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이 유학을 포기한 이유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기로 한 이유는 ‘원효대사 해골물’이라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에서 기인했다.
깜깜한 밤에 마신 감로수가 알고 보니 해골물이었다는 데에서 착안한 일체유심조. 흔히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표현하는 일체유심조의 참 뜻은 “세상은 마음이라는 화가가 그리는 그림과 같다”는 화엄경의 진리와 같은 것이다.
원효스님이 깨달은 것은 중생들이 칠흑같은 무명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고, 무명에서 벗어나면 실상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그린 그림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 곧 실상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며,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화두이다.
욕망에 마음을 뺏겨 마음이 그린 대로 세상을 보지 말고, 실상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해야만 일상 속에서 진리를 찾아갈 수 있다.

#나는누구인가, 마음, 무아, 알아차림, 원효스님, 호접몽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스님

원효스님이 의상대사와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의상대사는 중국으로 가고 원효스님은 중간에 되돌아온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일명 ‘원효대사 해골물’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원효스님이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은 바가 있어 중국으로 가지 않고 신라로 되돌아온 일이지요. 

그때 당시 원효스님과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것은 지금처럼 유학비를 마련해서 비행기 타고 가면 되는 단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적국이었던 백제의 땅을 지나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는 지난한 일이었습니다. 의상대사 역시 수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당나라로 넘어갈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아주 어려운 일이었고요. 요즘으로 치면 하버드대학 전액 장학금에다 용돈까지 주는 정도의 유학길이었는데, 원효스님은 그걸 포기한 겁니다. 

원효대사 해골물

도대체 어떤 일 때문에 원효스님이 그 대단한 유학을 중도에 그만하기로 선택했을까요? 함께 유학길에 나선 두 스님은 칠흑 같은 밤에, 길은 어둡고 더 갈 수가 없어서 더듬거리다 동굴을 발견해 하룻밤을 묵기로 합니다. 새벽녘에 원효스님이 목이 말라 잠에서 깹니다. 물을 찾아 주변을 더듬거리다 보니 그릇이 손에 잡힙니다. 마침 안에는 물까지 담겨 있는 겁니다. 그 물을 들이키자 참 시원하고 달콤하여 감로수가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두 사람이 잠을 잔 곳은 무덤 안이었습니다. 지난 밤 원효스님이 들이킨 물은 해골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고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원효스님이 헛구역질을 하다가 문득 깨친 바가 있어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렇게 돌아온 후에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큰스님으로 추앙 받게 된 분이 원효스님입니다. 원효스님의  저서 <금강삼매경소>는 중국에서도 큰 인정을 받았고요. 그 책은 현대의 불교학자들이 보기에도 상당히 어려운 책입니다. 

일체유심조에 대한 오해와 진실 

여기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이런 부분입니다. ‘어젯밤 어두울 때 먹은 물은 그토록 달고 맛있었는데 해가 뜨고 사실을 알고 나니 토악질이 날 정도로 역겨운 물이었구나. 세상 일이 생각하기 나름이구나.[일체유심조]’ 이것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원효스님 스토리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1,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원효스님에게 물어본다면 “그렇다” 할까요? 우화에는 가벼운 이야기 속에 무거운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무거운 뜻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원효스님의 이야기를 다시 되짚어봅시다. 

원효스님 이야기에는 두 가지 극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한밤중에 목이 말라 감로수를 맛있게 마시는 순간입니다. 두 번째는 환한 대낮에 어제 마신 감로수가 해골물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입니다. 

만약 원효스님이 훤한 대낮에 길을 가다가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다면 무덤에 들어가서 쉬었으까요? 아니었을 겁니다. 굳이 무덤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세상은 깜깜해 보이지 않고 무언가 몸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가 있으니까 들어갔을 뿐입니다. 또 하나, 원효스님이 대낮에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르다고 해서 해골에 담겨있는 물을 마셨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해골물인지 몰랐으니까 맛있게 마셨던 겁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의 핵심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는 겁니다. 안 보이는 것은 무지(無知)입니다. 깜깜한 상태에서는 무지하니까, 모르니까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원효스님이라도 안 보이는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첫 번째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원효스님이 무지한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또한 목이 마르지 않았으면 물을 마실 일도 없었을 겁니다. 무언가를 마시고 싶다는 것은 욕망입니다. 욕구, 갈망입니다. 모든 욕망은 갈애, 갈증, 목마름, 결핍에서 나옵니다. 목마르다는 표현은 욕망이나 갈애를 상징합니다. 결핍되어 있는데 고통스럽지 않다면 욕망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괴롭지 않은데 욕망을 일으킬 이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욕망의 배후에는 반드시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이 없으면 욕망도 없습니다. 괴로우니까 물이 마시고 싶고 그래서 판단력이 흐려진 겁니다. 그 순간에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것이나 마신 것입니다. 욕망이 채워지니까 기분이 좋죠. 쾌락이죠. 

