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五戒) 불살생(不殺生) 1

오계 중 첫 번째인 불살생으로 우리 시대의 살인을 고찰하다.
살생 가운데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고 특별히 살인(殺人)이라 말한다. 살인은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문명, 문화권에서 금지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는 살인이나 전쟁 중의 살인, 자발적 안락사와 같이 판단을 고민하게 하는 상황에서도 일어난다.
어떠한 살인이라 하더라도 불교에서는 동기와 의도에 의해 판단한다. 동기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의도는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이다.
동기가 선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의도에 따라 업을 쌓으며 업의 과보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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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이 많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도 아니고 재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공덕을 쌓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재가자들에게 법문을 하실 때 언제나 강조하신 것은 지계(持戒)와 공덕(功德)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과 공덕을 베푸는 것이지요. 오늘은 부처님이 설하신 다섯 가지 계율 가운데 첫 번째인 불살생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지계는 곧 도덕

‘계를 지킨다.’는 불교적 표현을 일반적으로 바꿔 말하면 ‘도덕적인 생활을 한다.’가 됩니다.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도덕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아도 일상생활 전반에 녹아있었지만, 급속한 경제 발전 속에서 도덕 경시 풍조가 팽배해졌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도덕은 그저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다는 선에서 통용됩니다. 법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도 된다는 것이지요.

법은 도덕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덕이 실종된 사회에서 모든 것을 법에 의지하여 살아야 할까요? 불자라면 부처님께서 강조한 대로 계를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계란 무엇입니까?

1. 불살생. 살생하지 않는 것

2. 불투도. 도둑질하지 않는 것

3. 불사음.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

4. 불망어. 거짓말하지 않는 것

5. 불음주. 술을 마시지 않는 것

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기본 계율만 지켜도 도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불살생이란?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서는 불살생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산 것을 몸소 해쳐서는 안 된다.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묵인해서도 안 된다.
난폭한 짓을 두려워하는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위 경전에 따르면 살생은 폭력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폭력은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대상으로 생각할 때 발현됩니다. 사람이 아닌 물건, 중생이 아닌 무정물로 취급할 때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게 됩니다.

중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사람과 사람 아닌 중생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특별히 살인(殺人)이라고 하는데요. 사람에 대한 살생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나눌까요? 아닙니다. 재력으로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모든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기준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나와 나 아닌 사람입니다. 이 사이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나와 나 아닌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도 이 기준에 따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를 죽이는 자살과 남을 죽이는 타살입니다.

살인을 하지 말라는 것은 불교의 고유한 계율이 아닙니다. 어느 문명에서나 금하고 있습니다. 기존 인도 사회에서도 비폭력, 즉 아힘사라는 계율에 따라 보편적인 정서로 불살생을 제창했습니다.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어느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규칙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상황에서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살인, 정당한 살인, 내지는 정의로운 살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더욱이 부처님이 재세하시던 2,500년 전과 현대사회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불살생이라는 계율을 과연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자비로운 살인

경전에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비로운 살인입니다. 자비와 살인이 어떻게 하나의 문장 속에 들어가게 됐을까요?

부처님께서 전생에 선장으로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에는 500명의 상인과 승객이 탑승했고 부처님이 바로 그 배의 선장이었지요. 어느 날 선장의 꿈에 현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배 안에 강도가 있고 그 강도가 상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갈취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선장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경우 강도가 500명의 상인을 죽일 것입니다. 그렇게 살인을 저지른 강도는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져 억겁의 고통을 받겠지요. 두 번째, 상인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인들은 살기 위해 강도를 죽일 것입니다. 그 악업으로 인한 과보도 엄청날 것이지요.

세 번째, 선장이 홀로 강도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강도와 상인 모두 살인이라는 악업을 짓지 않고 오직 선장만 그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생인 선장은 과연 무엇을 택했을까요? 본인이 강도를 홀로 죽이고 살인의 과보를 감수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동기와 의도

계율을 어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장은 왜 살인을 선택했습니까? 강도와 상인들 모두가 악업을 짓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비심을 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의 악을 선택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어떠한 행위를 볼 때는 동기와 의도를 함께 봅니다. 동기는 행위의 궁극적인 이유, 목표입니다. 의도는 지금 하는 행동의 구체적인 목적입니다. 직접적인 목적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동기와 의도라는 틀로 선장의 행위를 바라보자면, 자비심이라는 동기를 가지고 죽이겠다는 의도로써 살생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불살생이라는 가장 무거운 계율을 어겼기에 그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불교에서는 동기보다 의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면 우리를 고민하게 하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전쟁에서의 살인

우리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살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전쟁입니다. 나라에서는 더 많이 죽이라고 독려하고 훈장을 줍니다. 살인을 하지 않으면 명령불복종 죄로 처벌 받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런 상황을 무어라고 설명할까요? 전쟁에 나가야 하는 군인들에게도 이러한 계율을 적용해야 할까요?

부처님 당시에 이런 질문을 한 군인이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은 극락으로 환생합니까? 지옥으로 환생합니까?”

