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전에 2

중생은 육신과 정신이 별개라는 것을 전제로로 하여 지수화풍으로 이뤄진 육신에 의지하여 한평생을 살아간다.
육신은 다만 인연에 따라 생기고 흩어질 뿐 영원한 것이 아니건만, 육신이 영원히 ‘나’일 것으로 착각하여 육신에 집착하게 된다.
‘육신=나’라는 생각은 내가 느끼는 외부의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은 다만 우리가 대상이라 생각한 것일 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이라는, 내 것이라는 집착과 소유욕을 알아차리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무상의 진리를 체득할 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무아, 수행, 알아차림, 의지, 죽음

https://youtu.be/3DjNP5UZKq4

백중맞이 <영가전에> 특강 2

사대육신 의지하여 한세상을 살았지만

결국에는 사라지니 허망하기 그지없네

이육신을 집착말고 참된도리 깨달으면

모든고통 벗어나고 부처님을 친견하리

인연따라 모인것은 인연따라 흩어지니

태어남도 인연이요 돌아감도 인연이라

살아생전 애착하던 사대육신 무엇인고

한순간에 숨거두니 주인없는 목석일세

육신에 의지하여 한 평생을 사는 중생

‘사대육신’이란 지수화풍의 네 가지로 이뤄진 몸이라는 뜻입니다. 지수화풍으로 몸이 이루졌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흙과 물, 불, 바람을 기가 막힌 비율로 섞으면 사람 몸이 되는 것일까요? 천재 과학자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내가 육신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는 지(地) 땅과 같이 딱딱한 성질, 수(水) 무언가 연결해주는 성질, 화(火) 무언가 뜨거운 성질, 풍(風) 무언가 움직이는 성질들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대육신에 의지하여 한 세상을 살았다는 말은 내가 따로 있고 육신이 따로 있어 내가 육신에 의지하여 한평생을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육신과 영혼이 별개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더 길게 보면 몸은 비록 낡고 병들고 죽어도 정신은 계속 몸을 바꿔가면서 다음 생에 또 태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생각이 아니라 단지 우리 중생들이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알기듣기 힘들기에 우선은 이 정도로 이해하자는 방편의 언어입니다.

육신은 인연 따라 모였다 흩어지니 집착하지 말라

‘육신은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것이다’, ‘정신은 영원한데 육신은 허망하여 계속 바뀌니 집착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바로 이어집니다. 육신이 없다가 있을 때는 인연 따라 모여서 생기는 것입니다. 육신이 사라질 때도 인연 따라 흩어집니다.

인연이 육신을 만들었다가 흩어지게 하니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난다는 말은 인연 따라 모이는 것이고, 죽는다는 말은 인연 따라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생전 애착하던 사대육신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은 한 순간에 숨을 거두고 나면 주인 없는 목석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요지는 육신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니까 몸뚱아리에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을 인연에 맡기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대신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 참된 도리를 깨달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니 육신에 애착하지 말고 부처님의 참된 도리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라면

예를 더 들어볼까요?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고 합시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저 비이고 비가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몇 십 킬로 위의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떨어진 비는 결국 바닥에 닿습니다. 그 때 온몸이 박살나는 고통은 얼마나 클까요? 박살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바위에 부딪히고 더러운 웅덩이에 한참 고여 있다가 공장을 지나갈 때면 더럽고 독한 매연을 다 마셔야하며 겨우 바다에 당도하면 결국 기화하여 하늘로 올라가 다시 비로 내립니다.

만약 물에 영혼이나 자아, 뇌 같은 것이 있다면 이 과정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물의 인생이 너무 괴로울 것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빗소리가 아름다운 선율로 느껴지지만 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몸이 부서지고 깨지고 고통 받는 신음일 거예요. 자기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누군가는 환희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요?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는 자아라는 것이 비에게 있습니까?

두 번째 예를 들어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떨어진 조선시대 선비가 도로를 지나가는 자율주행차를 마주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선비는 자율주행차를 쇳덩어리 마차라고 생각할까요, 신기한 동물이라고 생각할까요? 선비는 자율주행차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 혼자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는 자율주행차가 동작하는 원리를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영혼이라는 것은 없지요.

이 같은 예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비나 자율주행차에는 당연히 나라는 것이 없는데 우리들 각자는 어째서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대상이 있기에 실체가 있다고 착각한다

답은 바로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시계가 있다고 하면, 시계를 보고 있는 것이 바로 나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입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가 12연기이고 12연기에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아가 있다고 하는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대상을 바라보고 여기에 뭔가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비나 자율주행차만 놓고 보면 자아가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뭔가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니까 그것을 하는 주체 즉 자아가 있다고 단정 짓는 것입니다

다시 ‘사대육신 의지하여 한세상을 살았지만’이라는 문장을 봅시다. 내가 있고 육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넓은 바다에 가득 차있던 물들이 기화하면 수증기고 수증기가 모이면 구름이고 구름이 땅으로 떨어지면 비가 되고 이것이 모여서 흘러갈 때는 시냇물이 되고 이것이 모여 더 크게 흘러갈 때는 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름이 각각 다르다고 해서 그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은 아닙니다. 인연이, 조건이 갖춰지면 수증기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었다가 냇물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 따라 흩어집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조건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뚱이가 따로 있고 시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인연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이기에 육신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여기 있던 비가 없어지고 바다밖에 없느냐고 한탄하고 애석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집착을 알아차리는 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길

집착이라는 것은 ‘이것은 내 것’이라고 챙기는 것입니다. 집착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내가 무언가를 소유한다거나 아끼고 챙기는 것을 넘어서서 혹시라도 이것이 없어질까봐, 나의 손아귀에서 사라질까봐 불안해하는 마음이 같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집착보다 더 문제가 있는 것은 내가 집착하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최소한 내가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돌이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변화하는구나’, ‘이것이 있다가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구나’ 하는 그 변화의 진리, 무상의 진리를 나도 모르게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처님의 진리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습니다. 가족이나 연인, 현재의 기쁨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과 무아의 진리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때문에 내가 집착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괴로워하거나 죄책감을 갖기보다는 더 깊이 부처님의 진리를 체험하고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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