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경쟁력

대만 법고산사를 창건한 큰스님 성엄선사 일화로 생각해보는 불교의 경쟁력. 비행기에서 만난 목사와 성엄선사의 대화에서 우리는 불교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는 절대적인 신, 전지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런 것 없다!’고 주창한 것이 불교의 사상이기 때문에 불교는 교주인 부처님마저 부정할 수 있는, 종교면서 종교가 아닌 종교다.
불교의 핵심 바탕은 수행이고 그 위에 종교라는 옷을 입고 있기에 타종교와 충돌할 필요도 없고 타종교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불교는 타종교를 보완하기도 하고 타종교의 믿음을 성숙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갈수록 종교가 쇠락해져가는 시대에 불교의 이러한 유연성은 큰 경쟁력이 되는 일이며, 오히려 세계를 무대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성엄, 종교

대만불교

오늘은 대만의 스님인 성엄선사 이야기를 통해 불교가 어떤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지, 불교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대만불교는 독특합니다. 중국이 1949년도에 공산화되어 중화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되면서 당시 중국에 있던 스님들이 급하게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이주합니다. 중국에는 소림사라던지 오래된 절들도 많고 스님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 중 일부만 부랴부랴 중국을 떠나 대만으로 간 겁니다. 

원래 대만은 본토와 떨어진 섬으로 원주민 나름의 토착 종교가 득세하고 있어 불교가 그다지 퍼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대만에 말 그대로 몸만 빠져나온 중국 본토의 스님들이 들어온 겁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 있는 신계사 스님들이 6.25 전쟁이 터졌다고 해서 절을 통째로 짊어지고 부산 범어사로 피난올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맨몸으로 대만에 온 스님들이 1950년대부터 맨몸으로 포교를 시작해오늘날의 대만불교를 일구었습니다. 

현대 대만불교를 만들어낸 큰스님들이 몇 분 계시는데요. 불광산사를 창건한 성운선사,자재공덕회의 증엄스님, 그리고 교와 학, 율로써 존경받는 법고산사의 성엄선사 등입니다. 대만불교를 일으키고 오늘날 대만에 불교가 생활속에 뿌리내리도록 한 스님들이지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재가불자들이 다른나라 불교를 벤치마킹을 한다면 반드시 대만불교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만의생활불교, 재가불교가 아주 잘 자리잡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대승 전통에 입각한 불교이기도 합니다. 미얀마나 인도에 성지순례를 가서 불교성지를 순례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대만 불자들의 신행생활이 어떠한지를 보고 배울 필요가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엄선사 일화

성엄선사 일화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성엄스님이 미국의 명상센터나 절에 초청법문을 가게 되면 우리나라나 일본을 경유해야 하는데요. 한 번은 이 스님이 한국을 경유해서 미국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스님 옆자리에 마침 한국 목사님이 앉게 되었는데요. 이 목사가 보니까 스님이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에 불상 사진들이 있더랍니다. 다음은 목사와 성엄스님의 문답입니다.

목사: 당신은 이 책에 있는 불상들을 같은 것들을 신앙하십니까?(경배합니까?) 

스님: 나는 불상의 효용은 믿지만 불상을 신앙하지는 않습니다.

목사: 그러면 기도는 하십니까?

스님: 나는 기도를 하지 않지만 내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칩니다.

목사: 당신은 기도를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칩니까? 그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까?

스님: 예를 들어 나의 제자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이 있습니다. 저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교회에 계속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그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들이 저와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에 부족한 것을 불교가 제공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목사: 그러면 그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칩니까?

스님: 부처도 믿지 말고 하느님도 믿지 말고 심지어 당신 자신도 믿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목사는 “그야말로 미쳤구만!”이라고 소리쳤답니다. 그러고서 수 분이 흐른 뒤에 다시 스님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당신이 말하는 불법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라고 했답니다. 

오늘은 이 일화를 바탕으로 불교의 경쟁력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목사가 제일 처음에는 불상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여기에서 ‘불상’이라는 것은 종교의 모든 상징물이나 조형물을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상이 될 수도 있고 성모상이 될 수도 있고 성황당에 쌓아놓은돌탑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목사가 물은 것은 ‘당신이 속한 종교의 상징물을 경배하는가?’가 되겠지요. 