쾌락은 욕망에 대한 보상입니다. 보상이 없으면 굳이 욕망을 내서 무언가를 성취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게 없는데 뭘 합니까. 고대로부터 인간들이 눈만 뜨면 사랑 타령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거기에 따르는 쾌락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몇 천 년을 해도 질리지가 않는 것이 사랑 타령입니다. 

원효스님이 깨달은 것, 무명

두 번째 포인트는 이런 겁니다. 고통스러우니까 욕망한 것입니다. 목말라 괴롭지 않았다면 해골물도 마시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중생들은 모든 것이 잘 보이고 잘 들리고 침착하게 판단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마치 원효스님이 한밤중에 해골물을 마셨던 상황, 칠흑 같이 어두운 세상속에서 고통스러워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고 가지고 싶어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나는 분명히 환한 대낮에 있고, 나는 부러운 것도 별로 없고, 괴로운 것도 별로 없는데 스님 하는 말은 잘못된 것 같다. 아닙니다. 우리가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지한 상태, 깜깜한 상태, 고통의 상태, 결핍의 상태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욕망하지 않으면 욕계의 중생은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면 굶어 죽지 않습니까. 

원효스님이 다음 날 아침에 깨달은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이 무지와 고통, 번뇌 속에 있을 때는 그 속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오늘 아침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보니 어젯밤은 무지와 고통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원효스님이 그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중생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칠흑 같이 어두운 세상 속에 살고 있구나. 행복하다고 웃고 살고 있는데 고통 속에 있구나.

원효스님은 그 지점에서 당나라 유학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더 깊이 파헤쳐서 중생들과 나누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본인이 깨달은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점검하여 중생들과 나누고자 유학길에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칠흑 같은 밤이고 목이 몹시 말랐다는 것, 옆에 물이 놓여있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굳이 감로수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말 달고 맛있는 물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뭘까요? 우리 인간은 왜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볼까요? 

마음이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착각

원효스님 이야기의 교훈인 일체유심조를 자칫 착각합니다. 세상사는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것. 예를 들어 지금 배가 고픈데 내 앞에 마이크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배가 고프니 ‘마이크가 맛있는 식빵이다’라고 생각하면 마이크가 식빵으로 변합니까? 원효스님이 깨달은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도 마이크를 식빵으로 변하게 하는 신통을 부릴 수 없습니다.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일체유심조란 무엇인가? 

제가 얼마 전에 꿈을 꿨습니다. 꿈속에서 생체실험을 하는 연구소에 잡혀 있었습니다. 수술복 원피스만 하나 걸치고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데 밖에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 소리의 주인공들이 수술실 안으로 들어오면 생체실험을 당해서 죽을 처지에 놓여 있는 겁니다. 몸을 웅크리고 불안에 벌벌 떨다가 문득 눈을 뜨니 꿈이었습니다. 

깨서 보니 방이 추운 겁니다. 전날 밤에 보일러를 약간 틀었어야 했는데 밤새 떨면서 자다가 추워서 잠이 깬 것이었습니다. 추워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 객관적인 사실인데, 주관적으로는 생체실험을 당하기 직전의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왜 마음대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요?

생각이라는 것에는 의식도 있고 무의식도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감정, 미묘한 느낌, 공상,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린 시절의 장면, 논리적인 생각, 누군가를 향한 원한과 분노 같은 것들까지 포괄해서 생각이라고 하고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성과 감성을 분리하지 않고 다 마음이라고 합니다. 의식이나 무의식이나 다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낮에 법문을 하는 것도 마음이고 밤에 꿈을 꾸면서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똑같은 마음인데 꿈을 꾸는 마음은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무의식도 내 마음인데 왜 그런 마음을 냈을까? 원효스님하고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무의식이‘내가 지금 잠을 자고 있고 이불을 발로 차서 안 덮고 있고 보일러는 꺼져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제 마음대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않았겠죠. 그런데 무지하니까 마음대로 생각한 겁니다. 무지하니까 괴로웠고, 괴로우니까 이 괴로움을 벗어나고 싶어한 겁니다. 

