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와 팔정도 ⑩ | 멸성제 – 해탈 (解脫) 2

해탈은 염오 – 이욕 – 해탈지견의 과정으로 이뤄진다. 계정혜 삼학을 닦아 선정과 삼매로써 통찰지에 이를 수 있다. 지혜가 밝아지면 오온을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오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욕망[갈애]하는 마음을 완전히 끊어낼 수 있다. 염오와 이욕의 결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깨달음의 내용이 바로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삼법인이며, 삼법인을 완전히 체화하는 것이 열반의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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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에서의 법의 다섯 가지 모습

해탈은 유식불교, 중관사상, 여래장사성, 화엄사상, 선종과 같은 대승불교 등에서도 이야기하는 개념입니다. 공적영지 혹은 성성적적이라는 용어들로 등장하지요. 그런데 사성제와 팔정도는 사실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초기경전의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 이야기하는 열반은 초기 경전에 나오는 해탈의 개념이라는 것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사성제의 멸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부처님이 수행을 통해 확인한 해탈은 갈애의 소멸이고 집착의 없음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정의한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해탈로 가는 과정은 어떨까요? 오늘은 해탈로 가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경전에서는 항상 사성제를 이야기하고, 연기를 이야기하고, “그리해서 염오하고 이욕하야 해탈하고 구경해탈지에 이른다.”고 표현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해탈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염오(厭惡)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서 이욕(利慾), 욕망과 이별합니다. 여기에서 욕망은 즉 갈애입니다. 갈애를 완전히 떠나면 해탈에 이르고 해탈을 하면 스스로 해탈했다는 견해가 생깁니다. 이것이 해탈지견(解脫知見)입니다. 

해탈유여열반과 무여열반

예불문에 다섯 가지 법의 모습이 나옵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입니다. 이를 오법온이라고 하며 오법온은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계정혜 삼학을 닦으면 해탈을 이루고 해탈을 이루면 내가 해탈했다는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전형적인 경전의 문구로 설명하면“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번 생에 확실하게 윤회를 끝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지요. 

해탈지견까지 증득하면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유여열반의 존재입니다. 완전히 깨닫되[열반] 아직 육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지난생에 쌓았던 업에 대한 과보를 받습니다. ‘유여’란 업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깨달은 이는 언제 완전한 열반을 이룰까요? 육신이 사라질 때 완전한 열반이 이뤄집니다. 이를 무여열반이라 합니다. 여남은 번뇌와 무명이 완전히 소멸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고,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큰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열반했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을 이렇게 일상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죽기 전에는 깨달음을 얻어도 열반을 한 것이 아니라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유여열반을 성취한 것에 그칩니다. 이런 개념이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반’ 자를 떼고 간략하게 ‘열반’으로 통칭되게 되었습니다. 

정리합니다. 유여열반은 반(半) 열반입니다. 아라한과를 증득한 유여열반의 수행자가 죽음을 맞이하면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 무여열반을성취합니다.

해탈의 과정염오 – 이욕 – 해탈

오법온의 첫 번째은 염오로 다시 돌아갑시다. 염오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미워합니까? 나의 오온을 미워합니다.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선정과 삼매에 들면 통찰의 지혜인 통찰지가 나옵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반야지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지혜로써 나의 오온을 관찰하면 그에 대해 염오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갈애를 끊어야지.’ 생각한다고 해서 갈애가 끊어진다고 하면 아라한 아닐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간단한 게 아니지요. 수행의 과정에서 지혜가 밝아지면 오온을 염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고 그때 비로소 내가 많은 생동안 쌓아왔던 갈애와 집착을 끊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염오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만 이욕, 욕망하는 마음을 완전히 끊어낼 수 있습니다. 갈애를 완전히 털어내는 것이 사성제에서 말하는 해탈입니다. 

해탈은 염오와 이욕의 결과로 나에게 생기는 것들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삼법인입니다.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삼법인을 완전히 체화하고 증득하는 것이 해탈입니다. 

부처님이 정의한 해탈 어렵지 않다

갈애의 소멸이 곧 삼법인의 체화입니다. 해탈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해탈과 열반에 대해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있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다만 그 가르침이 후대에 전해오면서 살이 붙고 많은 내용이 덧붙여지면서 본래의 의미를 알아차리기 힘들어진 것이지요. 

법구경에 마치 부처님의 깨달음의 오도송처럼 등장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집 짓는 자를 찾아 나는 부질없이 치달려왔다.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드러났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니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도다. 이제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추었고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도다.”

