교의 경우 죽음에 대해서 깊이 명상하라고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이 아닌 나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그것을 명상 주제로 삼으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이 출가한 이유도 다른 게 아닙니다. 부처님이 왕자로써 편안하게 살다가 세상 밖으로 나가보니 병든 자도 있고 늙은 자도 있고 그러다가 죽은 자도 있는 겁니다. ‘아! 나도 병들고 늙어서 죽겠구나. 어떻게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그 답을 구하려고 출가했습니다.

두려워하기보다 직면하면 행복하다

부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불로초를 찾은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답은 무아의 진리였습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전에 무엇이 죽는가를 잘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사실은 죽음도 없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난 영원한 해탈을 증득한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죽음을 직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으로 항상 전전긍긍합니다. 어떻게든 삶의 안정감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종교를 찾고 돈을 많이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죽음을 직면하라고 합니다. 수행을 해서 죽음을 직면하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나도 얻고자 노력할 때 그런 노력들은 마치 은행에 차곡차곡 저금이 쌓이듯 내 마음 깊은 곳에 저장됩니다. 다시 말해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공을 들이는 일입니다. 공을 들여서 열심히 행위하는 것이 수행이 됩니다. 공덕이 쌓이면 내 안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지금의 삶이 행복해집니다.

사심 없이 모여 즐겁게 일하면 행복하다

또 하나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어제 여러분이 경험한 것입니다. 새알 울력처럼 어떤 의도나 사심 없이 함께 모여서 즐겁게 일하는 것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행복한 일입니다. 인간은 여러분들도 잘 알듯이 태생적으로 무리지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은 돈만 있으면 뭐든지 혼자서 다 할 수 있으며 실제 돈으로 ‘많은’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돈으로 ‘모든’ 행복을 다 살수는 없습니다. 돈은 굳이 말하자면 목이 마를 때 마시는 설탕물과 같습니다. 목이 마를 때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먹는 순간에는 시원하지만 조금 지나면 갈증이 더 심해집니다. 돈은 마치 종교적 갈증에 대한 설탕물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설탕물이 아니라 시원한 냉수를 마셔야 합니다. 종교적 갈증을 해갈할 시원한 냉수는 사심 없이, 함께 보여서 즐겁게 일하는 행위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여러분은 절에 와서 가만히 앉아 법문을 듣는 것보다 기왕이면 뭐라도 함께, 뭐라도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법문을 듣는 것보다 열 배 백 배 더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기존 종교가 아무리 쇠퇴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가지는 종교적 갈증은 변함없이 여전히 우리들 속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을 벗어나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둘째, 행복을 돈으로 살 수도 있지만 사심 없이 함께 무언가를 할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절에 나오셔서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뭔가를 하는 경험들을 많이 쌓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공덕을 쌓는 일이고 그것이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법문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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