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계는 자비의 실천
지난 시간 오계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계(持戒), 계를 지킨다는 것을 ‘~하지 말라’고 표현합니다. 이런이런 것들을 하지 않겠다고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인데요. 이 표현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자비를 실천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살생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고, 불투도는 모두의 몫을 존중하는 것이고, 불사음은 가정의 행복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불망어는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을 부정적인 표현으로 자주 접해왔지만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계를 무언가를 제약하고 구속하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보다 불자로서 자비를 실천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계에서 시작한 내용이 자비로까지 뻗어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자비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에서 시작한다
불교의 자비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걷고 이렇게 말했지요. 이 구절과 자비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겠습니다만, 실은 불교의 자비는 이 구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천상계와 지상, 지옥 등 육도 모든 세계를 통틀어 내가 가장 존귀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고타마 싯다르타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보면 거만한 말입니다. 전생에 수기를 받았더라도 아직 이번 생에서는 성불하지 않았는데 태어나자마자 내가 제일 존귀하다고 말하다니 말입니다.
탄생게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태어날 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노력을 해서 내 자신의 소중함과 존귀함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두 번째, 내가 가장 존귀하다는 말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우리들 제각각의 나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무수히 많은 ‘나’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부처님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나이지만 우리들 입장에서는 내가 나입니다. 하다못해 미물, 곤충, 동물들도 ‘나’입니다. 이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모두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탄생게, 모든 ‘나’들은 모두 소중하다는 선언
두 가지 말을 종합하자면, 생명이 있는 존재의 존귀함은 날 때부터 그냥 있는 것입니다. 노력을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지능이 있으니까 더 존귀하고 곤충은 수준이 낮아서 덜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다 소중하다는 이야기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탄생게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또 다른 나들도 존귀하다는 의미에서 자비정신이 시작됩니다.
다른 경전의 예시도 있습니다. 파나세나 왕과 말리카 왕비의 대화인데요. 파나세나 왕이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할까?’ 생각해보니 ‘내가 제일 소중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듯하여 말리카 왕비에게 묻습니다.
“왕비여, 그대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가?”
“왕이시여.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제 자신입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한 것을 확인한 왕과 왕비는 부처님을 찾아가 묻습니다. 이때 부처님이 대답하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으로 전세계를 찾아보아도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각자에게 있어서 내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이는 다른 이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
내 자신이 소중하다면 또 다른 나도 역시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험한 말을 하거나 속여서는 안 된다고 부처님이 이야기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경전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에게 즐겁거나 유쾌하지 않은 상태는 다른 이에게도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어떻게 즐겁거나 유쾌하지 않은 상태를 다른 이에게 가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한 마디로 줄이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들이 가질 수 있는 자비심입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나를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중생의 자비, 나도 남도 이로운 자리이타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사랑입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사랑입니다. 자리이타 정신에 입각하면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물론 나 자신만 위하는 것은 더더욱 올바르지 못하지요. 나 자신만을 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기심이고 배타주의입니다.
이기주의도 당연히 문제가 있지만 무조건 남을 위해 희생하기만 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이웃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생들을 대상으로 법문할 때 부처님이 자비심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생의 차원에서 자비심이란 자리이타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중생의 차원이기 때문에 나와 너가 별개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남도 사랑하라고 이야기고 있지요. 무조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면서 남을 위해 포기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 괴로운 것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굳이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아도 인생을 살다보면 경험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다는 것이 다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요. 경험을 해보니까 그렇습니다.
불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고 남을 위해 착한 일을 하라고 이야기하는데, 혹자는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렇게 하면 나만 당하고 사는 것 아니냐고요. 왜 내가 손해를 봐야하냐고요.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로 가는 것이 좋다는 것.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말은 쉬운데 문제는 그 실천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처님 전생담에 보면 부처님께서 수많은 생을 살면서 엄청난 보시와 희생을 합니다. 이런 희생들은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길로 가기 위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공덕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장은 손해같이 보여도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에 이르는 더 큰 이익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불교만의 논리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부처의 자비, 너와 나 분별이 사라진 동고동락
불교에서는 이런 논리에서 한 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깨듣지 못한 상태의 자비는 자비이타의 이웃사랑입니다. 깨달은 상태에서의 자비는 동고동락입니다. 같이 괴롭고 같이 행복합니다. 이것은 나와 너의 분별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내가 너고 네가 나인 상태기 때문에 당신이 괴로우면 나도 괴롭고 당신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습니다. <유마경>에서 말하는 “중생들이 아프니까 나도 아프다”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이자 공의 경지이자 무아의 경지입니다. 연기법에 입각해서 세상을 보는 경지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비의 실천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의 과정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지혜를 밝히는 과정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고, 그것이 자비를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단지 쳐다보는 관점이 다를 뿐입니다. 자비의 실천, 깨달음의 증득, 진리의 탐구. 이 모든 것이 다 불교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앞서 계를 지키는 것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자비를 설천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진리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자비심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자비의 실천 자체가 깨달음을 향한 탐구
자리이타의 자비심을 두고 ‘왜 나만 고생해야 해?’, ‘왜 나의 자비로운 선행을 몰라주는 거야?’, ‘없는 가운데 이렇게 노력하면 주변에서 칭찬해야 하는 것 아니야?’ 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중생심으로 자비를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자비를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남을 위해 살면 당연히 자기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중생인 이상 말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자비를 실천하다보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듯 불교에서는 자비를 수행하는 마음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사랑, 하느님에 대한 섬김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제 전공이 아니라서 잘은 모릅니다만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기독교적인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나’는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나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내게는 내 몸을 아끼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사랑이 나에게만 주어지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보편적인 하느님의 사랑이 보편적인 인간에게 동등하게 베풀어집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들 자신을 아끼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의무가 있고, 나 역시도 내가 사랑받는 만큼 나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똑같은 의문이 제기됩니다. 나와 남 중에서 누구를 더 배려해야 할까요? 똑같이 배려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럴 때 기독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과 타자 모두를 배려할 수 없을 때에는 우선 타인의 이익을 자기 자신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해야 합니다. 나와 남에게 똑같이 사랑을 베풀 수 없다면 남을 우선 배려하고 챙겨줘야 합니다.
