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불자란

“과연 나는 진정한 불자일까?”
불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면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파헤쳐보자.
정체성이란 무언가를 무언가이게끔 하는 본질을 말한다. 인간은 인간의 본질을 몰라 괴로워하고 혼란을 겪는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는 데에서 착각과 혼란이 시작된다.
참된 불자는 어떤 사람일까? 사회에서 제시되는 기준에 맞춰 교리공부를 하거나, 부처님이라면 어떨까 가늠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행이 그대로 부처 자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본질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매 찰나 나의 행이 부처라는 마음으로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모습이다.

#나는누구인가, 무아, 정체성

https://youtu.be/FznhbOXilf8

불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오계를 잘 지키고 심신이 깊은 이를 진정한 불자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어디까지나 지식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불자로서의 정체성입니다. 과연 내가 진정한 불자인가? 참된 불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질 때 오롯이 대답할 수 있으려면 불자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정체성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시나요? ‘정체성 혼란의 시대다.’ 혹은 ‘정체성이 상실되는 시대’라는 말을 자주 접하는데요.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제대로 짚어보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까 합니다.

정체성이란 존재의 본질

사전적 의미의 정체성은 ‘존재의 본질’입니다. 정체성은 내적으로 일정 기간 동안 쭉 지속되는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외적으로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해서 공유하는 것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본질이란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이야기해서…”와 같은 표현을 일상에서 많이 쓰지요. 예를 들어 “의자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 뜻은 의자를 다른 것과 구별 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의자를 의자답게 하는 그 무엇 말입니다.

나무 의자도 의자고 쇠로 만든 것도 의자고 벤치처럼 긴 것도 의자입니다. 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의자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앉기 위한 것. 앉는다고 하는 용도와 목적이 정해져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질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그 무엇답게 하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본질이라는 말은 다시 말해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같고, 이 말은 ‘나의 본질이 무엇인가?’와도 같습니다.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게 해주는 나만의 고유한 것은 무엇일까요? 좀 더 확장된 개념으로 생각해보자면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말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제일 쉽게 떠오르는 말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어패가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이성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돌고래도 인간만큼 생각하고 집단 내 의사소통을 하며 의견을 교환하고 집단적으로 사냥을 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다.’라는 명제도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맞는 말 같지만 도구는 원숭이들도 쓰고요. 물고기들도 집을 지을 때 주변에 있는 것들을 도구 삼아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인간만의 본질이 아닌 것이지요.

‘인간은 종교적인 존재다.’ 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인간만이 종교의식을 가지고 인간만이 신을 섬기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연구 결과 아프리카에 지역의 일부 오랑우탄 무리가 인간들과 아주 흡사한 종교의식을 하더라는 겁니다. 무리 안의 오랑우탄이 죽으면 특정한 장소에 가서 인간이 보기에 너무나 종교적인 의식을 하는 것이지요. 인간만이 종교적인 존재라는 말도 이제는 신빙성이 없는 시대입니다.

앞선 예들로 미루어 봤을 때 인간의 본질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다보면 결국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의자의 본질, 책상의 본질 같은 것들은 정의할 수 있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규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없으니까요.

우리가 살다가 난관에 부딪히고 사는 게 힘들 때 자기도 모르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도대체 사는 게 뭘까?”, “요즘은 사는 낙이 없어.” 이 질문은 다시 말하면 나의 존재 이유와 목적, 즉 나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답이 없습니다. 나의 존재 이유가 있으려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태어난 겁니다. 우리는, 인간은, 나는, 본질이 없습니다.

없는 본질을 찾아 헤매다

나의 본질이 없다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닙니까? 불교의 핵심 사상 무아사상입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번뇌를 일으키는, 무명에 젖어있는, 거짓된 나입니다. 그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요즘 말로하자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나 나의 본질 따위는 없다, 나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것이 불자로써 마음에 새겨야 할 명제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이나 본질을 궁금해하고 또 혼란스러워하는 것일까요? 부처님은 내가 없다고 했는데, 이렇게 내 몸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다. 여기 내가 멀쩡하게 있는데 부처님은 왜 없다고 했을까?’ 불자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부처님 말씀대로 나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내가, 내 몸뚱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든 나라고 하는 놈의 본질을 갖추고 싶어 합니다. 어디서든 끌어다 갖춰놓고 싶으니까 거짓된 나를 쫓아가고 무명에 젖어 번뇌 속을 헤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없는 정체성을 만들어낼까요? 정체성은 본질이며, 나를 나답게 하는 어떤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는 나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지 그 이야기를 해봅시다. 먼저 아주 쉬운 산수 등식을 소개합니다.

