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불교인가?

템플스테이에서는 명상을 한다. 불교박람회의 주제를 명상으로 삼기도 한다. 불교와 명상은 일견 아주 밀접한 관계처럼 보인다. 과연 명상은 불교일까?
명상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힌두교가 있다. 제사를 지내는 바라문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베다시대에 이러한 바라문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행자들이 등장한다. 바라문은 형식과 의례에 치우친 제사에서 한 발 나아가 신과 바라문의 합일점을 찾는 수행으로 명상을 내세운다. 힌두교에서 명상은 신과 합일하기 위한 수행이었으며, 명상에 들기 위한 신체적 준비를 하는 것을 요가라고 이름 붙였다.
요가와 명상은 기실 불교의 핵심인 삼법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삼법인을 깨닫기 위한 불교의 지관수행이나 위빠사나, 참선 수행 등과 외형적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에 명상을 불교적 수행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명상이 불교가 아니라고 해서 배척할 필요는 없다. 불교적 수행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명상, 불교, 삼법인, 수행, 요가

어린이의 기도, 어린이의 부처님

명상은 불교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의 신행과 신앙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부터 점검해야 할 것 같습니다. 

템플스테이에 한 가족이 참석했습니다. 저녁예불에 참석해서 절을 하면서 부처님께 소원을 빌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올려다보니 양쪽 부처님은 웃고 있는데 가운데 부처님은 웃고 있지를 않더라는 겁니다. 첫째 아이가 “내 소원을 반만 들어주려나?” 하니 둘째아이가 “내가 볼때는 웃고 있던데.” 라고 하며 티격태격 했다고 합니다. 

둘째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답니다. “저 나무 부처님을 쪼개면 안에서 부처님이 나오나요?” 엄마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러면 나무부처님을 쪼갤 때 안에 있는 부처님도 쪼개지면 어떡해요?” 라고 다시 물었답니다. 엄마가 대답하기를, “그러니까 안에 있는 부처님이 쪼개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쪼개야지.” 했답니다. 

여섯 살 아이의 입장에서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겁니다. 부처님이 다치지 않게 조심히 쪼개야겠다는 것이 아이의 고민인 겁니다. 이아이들에게는 부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입니다. 불상도 인간처럼 살아있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엄마도 그렇다고 하고, 할아버지 스님도 그렇다고 하니까 철석같이 믿는 겁니다.

이 아이가 조금 더 크고,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무언가를 배우고 나면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겁니다. 불상이 살아있거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라고 믿지 않게 되겠지요. 개인의 일을 봐도 그러한데, 역사적으로 볼 때도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베다시대와 우파니샤드 시대의 변곡점

불교는 인도에서 태동했습니다. 인도의 주류 종교인 힌두교인데요. 힌두교는 인도인들의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에 종교라고 보기에도어렵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드렸습니다. 인도의 역사는 힌두교의 역사와 같습니다.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애매합니다. 그런 가운데 고대 인도는 베다 시대와 우파니샤드 시대로 나뉩니다. 

베다 시대는 바라문들이 제사를 지내던 시대입니다. 바라문들이 제사를 지내는 형식 내지는 그 내용을 담아놓은 것이 <베다>이지요. 제사는 바라문만이 행할 수 있는 특별한 의식이었습니다. 절대자에게 어떤 소원을 빌 때, 바라문이 아주 정확하게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행해야만 소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바라문 말고는 아무도 제사를 지낼 수 없었어요. 왜냐? 제사의 내용이 너무나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바라문만이 그 기준과 절차를 알고 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문이라고 하는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사문들은 바라문들의 허례허식과 권위를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사문들이 의문을 제기하자 바라문들이 변화합니다. 형식에 너무 치우치지 말고 과연 어떻게 하면 절대자와 내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런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명상 수행입니다. 

요가와 명상, 힌두교의 대표적 수행

요가가 무엇입니까? 명상 수행입니다. 힌두교가 나름대로 변화를 하면서 제사만 지내서는 안 되고, 신과 내가 합일되기 위한 수행 혹은 세팅을 하는 겁니다. 신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몸의 순환이 이뤄져야 합니다. 기가 잘 통하는 상태여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수련하는 것이 요가입니다. 하타요가는 명상에 잠기기 위해 신체를 준비시키는 단계이고요, 그렇게 명상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만들면 라자요가라고 하여 명상을 하는 단계입니다. 명상의 목적은 나와 신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는 사람들을 요가수행자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요가를 한문으로 표현하여 ‘유가’ 행파라고 했습니다.  