자기희생은 하느님에 대한 섬김의 증표
왜냐하면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서 모든 것이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섬기는 종입니다. 종이 하나님을 섬기듯이 종이 주인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종이고 이웃은 내가 섬기는 주인이기 때문에 이웃을 먼저 배려하고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마저 내어주라는 말과 겉옷을 원하면 속옷까지 내어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5장 38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자기희생의 모범을 예수가 보입니다. 예수는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 사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인간들의 원죄를 어마어마한 희생정신으로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결코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은 종교적 성취로 가는 길이지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전생담을 두고 희생이 아니라 종교적 성취를 위한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의 계명, 이웃을 사랑하라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이 어떤 지점에서 차이를 보이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이타를 놓고 볼 때, 나와 남을 똑같이 배려할 수 있는 상황이 중생계에서는 당연히 생기는데요. 불교에서는 나와 네가 남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지로 나아가서 극복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경지 즉 연기실상의 세계를 확철대오하면서 극복합니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동등하게 배려할 수 없을 때는 타인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첫 번째, 하느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지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길은 이웃사랑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이웃을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하느님이 저 어린양이 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로마서 13장 10절에 이르기를, 이웃사랑은 모든 계명의 으뜸이요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이요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의 십계를 하나로 요약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적 사랑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섬김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이웃 사랑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보내 우리를 용서해주려고 그를 제물로 삼기까지 하여 그렇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니 우리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서 4장 10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이웃사랑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적인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자비, 그 근거는 연기법이라는 진리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자비는 진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연기법입니다. 공이고 무아입니다. 현재불이라고 하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발견한 진리가 연기법입니다.
부처님은 그러한 진리를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내 이전에도 있었고 내 이후에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과거불과 미래불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뛰어난 수행자가 연기법을 발견했을 것이고, 미래에도 수행을 통하여 이러한 진리를 발견할 것이므로 과거불도 있고 미래불도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진리는 이렇게 변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진리에 근거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러한 진리를 발견하는지 못하는지에 따라 다를 뿐이지, 연기법이라고 하는 진리에 근거한 자비 자체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신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헌신, 섬김, 여호와가 존재함을 믿는 것. 이것은 주관적입니다. 바뀔 수도 있고요, 나 아닌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의 핵심은 신앙심이므로 신앙심만 투철하면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하느님을 목도하고 간증하는 등,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불교의 자비는 진리에 근거한 것이기에 내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행하는 자비는 수행의 일환일 뿐이지 그야말로 연기법에 입각해서 자비를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불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자비를 올바르게 펼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열심히 봉사를 하다가도 서운한 마음, 울컥하는 마음,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어떻게든 수행을 열심히 해서 진리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해야 나의 자비도 온전하게 펼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수행의 불교, 신앙의 기독교
왜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은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요? 기독교는 개신교와 가톨릭, 심지어 이슬람까지를 아우르는 하나의 뿌리입니다. 불교는 인도의 지방에서 탄생했습니다. 의식과 형식 중심의 힌두교 전통에 반발하는 무리가 등장하는데요. 이를 사문이라고 명명하고요, 부처님도 이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 무리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종교는 불교와 자이나교입니다.
자이나교는 인도 내에 남아있고 불교는 종교라는 옷을 입고 인도 밖으로,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불교는 원래 태생이 수행 전통이고 수행 중심이고 수행 시스템입니다. 지금도 불교의 핵심은 수행입니다. 단지 수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포장을 한 것이지요.
기독교적인 사랑과 불교의 자비가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불교는 수행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기독교는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연기법과 진리에 입각한 자비를 펼치기 위해서 평소에 수행하는 자세를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것이 불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