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한 문장가 최치원
오늘은 지난 초하루법회에 이어 ‘봄비’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지난 시간, 중국의 시성이었던 두보의 시를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신라의 내로라하는 문장가였던 최치원 선생의 시를 먼저 읽고 그 다음 진각국사의 또 다른 게송을 살펴보겠습니다.
최치원은 한 마디로 말하면 출세를 하고 싶었는데 출세를 못한 지식인입니다. 신라시대는 골품제가 아주 엄격하게 적용되었는데요, 최치원은 6두품 출신이었습니다.
성골과 진골은 왕족이고, 6두품부터 4두품까지는 귀족, 4두품부터 1두품까지는 평민입니다. 성골은 부모가 다 왕족으로 왕이 될 자격이 있고, 진골은 부모 중 한 쪽이 왕족이라서 왕의 핏줄을 이어 받았지만 적법한 왕이 될 자격은 없었습니다. 다만 왕을 할만한 성골이 모두 없어진 후에는 진골이 왕이 되기도 했지요.
최치원은 귀족이었지만 뜻을 펼칠 수 있을 만한 출신은 아니었습니다. 최치원은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문장가로서 재능을 맘껏 펼쳐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한계가 있었습니다.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 받았지만, 근본적으로 중화민족의 관점에서 최치원은 동쪽에서 온 오랑캐에 불과했습니다.
중화민족, 한족은요 역사적으로 중화민족이 특별하다는 우월감과 함께 자신들을 침략해오는 오랑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 민족들에 대한 멸시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상태지요. 그러니 최치원이 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어도 중국에서 출세할 수는 없었던 겁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
신라로 돌아왔지만 어떻습니까? 시무10조라고 하는 개혁적인 정책을 뛰어난 문장으로 적어 제출을 하지만 진골들의 반대에 부딪쳐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최치원은 인생이 무상함을 느끼고 털고 일어나 말년에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가야산에 정착하여 ‘가야산 도인’으로 불리며생을 마감했습니다.
가을 밤 비 내리는 중에(秋夜雨中) – 최치원
秋風唯苦吟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으니
世路少知音 세상에 나를 알 이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밖에는 밤비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불 앞 외로운 맘 만 리를 달리네
가을 바람이 오직 홀로 읊조리니, 세상의 거리에서는 이 소리를 아는 이가 적다. 창밖은 삼경의 밤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의 마음은 만리를 가는구나.
바람이 쌀쌀한 가을 늦은 밤에 비는 내리고, 신라를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 혼자 호롱불을 하나 켜놓고 앉아있는 겁니다. 흔히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를 두고 지음(知音)이라고 합니다.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는 이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친구가 최치원에게는 없습니다.
청운을 품고 뜻을 펼치기 위해서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국에 왔는데 자기의 뜻을 알아주는 이가 없습니다. 비는 오고 밤에 앉아 있으니까괜히 센티해지고, 마음은 멀리 떨어진 신라 땅을 그리워합니다.
보통 이 시를 이해할 때, 먼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잘 들여다 보면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세상을 올바로 다스리고자 하는 나의 큰 뜻을 세상이 몰라주니 마음이 약해지고 고향 생각이 나는 겁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결과이지요.
최치원이 뛰어난 문장가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가 깨달은 도인인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최치원도 결국은 두보와 비슷한 마음이있었던 겁니다. 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출세하고자 하는,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서 오는 쓸쓸한 심상이 시에 묻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중생이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중생들이 가지는 가장 큰 병은‘내가 있다’는 무명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세상
초파일 밤 / 김지하
꽃 같네요. / 꽃밭 같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이를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벽 속에/ 저벅거리는교도관의 발자욱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가로저어/ 더 깊숙이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끈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말 꽃 같네요/ 참말 꽃밭 같네요//
월간<증심> 5월호에 보면 초입에 김지하의 시가 나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70년대 현실참여 시인이었지요. 이 시인이 70년대에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데요, 아무리 세상을 뒤집겠다는 사람이었지만 겨우 20대에 불과했습니다.
죽을 날을 받아 놓고 감옥에서 창밖을 보니 멀리 인왕산에 초파일이라고 연등이 색색으로 걸려 있습니다. 저 꽃처럼 아름다운 연등을 다시볼 수 있을지,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청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우리는 연등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빈자일등의 정신을 느끼고, 부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을 내지만 불자가 아닌 84%의 사람들은 그 연등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김지하의 경우에도 자기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올 것입니다.