베다 시대와 우파니샤드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위에서 언급했던 어린아이의 생각과 똑같습니다. 베다 시대는 기도만 열심히 하면, 제사만 정확하게 지내면 절대자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다면, 우파니샤드 시대의 힌두교는 몸과 마음으로 절대자와 통하는 수행을 하는 겁니다. 한 개인이 어릴 때는 기도를 잘 하기만 하면 법당에 있는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커서는 생각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고 불공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베다 시대의 바라문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갖춰진 형식에 따라서 의식을 치르면 소원을 이뤄준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기도만 하면 불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김치찌개에 김치가 없으면 김치찌개가 아닙니다. 고기나 두부는 들어갈 수도 있고 안 들어갈 수도 있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 재료인 김치가 없이는 김치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알아야 명상이 불교인가 아닌가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힌두교의 명상, 현대의 명상

그렇다면 브라만교에서 신과 합일점을 찾는 수행으로서의 명상과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명상은 같은 것입니까? 

첫 번째, 목적이 다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명상은 이런 겁니다. 유튜브 들어가서 명상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머리 속의 잡생각을 없애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내 마음을 힐링하는 것,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지요. 사전에서도 현대적 의미의 명상은 심리치료라고 합니다. 웬만한 병원에서도 명상을 하나의 심리 치유 프로그램으로 운영합니다. 힌두교에서 추구하는 것과는 목적이다르지요. 절대자와의 합일이라는 본래 목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불교박람회의 큰 주제로 명상을 내세웁니다. 상식적으로 명상이라고 하면 불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템플스테이에서 명상이나 요가를 하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일반인들이 명상과요가를 뭔가 불교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하는 것을 곰곰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의 핵심, 삼법인

그렇다면 불교는 무엇인가? 불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명상이 불교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만 있는 것이 명상에도 있으면 명상도 불교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에만 있는 그것이 명상에 없으면 명상은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로 기도하고 명상하고 예불한다면, 겉모습은 불자라 하더라도 알맹이는 불자가 아닌 겁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불교가 탄생된 배경을 봐야 합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이유로 탄생했는가를 보면 불교의 핵심을 알 수 있습니다. 힌두교가 베다에 얽매여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여러 사상가들이 등장합니다. 경전에 육사외도라고 나온 것이 그런 사상가들입니다. 힌두교에서는 근원적인 존재와 내가 합일해야 삶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고 하는데요. 여기에 반해 고타마 싯다르타가 주창한 것은 이런 겁니다. “절대적인 존재, 신, 이런 것은 없다.”

절대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왜 없는가? 그 연유를 설명하는 것이 삼법인입니다. 

제법무아는 절대적인 존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에는 자성이 없다. A를 A이게끔 하는 무엇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는가? 연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A와 B와 C가 따로 있어서 이것들이 상호작용하고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A가 있다, B가 있다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연기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후대에는 연기를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공성이라고 하는것이 중생들이 이해하기에는 더 정확하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A와 B가 있어서 서로 작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세상에는 그런 게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것이 변화하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무언가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겁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똑같았으면 좋겠고, 컵 안의 물이 지금 따뜻한 그대로 10분 뒤에도 따뜻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끊임없이 변하는데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꿈을 꾸는 겁니다. 그러니까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일체가, 인생이 괴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고(苦)는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고통 즉 사랑하는 사람과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 같은 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고통입니다. 

명상 안에 삼법인이 있는가? 

이러한 삼법인의 내용이 들어가 있으면 불교이고 그 내용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불교가 아닙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명상은 불교인가? 명상은 출발이 힌두교였기 때문에 불교와 관련이 없습니다. 현대의 명상 역시 힐링의 차원이기 때문에 삼법인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비슷합니다. 불교에서 지관수행, 위빠사나 수행, 참선 등을 할 때 그런 수행과 외형적인 모습이 비슷해 보인다 뿐이지 불교의 핵심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불교가 아니니까 배제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법당에 있는 조각상을 보고 그 안에 부처님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기도를 한다면 그 순수한 믿음을 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마음에 힘을 북돋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함을 일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순수하지만 무지한 믿음이 진정한 불교적 믿음으로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것을 방편이라고 합니다. 

명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는 종교가 힘을 쓰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열 명 중에 여섯 명은 종교가 없습니다. 불교는 16%, 개신교가17%, 가톨릭은 7%에 불과합니다. 불자인 16% 중에서 조직력을 가지고 신행생활을 하는 불자는 6% 밖에 안 됩니다. 나홀로 불자, 정서적 친불교인 사람입니다. 명상은 이런 사람들이 불교에 친숙해질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명상의 본질은 불교와 다르지만 외형적인 형태가 유사하기 때문에 불교와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장이 됩니다. 

그럼에도 명상에서 길어올려야 할 것은? 

일반적인 불자들은 기도하고 예불하는 속에서 나 자신을 향상시키고자 합니다. 부처님에 의지해서 나 자신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욕망을 기도라는 형식이 아주 잘 수용해냅니다. 때문에 기복이기는 하지만 기도라는 행위가 불교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정리합니다. 명상은 불교인가? 명상이 불교는 아니지만 명상을 통해서 불교로 나아갈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로 올바른 서원을 세우고 기도하는 것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보다 나 자신의 성장과 발전에 더 큰 기여를 할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불교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명상을 주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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