앞서 이야기한 모든 내용들이 들어가 있고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후대에 등장하는 조사스님들의 오도송보다도 훨씬 쉽고 직관적입니다. 우리가 이 경지에 가지는 못하였지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로 해석하는 삼법인

지금까지 공부해온 십이연기를 바탕으로 부처님이 깨달으신 삼법인을 살펴봅시다. 

  1. 일체개고

십이연기에서 고(苦)는 갈애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갈애는 수에서 비롯되고 수는 촉에서 비롯되고 촉은 식 명색 육입에서 비롯됩니다. 일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는 놈과 보이는 것 즉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을 합쳐서 일체라 합니다. 일체는 쉽게 말해 촉입니다. 촉은 하나의 시건을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는 눈과 보이는 색이 인연이 되어 촉이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촉으로 인해 느낌이 생기고 느낌으로 인해 갈애가 생깁니다. 연기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일체개고라는 개념이 이미 십이연기 안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에서 고를 정확하게 말하면, 애를 조건으로 취가 생기고, 이 강한 집착을 조건으로 하여 유가 생깁니다. 유는 업과 업으로 만들어진 과보입니다. 다시 말해 유는 우리가 오온[나]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입니다. 오온에 집착하는 그 자체[오취온]가 고입니다. 나라고 하는 놈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이 십이연기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 제행무상

제행무상도 십이연기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행이란 십이연기에서 무명 다음에 등장합니다. 십이연기는 원인과 결과[인과]가 두 번 중복되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과거의 원인은 무명과 행이고 현재 만들고 있는 원인은 취와 유라는 내용이었지요. 원인과 결과라는 카테고리로 봤을 때 행은 유하고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제행무상이라는 말은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거기에서 나오는 과보, 또는 좁은 의미의 행으로써 내 마음이 일으키는 모든 심리현상들은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존재의 최소단위

  • 제법무아

제법무아를 이해하려면 ‘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Dharma)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념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를 살펴보면 제법무아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서 여기 물이 있다고 합시다. 물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이라고 하고 미국 사람들은 ‘워터’라고 하고 일본 사람들은‘미즈’라고 합니다. 물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각기 다르게 말합니다. 

반면 과학에서는 물을 H2O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똑같이 H2O입니다. 물을 더이상 쪼갤 수 없는최소 단위까지 쪼갰을 때 산소 하나와 수소 두 개가 결합한 형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이 이상으로 쪼개면 물이라고 하는 것의 고유한 성질이 사라져버리므로 더이상 쪼개지 않습니다. 

물의 최소단위를 H2O라고 표기하는 것처럼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의 최소단위를 색수상행식의 오온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 이것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나’라고 생각되는, ‘나’라는 고유성질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입니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오위백법이라는 말도 하고 법을 구성하는 요소는 75가지가 있다, 81가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마치 원소로서 모든 물질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것처럼 법으로써 모든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를 분해하여 더 쪼갤수 없을 때까지 쪼개었을 때 남는 것, 그것이 색수상행식이라는 법입니다. 

제법무아는 더이상 쪼갤 수 없는 고유한 성질을 가지는 것이 법이나, 그 법조차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지 않더라는 것을 수행으로써 통찰하는 것입니다. 쪼깨고 쪼개어 보니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아공입니다. 

그렇게 쪼갠 법을 다시 사마타 수행과 위파사나 수행으로 통찰해보니 찰나 생 찰나 멸할 뿐 고유한 성질이 없더라는 것이 법공입니다. 법도 매순간 생멸하더라, 법도 공하더라는 것이지요. 아공과 법공을 합쳐서 양구공이라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무아를 증득하려면 아공만깨쳐서는 안 되고 법공까지 깨쳐야 합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실체가 없고 법이라는 것조차 실체가 없다는 것이 통찰의 지혜이며 반야의 지혜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 바로 이 통찰지입니다. 

삼법인과 양자역학

앞서 현대물리학에서 더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단위를 원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원자를 쪼개면 핵과 전자가나오고, 핵을 쪼개면 양성자와 중성자가 나온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조깨고 쪼개다 보면 실체가 없어지는 겁니다. 때문에 양자역학의세계에서는 존재를 부정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상식의 세계에는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집도 있고 카메라도 있는데, 이것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건들만 일어날 뿐이라고 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위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개념과 매우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온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비’라는 존재가 있어서 그것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말이 안 됩니다. 떨어지지 않는 비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즉 비가 온다는 것 자체는 비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자 하나의 사건, 이벤트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수행을 통해 성찰했고, 현대물리학은 이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나가고 있습니다. 양자역학과 불교가 통하는 지점이 무척 흥미롭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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