불교는 종교인가? 

스님은 불상의 효용을 믿지만 경배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입니다. 불교는 애시당초 출발할 때종교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나 유대교나 이슬람교 같은 현대의 고등종교들은 출발부터 종교였습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면 존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출발한 고대인도에서는 종교가 삶과 분리된 특별한 무엇이 아닌 삶과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종교와 삶이 분리되지 않는 그 인도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등장한 사상 중의 하나가 부처님의 주장이었습니다. 당시 인도사람들을 지배하던 사상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세상에는 근원이 있고 모든 것은 그곳에서 나와 그곳으로 돌아간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근원의 그림자라는 겁니다. 그 근원에 대해서는 브라흐만, 아트만, 리타, 다르마 등 다양한 표현을 합니다. 표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으로부터 이 세상이 돌고 돈다, 순회한다, 윤회한다는 것이 고대인도인들의 사상의 핵심이었으며 종교였습니다. 

그러한 당대의 주류 사상을 고타마 싯다르타는 부정한 겁니다. ‘그런 것 없다!’고 말입니다. 부처님은 근원적인 무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고통이며, 그 고통은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이며,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주창한 불교의 출발은 신앙이 아니라 수행이었습니다. 근원적인 존재,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나와세상의 실상을 바로 보고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다시 성엄스님의 대답으로 돌아가볼까요? 불상의 효용은 있지만 경배하거나 신앙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불교의 핵심 바탕은 수행이고, 그 위에 종교라는 옷을 입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목사의 두 번째 질문입니다. 믿고 따르는 존재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앞에 놓고 기도하는 행위가 종교의 주된 생활인데, 상징물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기도도 하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목사가 보기에 당신이 속한 종교의 상징물을 경배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면그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성직자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자 성엄스님이 대답하기를, 저 자신은 기도를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말이 안 됩니다. 왜 자기는 기도를 안 하는데 남한테는 하라고 합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목사가 말하는 기도와 성엄스님이 생각하는 기도의 차이를 알고 가야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에서 똑같이 기도라는 말을 쓰지만 용처가 다르고 의미가 다릅니다. 

목사가 말하는 기도는 말 그대로 갈구하는 겁니다. 원하는 것을 이뤄 달라고 전지전능한 존재에게 매달리는 겁니다. 성엄스님은 수행자입니다. 수행자가 절대적인 존재에게 애원하는 기도를 할 리가 없지요. 불교는 절대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데에서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존재에게 갈구하는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맞는 거예요. 그 순간부터 불교에서는 기도 자체가 모순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기도를 서원의 의미로 상정합니다. 내가 부처님 같은 존재가 되겠다고 부처님 앞에서 맹세하는 것을 기도라고 재해석한 거죠. 

성엄스님은 우선 일반적인 의미의 기도를 말합니다. 소원성취를 바라는 수동적인 의미의 기도이지요. 처음 불교를 접하시는 분들은 수능기도나 소원성취 기도를 하십니다. 시작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생각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거쳐서 자연스럽게 기도의의미가 변화합니다. 그러니 성엄스님이 이후에 가르치는 제자들에게는 기도를 하라고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두 가지 의미의 기도를 두루말하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간절한 마음으로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하는 기도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기도에서 점차 서원으로 발전할 것을 믿는 것이죠. 그러면서 동시에 당신이 하는 기도는 이런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봅시다. 불교에서는 신적인 존재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중생들의 간절한 마음이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대표적으로 관세음보살님이 있는데요. 타종교에서 추구하는 절대적인 신의 역할을 나름대로 관세음보살님이 해줍니다. 다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 불교의 경쟁력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타종교와 충돌하지 않는 종교가 가능한가? 

목사가 스님에게 반론을 제기합니다. 당신은 기도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하라고 권하는 것은 그들을 속이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이때 성엄스님이 하는 말이 뭡니까? 내 제자 중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하죠. 

성엄스님이 기도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누군가 타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그 종교의 기도를 하라는 겁니다. 허용하는 거죠. 불교가 타종교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고 성숙시켜주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믿는 종교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를 배타하지 않고 타종교를 보완해주고 더 성숙시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달라이라마 존자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큰스님들이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기독교 중에서도 보수 기독교인이 만든 나라입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입니다. 불교는 그런 부분을 인정합니다. 견주고 다투지 않습니다.

