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시대 뉴스 보기

2020년 7월, 뉴스 헤드라인의 대부분은 코로나19와 기후위기로 채워진다. 불안해서 뉴스를 보고 뉴스를 보고 더 불안해지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뉴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사회를 본다.
코로나19로 대표되는 자연과의 싸움. 그 최전선에는 근거 없는 가짜뉴스와 미신에 빠져 방역지침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후방에서는 사회 내부에 쌓였던 갈등요소가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목도한다. 모두 불안함 때문이다.
인본주의와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현대인이 자연을 정복한 것 같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는 낯설고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신화적 세계관이 내재해있다. 위기상황에서 신화적 세계관과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엎치락뒤치락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으로 들끓게 한다.
해답은 2500년 전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적 세계관에 있다. 개인은 스스로를 성찰하는 마음 단련을 해야 하고, 국가는 개인들이 그런 노력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교육과 문화를 통해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마음, 불안, 연기, 인간, 자연, 코로나

뉴스와 불안함

일요법회는 시사적인 문제를 다뤄보는 자리로 마련했는데, 뉴스를 보지 않은 지가 약 2주 정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왜 최근에 뉴스를 잘 보지 않게 되었는지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가장 마지막에 본 뉴스가 태풍 ‘하이슨’이 북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태풍 ‘하이슨’이 북상하는 날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메인 뉴스는 7개였습니다. 그 중 6가지가 태풍과 코로나19에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추미애 국방장관 아들 의혹이었습니다. 

7개 메인 기사 중에서 6개가 기후위기나 자연재해와 관련된 기사였고 나머지 하나가 순수한 사회뉴스였습니다. 6개 중 하나는 앞서말씀드린 태풍 관련 기사였고 2개는 재난지원금 관련 기사, 2개는 코로나19 방역 관련 뉴스, 1개는 코로나19 관련 의사 파업 기사였습니다. 

매일 포털 뉴스에 들어가서 태풍이 어디에 있는지, 코로나19에 몇 명이 감염되었는지를 들여다보다 문득, 이런 것들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불안해한다고 해서 올라오던 태풍이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불안해한다고 해서 코로나19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굳이 뉴스를 찾아보면서까지 불안을 자초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때부터 내가 꼭 알아야 할 정보는 재난문자를 통해서 확인하고 굳이 뉴스를 찾아보며 조마조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가 최근 뉴스를 보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마음이 불안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생중계되는 뉴스를 보면 역대급 태풍이 우리 지역으로 오지는 않을까, 우리 지역에서는 밤사이 몇 명이나 코로나19에 감염되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듭니다. 올해 특히 심했던 태풍이나코로나19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준 것은 바로 불안감의 확산입니다.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코로나19가 낳은 두 가지 현상

지금 우리는 코로나19와 일종의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는 전선(戰線)이 없습니다. 감염이 안 된 곳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방역의 최전선인 방역당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방역당국이 아무리 외출 자제를 당부하고 집합금지를 해도 듣지 않는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근거 없는 음모론이 형성됩니다. 감염수치를 조작하고 있다는 둥, 정부가 코로나19를 이용하여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둥, 코로나19는 기도의 힘을 통해서 물리칠 수 있다는 둥의 이야기들이 퍼져 나갑니다.

이것은 미신입니다. 미신은 근거 없는, 헷갈리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맹신으로 발전합니다. 그냥 믿습니다. 근거도 없고 정보도없지만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에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립니다. 맹신은 다시 광신으로 발전합니다. 옆에서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세계적인 양상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음모론, 마스크 거부론자 등이 전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불안심리가 있습니다. 불안하니까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불안감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런 행동들이 방역당국의 효과적인방역을 방해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집단으로 파티를 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종교의 집합활동 등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 배후에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자연현상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방역의 최전선을 위협하는 것은 1차적으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마음속에 불안감이 싹터 코로나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데에 방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함이 낳은 미신과 사회 갈등

두 번째, 인류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는 내부 구성원들이 단결하여 대적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회의 적폐나 경제적 불평등 같은 문제가 심화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정규직, 고용 불안, 자영업자 등이 제일 먼저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인류 누구나, 사회 구성원 누구나 똑같은 공격을 받으면 일치단결하여 대응할 수 있을 텐데, 기존 사회 구성 장치의 허술한 부분부터공격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사회에 쌓여 있던 문제들이 급속도로 심화됩니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논란이 일어나는 것도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공평하게 재화를 나눌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른것입니다. 비유를 들면, 냄비에서 물이 끓는 것과 같습니다. 불이라는 열에너지를 가하면 물 분자끼리 부딪치고 흔들리다가 끓어올라 수증기로 빠져나갑니다. 코로나19가 불이라는 열에너지로 작용하기에 사회 구성원들끼리 갈등하고 대립하고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지금은 코로나19에 직접 감염되어 피해를 입는 사람보다 코로나19로 인한 2차 피해가 더 큰 상황입니다. 이런 피해들을 어떻게 극복해갈 것인가를 두고 사회 내부에서 갑론을박 의견 일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재해와 기후위기라고 하는 사회 외부의 적이 우리를 공격할 때, 최전선에서는 우리들 내부에 있는 불안감 때문에 균열이 생기고 후방에서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더라 하는 것을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화적 세계관과 인본주의적 세계관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요? 지금처럼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 불과 몇백 년 되지 않습니다. 1,2천 년 전만 하더라도 인간들은 자연에 오직 순응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불이 나고 파도가 치고 태풍이 오는 모든 자연현상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듯 자연에도 영혼이 있을 거라고요. 자연현상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니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신화적인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우선이 아니고 인간이 우선이라는 인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신화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주변부, 배겅, 수단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을 보호하자.’라는 말에도 인간중심적인 사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주체이고 환경은 보호를 받는 객체가 되는 것이지요. 