거듭되는 질문에 부처님께서 마지못해 답하시기를,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은 모두 지옥에서 환생한다.”

하셨습니다. 동기와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동기가 상사의 명령이든 누군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겠다는 절박함이든 간에 그 직접적인 의도는 살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의도가 명백한 살인이므로 악업에 따른 과보를 피할 수 없습니다.

고대의 계율로 현대를 고민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마지못해 끌려 나간 전쟁터에서 죽기 싫어서 죽이고, 마침내는 자신도 죽음을 맞이했는데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동기와 의도에 따른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8세기 수행자인 샨티데바 스님도 “전쟁에 나간 병사는 본인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전쟁에 관련된 것만 해도 첫 번째 계율을 어긴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전쟁과 현대의 전쟁은 양상이 너무나 다르지요. 미국과 이라크와의 전쟁은 우리 인류가 최초로 전쟁을 실시간 중계를 통해 지켜보았던 전쟁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장면을 여과 없이 보았지요. 이런 경우도 전쟁에 관련한 것일까요? 이것 역시 첫 번째 계율을 어긴 것일까요?

1960년대 아이히만 실험이라는 심리학 실험이 진행되었습니다. 각각 격리된 방에서 A는 전기 고문 의자에 앉고 B는 C의 명령에 따라 전기의자의 전류를 조작하는 역할을 합니다. 전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B는 상대 실험자를 걱정하며 머뭇거리지만, C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면 높은 볼트의 전류를 흘려보냅니다.

여기에서 B가 직접 버튼을 누르지 않고 버튼을 누르라는 지시를 전달만 할 경우, 높은 전류를 방출하는 데에 저항감이 낮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D라는 전문가가 투입되어 C는 버튼을 누르라고 하고 D는 버튼을 누르지 말라고 할 때, B는 큰 혼란을 느끼며 높은 볼트를 흘려보내는 버튼을 누르지 않습니다. 세 실험의 결과가 각기 다른 것은 B의 행위가 A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가 아닌가에 따른 것입니다.

오늘날 전쟁에서의 살인은 직접 총과 칼로 죽이는 것에서 오직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시스템적 살인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서류작업만 했고, 누군가는 석탄만 열심히 날랐고, 누군가는 기차 운전만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모여 결과적으로 유대인 600만 명을 죽였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인에 가담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살인에 이르는 행동을 했지만 본인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실제로 자발적으로 살인을 도모한 것도 아닙니다. 이럴 때에도 불살생의 계율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요? 2,500년 전의 계율로써 시스템의 살인, 구조화된 살인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안락사

선뜻 규정할 수 없는 살인에 안락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락사는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노령화국가에 접어든 우리 사회에서 그저 멀기만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약물 또는 의료기관을 통해 연명하는 삶을 너무도 지근거리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안락사에는 비자발적인 안락사와 자발적인 안락사가 있습니다. 비자발적인 안락사는 당사자는 죽고 싶지 않은데 국가라던가 권위 있는 기관이 판단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2차 대전에서 나치가 그러했고,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마루타가 그랬습니다.

자발적인 안락사는 현재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와 미래의 일을 미리 결정하는 것으로 나뉩니다. 스스로 죽고 싶지만 환자라서 그럴 수 없고, 고통이 너무 크니 누군가에게 죽여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전자이고요. 지금은 멀쩡하지만 훗날 의식을 잃었을 때 생명유지장치를 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후자입니다.

전자의 경우에 계율을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의 청을 받아들여서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안락사를 시켰다면 동기는 자비심에서 발현된 것일까요? 온전히 자비심만 존재하고 고통에 대한 혐오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동기는 자비심이라 하더라도 의도는 명백한 살인입니다.

가족이 투병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워할 때 그를 안락사 시킨다면 그것은 불교적으로 용납되는 살인일일까요? 계율로 따졌을 때 그것은 살인의 행동을 한 것이고 동기도 자비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죽음을 성찰할 기회

연관 지어 호스피스 활동을 생각해봄직 합니다. 호스피스는 부처님 당시에 없었던 것인데, 어떻게 불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요즘 세상에는 병이 들면 어떻게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환자를 더욱 괴롭게 만듭니다. 환자의 정신을 오히려 흐리고 산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죽음의 순간을 중시하며, 죽음의 순간을 통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면 죽음에 임하는 사람의 마음이 차분하고 평온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다음 생으로 환생할 때 더 좋은 삶으로 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활동이 호스피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스피스 활동을 권장하는 것은 안락사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자연스럽게 맞이하자는 것이고, 안락사는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살인의 행위를 통해 생명을 단축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경우처럼 몸과 마음이 멀쩡할 때 미리 생명연장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가장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비록 그 사람이 정상적인 의식이 있을 때에 그러한 마음을 가졌더라도 죽음에 임박했을 때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무상하고 무아인 것이 인간입니다. 그 사람의 현재 생각이 이전의 생각과 같은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왜 불교적으로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요?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죽음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뺏어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업에 따른 것인데 그의 업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는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기에 더욱 곰곰한 고민이 따르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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