종교의 배경이 같은 범주에 있다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힌두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에서는 부처님도 수많은 힌두교의 신 중 하나로 여깁니다. 모든 신을 흡수해버립니다. 만일 불교가 그 틈바구니에서 하나의 정체성을 주장한다고 하면 충돌할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불교는 애시당초 근원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를 상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종교를 그대로 믿으면서 그 종교가 가지지못한 부분을 불교를 통해 보완하라고 합니다. 불교는 방점을 어디에 두는가? 나의 밖에 있는 절대적인 존재, 근원적인 존재에 두는 것이아닙니다. 나에게 방점을 둡니다. 나의 수행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관점이기 때문에 기존의 종교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성엄스님의 대답도 이러한 바탕에서 나온 것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여기에 이런 이야기를 조금 더 보탭니다. ‘당신의 종교생활에 불교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면 당신의 종교를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불교는 근본적으로 근원적인 실재는 없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연기를 이야기하고 공성을 이야기하므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부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지요. 그런 단계가 오기 전까지 불교는 당신의 종교관을 성숙시켜주는 역할을 할수 있습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수행시스템

목사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상식적인 관점에서는 불교나 기독교나 같은 종교의 범주인데 한 종교가 다른 종교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죠. 그러니 묻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 어떻게 당신의 종교와 다른 종교가 충돌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 당신은 당신의 종교를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냐? 

“부처를 믿지 말고 하느님을 믿지 말고 심지어는 그들 자신도 믿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라는 성엄스님의 대답은 무슨 뜻일까요? 불교의 핵심을 대승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공사상을 완전하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공사상을 완전하게 체험하기 위해서는 첫째, 아공을 체득해야 합니다. 아공은 내가 공하다는 것입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깊이 수행해서 나라는 존재를 들여다보니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으로 이루어져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공을체득하고 나면 둘째, 법공을 체득해야 합니다. 

법공이란 무엇입니까? 색수상행식이라는 각각을 들여다보니 이 역시도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한 찰나도 고정된 것이 없이 무상하더라는 겁니다. 무상하니까 거기에서 고(괴로움)가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규정하기 위해서는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고정되어있지 않으니까 규정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데 못 하면 괴롭습니다. 거기에서 근원적인 괴로움이 나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무상하니까 괴롭다. 이것이 법공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해탈이 되는 겁니다.

이런 불교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한 종교의 교주로써의 부처도 믿지 말고 교주로써의 하느님도 믿지 말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있다는 생각이 모든 고통의 시작이므로 ‘이것이 나다.’ 라는 생각, 내가 있다는 생각, 나에 대한 믿음도 버리라고 말합니다. 즉성엄스님의 대답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수행’이라는 의미를 포괄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이면서 종교가 아닌 것, 경쟁력

목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말이 안 됩니다. 교주를 부정하는 것은 종교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불교의 경쟁력은 불교가 종교이기도 하고 종교가 아니기도 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종교가 갈수록 쇠락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빛 바래서 존재감이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나 개신교는 자리를 잡기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종교의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을 수도 있는 유연성이 있는 겁니다. 

정리합니다. 불교의 경쟁력은 종교이기도 하고 종교가 아니기도 한 데에 있습니다. 종교가 인류의 정신과 문화를 지배하던 시절에 불교는 종교적인 틀과 제도와 문화 속에서 불교의 내용을 전세계에 퍼트렸습니다. 불교가 인도를 벗어나 세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와 삶이 완전히 하나가 되지 않고 종교의 기능 중 수행적 측면을 일반화 시켰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힌두교라는 종교를 퍼트리기 위해서는 힌두교적 생각, 힌두교적 삶, 힌두교적 문화가 통째로 옮겨가야만 가능합니다. 힌두교는 힌두교인들의 삶의 양식과 뗄레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것이 힘들지요. 

그런데 불교는 종교와 삶이라는 틀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인 ‘수행’을 일반화 시켰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다른 나라에 가도 그 나라 문화와 윤리 속에 자연스럽게 결합해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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