눈 뜨고 꾸는 꿈

앞서 말했듯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것은, 마이크를 내가 마음 먹은 대로 식빵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그렇게 인식한다는 겁니다. 마음이 세상을 재구성한다는 겁니다. 꿈속의 일이 의식의 입장에서는 꿈이지만, 무의식의 입장에서는 그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이런 작용이라는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이 그런 꿈을 왜곡해서 꾼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깨면 되지 않나?” 잠을 잔다는 것은 정신 중 일부가 쉬는 겁니다. 굳이 말하면 의식이라고 하는 부분이 쉬는 동안 다른 부분이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니 자는 동안에 추위도 느끼고 시끄러우면 깨지 않습니까. 자는 동안 모든 부분이 다 쉬어버린다면 아무리 추워도 잠에서 깨지 않겠죠. 잠을 자는 동안에는 단지 마음의 일부만 쉬고 어떤 부분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나름대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세상에 대해 무지하고, 무지할 뿐만 아니라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욕망하고, 욕망에 끌려다니다 보니 세상을 욕망하는 대로 재구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괴롭습니다. 달리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이미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내 마음대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치 꿈속에서 내 마음대로 세상을 만들어내듯이 그렇게 눈을 뜬 상태로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화두, 내가 믿는 세계를 의심하기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 꿈에서 깰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꿈 이야기는 장자의 ‘호접몽’일 것입니다. 장자가 어느 날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나비가 되어 꽃밭을 노닐며 너무 행복했는데 꿈에서 깨니 늙고 가난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꿈이 좋았는데. 사는 게 뭔지…”라고 말할 텐데 장자는 워낙 사고의 틀이 자유로운 양반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지금이 꿈인 거야. 나비인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삶이야.’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헷갈립니다. 내가 진짜 나비인가? 인간인가?

호접몽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을 마음대로 보고 있습니다. 내가 의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내가 보고 듣는 이 세계가 과연 실제 세계인지를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장자가 잠에서 깨어나 ‘내가 과연 사람이 맞을까?’ 라는 황당한 의심을 한 것처럼.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 회의하고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종에서 말하는 화두입니다. 모든 화두는 ‘어째서?’라는 한 마디로 압축됩니다. 

어느 날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은 “없다[無]”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스님이 헷갈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존경하는 스승님인 조주스님은 없다고 했을까? 어째서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 어째서? 

다른 어떤 사람이 조주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부처님이 뭡니까?” 조주스님이 답합니다. “똥막대기다.” 세상에 있는 물건 중 가장 비루하고 비천한 물건이 부처님이라니. 어째서 그것을 부처님이라고 했을까? 어째서…

이렇게 ‘어째서’라는 한 마디에 모든 마음이 집중될 수 있으려면 일상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에 대해 회의하고 부정해야 합니다. 모든 현실을 비틀어 보고 의심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무지한 상태, 무지해서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날 단초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화가와 같다 

화엄경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이 있습니다.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오온실종생(五蘊悉從生) 무법이부조 (無法而不造)
여심불역이(如心佛亦爾) 여불중생연 (如佛衆生然)
응지불여심 (應知佛與心) 체성개무진(體性皆無盡)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모든 세상을 다 그린다.
오온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기며, 만들지 않는 것이 없도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며,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도다.
응당히 알라. 부처와 마음은 그 체성이 모두 끝이 없느니라.

법이라는 것은 실제 있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세상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그리는 화가라고 했듯이 그 모든 것에는 부처도 중생도 포함됩니다. 하여 본성이라는 것은 끝이 없으며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흔히 일체유심조,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섰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원효스님이 깨달은 것은 무명이었으며 무지였습니다. 원효스님은 우리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고 있지만 칠흑 같은 무명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 중생들은 고통 속에 살면서 세상을 마음 대로 보는가? 욕망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보는 순간 세상은 내 마음대로 구성됩니다. 그러니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부정하고 의문을 제기해야만 일상 속에서 진리를 찾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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