두보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것을 보면서 권력의 중심에 대한 동경을 감출 수 없었듯, 최치원이 세상이 나를 몰라주는 것에 쓸쓸해 하며 고향 생각을 하듯, 김지하는 아름다운 연등을 보면서 ‘내가 다시 저 연등을 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생각대로 세상을 봅니다. 아무리 내가 뛰어난 문장가이고 박학다식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내 마음 속에 가득 찬 무언가를 통해서 세상을 봅니다. 이것이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이제 진각국사의 게송을 봅시다. 내용을 보면 장마철에 쓴 것 같습니다.
비 오는데 어딜 쏘다니는가?
어제부터 줄곧 장대비가 오고 있네
걸어가려도 배를 타려도 이 모두 불편하니
저 비에 몸을 적시지 않으려거든
이 방안에 넉넉히 앉아 있게나
어제 아침부터 금일까지 비가 연이어서 옵니다. 육지로 걸어서 가려고 해도, 배를 타고 가려고 해도 모두 다 불편합니다. 비가 계속 오니까움직이기가 너무 불편한 겁니다. 온몸을 적시지 않으려거든 방 안에 거추장스러운 옷은 다 벗어버리고 편안하게 앉아있는 것이 어떨까. 비가연일 내리고 있으니 굳이 어디를 가려고 애쓰지 말고 방 안에 앉아있으라는 거죠.
이것은 단순하게 비 오니까 돌아다니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지난 시간에 다루었던 사량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청명하게드러나 있는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니 연기실상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수행을 하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겠다고 이런 저런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들이 제대로 된 방향이 아니라 엉뚱한 노력이라면 어떻습니까? 쓸모없는 일이 되겠지요. 장대비가 쏟아지면 방 안에 가만히 들어 앉아 있으면 되는데 왜 나가서 배를 타니 걸어가니 산란하냐는 겁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밖에 있지 않고 네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깨닫는다고 할 때, 우리는 흔히 나와 무관하게 대상으로서의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성성하고 적적하다고 하는데요. 성성하고 적적한 그 무엇이 있어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중생들이 하는 생각입니다. 성성적적이라는 깨달음의 경지는요, 별처럼 환하게 빛나고 쥐 죽은 듯 고요한 상태이라는 겁니다. 무언가 훤하게 밝은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요할 수가 없습니다. 두 개가 같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경지는 이 두 성질이 같이 갑니다.
소소영령이라는 표현도 씁니다. 소소라는 것은 뚜려하게 무언가 드러나 보이는 상태이고요, 영령하다는 것은 무언가 신령스러운 기운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명쾌한데 무언가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돕니다. 이것도 공존할 수 없는 성질인데 깨달음의 경지에서는모순되는 것들이 하나로 표현됩니다.
그물코처럼 연결된 연기실상의 세계
흔히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말을 합니다. 먼저 ‘이것’과 ‘저것’이따로 있어서 이 두 가지가 작용해서 무언가가 생긴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먼저 무언가가 있고 그 다음에 무언가가 작용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연기실상이란 그렇지 않습니다.
연기실상을 이야기할 때 인드라망이라는 개념을 드는데요. 망이라는 것은 그물입니다. 철망을 떠올려보면요, 철사가 따로따로 있어서 그것을 묶어놓는 것이 아니라요. 다만 철사가 꼬여있을 뿐입니다. 어망도 그렇습니다. 각각의 점들이 있고 그 점들을 실로 묶어 연결하는 게 아니라 실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있는 상태에서 각각을 연결한 것이 아닙니다. 망을 자세히 보면 이것 저것이 별개로존재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연기실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아는 곧 연기다, 연기는 곧 공이다. 모두 같은 말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체험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느낌의 것이라고 어느 정도 이해는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어야 깨닫기 위해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못 알고 있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연기실상을 깨우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노력입니까? 장마철에 어딘가 가보겠다고 방을 박차고 나가 용을 쓰는 것이 바로 불필요한 노력입니다.
공부는 내 안으로 들어가서 나를 관찰하여 결국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치는 것입니다. 진각국사는 이 게송을 통해 안이비설신의에 현혹되지 말고 네 안으로 들어가서 너의 실체 없음을 체험하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이것이 중생과 도인의 차이입니다. 중생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봄비를 보면서 입신양명을 떠올리고, 가을비를 보면서 세상이 나를몰라준다 한탄합니다. 도인은 같은 비를 보고도 깨달음의 이치를 중생들에게 설명합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는 그물망이 연기실상의 이치를 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