인간중심주의로 무장한 인간은 과학기술과 합리적인 이성으로 무장하여 자연을 정복했습니다. 그 결과 자연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고통 받고 있습니다. 신화적인 세계관과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이 지금 우리 현대인들 속에 그대로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삶이 불안하지 않을 때는 신화적인 세계관이 그렇게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코로나19와 같이 사회를 뒤흔들며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우리 안에 불안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불안감이 강해지면 미신과 광신이 생겨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분노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추종하기도 합니다.

불안함이 맹신을 낳는다

1970년대 박정희 군부독재가 무너졌을 때, 미국의 한 군인이 한국을 빗대 ‘들쥐 근성’이라고 표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실제 들쥐의 한 종류인 ‘레밍(나그네쥐)’은 우두머리 쥐를 따라 맹목적으로 달리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우두머리 쥐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면 그 집단 모두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이지요. 실은 우두머리 쥐가 개체수 조절을 위해자살을 하는 게 아니고 단순히 절벽을 강물로 착각해 실수했다는 것이 연구 결과 밝혀졌는데요. 인간들이 보기에는 집단으로 자살하는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인간들에게도 이러한 습성이 똑같이 있습니다. 불안심리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 무리 짓고자 하는 심리입니다. 무리 속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혼자 있으면 불안하고요. 이런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근원적인 심리가 위기상황에 닥치면 어김 없이 나타납니다. 

2차 대전 당시에 독일이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가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독일인들이 동조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독일인들이 왜 이러한 학살에 동조했는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는 낯선사람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감과 혐오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히틀러가 교묘하게 활용한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심리와 신화적 세계관이 사회 위기 상황에서는 어김없이 발현됩니다. 이런 마음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처를 방해하는 겁니다.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결국 문제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 구성체와 자연간의 갈등입니다. 원인제공을 우리가 했던 자연이 했건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과 자연의 갈등요소를 해소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마치 냄비에 담긴 물처럼 자기들끼리 대립하고 갈등하고 있는상황입니다. 그럼으로써 기존 사회가 가지고 있던 갈등요소와 모순이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통제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슬기롭게 혹은 운이 좋아서 이러한 위기를 잘 극복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인간들의 마음가짐이 바뀌어야 합니다. 

앞서 인류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것은 신화적인 세계관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뒤에 등장한 인간주의는 인간의 입장에서 좋은 이야기이고 자연의 입장에서는 아주 차별적인 이야기에 다르지 않습니다. 신화주의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인본주의를 주창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위기가 닥쳐온 것입니다. 

이제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또 다른 세계관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2500년 전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적 세계관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이란 모든 존재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동물, 식물과 같은 유정물 뿐만 아니라 돌, 바람, 파도, 별과 같은 무정물도 연기적 세계관에는 다 포함됩니다. 부처님이 항상 강조했던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행복하라.”였습니다. 우리만행복하면 안 됩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행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적 세계관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을 펼쳐보이려면…

연기적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인적 측면이 있고 국가적 측면이 있습니다. 

개인은 우리 안에 있는 낯선 것에 대한 혐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라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고 하면 자기성찰을 해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해야지!’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단련해야 합니다. 몸을 단련할 때 헬스장에 가듯이 불안함, 두려움, 혐오, 분노, 우울, 무력감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평소에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단련하는 방법은 평소에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하는 것입니다. 자기성찰을 하는 이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 밖에 있는 지식을 많이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안을 항상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 차원에서는 개인들이 그런 노력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합니다. 장기적으로는 교육해야 합니다. 명상,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철학적인 사유를 공교육을 통해 교육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성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교육과 문화를 통해 사회가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법을 만들어서 대상을 정하고 경제적인 지원과 제도적 노력으로 사회를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제도는 결국 인본주의적 사고의 결과물입니다. 어떤 것이 인간에게 유리하게 쓰일 수 있을지, 모든 것을 대상화 시킵니다. 그 결과 우리인간들까지 대상화 시켜 모든 것을 돈, 재화, 물질로써 해결하려고 하는 한계를 목도하고 있지요. 

이제는 교육과 문화를 통해 자기성찰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재난지원금 지원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우리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뉴스가 오히려 개개인의 불안심리를 자극한다는 말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불안하니까 뉴스를 봅니다. 뉴스는 어떻게 하든 사람들이많이 봐야 돈이 되기 때문에 불안감을 조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는 스스로를 성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국가는 제도보다 교육과 문화를 통해 이 사회의 도덕 수준을 높임으로써 구성원들이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역할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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