x=2

x=2

‘엑스는 2다.’ 라는 말을 수학적으로 쓰면 ‘x=2’가 됩니다. 좌변에 있는 엑스(x)는 변수이고 우변에 있는 2는 상수입니다. 상수는 변하지 않는 수입니다. 2는 3이나 4, 7이 아니라 2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좌변에 있는 엑스는 원래 없는 것입니다. 엑스는 우변에 있는 값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변화할 수 있어서 변수입니다. 변화하는 것이기에 무어라고 이름 붙일 수가 없으니까 임시로 엑스라고 부릅니다. 엑스는 우변의 값에 따라서 자기가 그것을 가지고 와서 그 값이 되어버려요. 고정된 실체가 없는데 뭐라고는 불러야 하니까 편의상 엑스라고 이름 붙인 겁니다.

이 논리,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던 것 아닙니까? 금강경의 가장 기본적인 논리가 무엇입니까? 법은 법이 아니요 그 이름이 법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변의 값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임시로 표현하려고 하니까 편의상 엑스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과 논리가 똑같습니다.

이 논리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켜봅시다. 엑스의 자리에 ‘나’라는 이름을 붙여봅시다. 오른쪽에는 학생이라는 이름을 넣어볼까요? 이렇게 하면

변수 자리에 놓인 ‘나’

나 = 학생

이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우리나라 말로 풀면 ‘나는 학생이다.’라는 뜻이지요. 우변의 ‘학생’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 사람이 더 성장해서 군대를 가면 등식이 어떻게 변화합니까? ‘나 = 군인’이 됩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가지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면 ‘나 = 공무원’이 되고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면 ‘나 = 가장’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좌변의 나라고 하는 것은 편의상 붙인 이름이고, 우변의 정체성은 그때그때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체성의 실상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안다면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 “도대체 사는 게 뭘까?”, “요즘은 사는 낙이 없어.”와 같은 혼란스러운 질문은 힘을 잃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이 가져오는 번뇌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 인간은 정체성 자체가 나라고 착각할까요? 여러 정체성들이 그때그때 나라는 자리를 대신하고 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 아이의 엄마가 있습니다. 아이가 엄마 손을 필요로 할 때 이 사람은 아이에게 엄마로서 많은 것들을 해줄 수 있습니다. 힘들어도 보람이 있고요. ‘나는 엄마다.’ 라는 정체성에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성장하면서 엄마가 자기 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도 안 하고, 자기 방에도 못 들어오게 합니다. 아이 엄마로써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니 고통이 커지고 번뇌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엄만데. 너 하나만 보고 살아왔는데. 도대체 그동안 너에게 헌신한 내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번뇌에 휩싸이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곧 엄마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옳습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고 그 자리를 이런저런 정체성들이 그때 상황에 맞게 대신합니다. 이때 나라는 것이 원래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정체성 자체를 나 자신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정체성을 나로 믿기에 생기는 부작용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가장이다.’ 라는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이 나를 가장으로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집에 와도 자식들은 인사는커녕 집에 없는 경우가 태반이고 배우자는 뜨뜻미지근합니다. 가장이라는 권위를 세우고 싶은데 권위가 없으면 상대방에게 나의 정체성을 강요합니다. “내가 가장이니까 내 말을 들어!” 하고요. 이런 경우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케이스입니다. 내가 가장이라는 것을 나 혼자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가 하면 정체성이라는 것이 꼭 직업이나 소속, 역할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향하는 가치관이나 사상 같은 것들도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저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에 고려대장경을 전산화 하는 일을 무척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그때는 삶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고려대장경을 전산화하겠다, 우리나라의 새로운 대장경학을 세우겠다 하는 것으로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희한하게도 평생 가지를 않습니다.

어떤 시절 내 자신과 가치관을 같은 것이라고 믿고 일치시켜왔는데 시간이 흘러 그러한 사상(정체성)이 희미해지면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듭니다. ‘내가 왜 살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왔지?’ 라는 회의감에 괴롭지요.

현대는 정체성 상실의 시대이며 혼란의 시대입니다. 19세기 철학자인 니체가 이미 예견한 바와 같이 말입니다. 니체는 그 시대에 벌써 “21세기는 허무주의가 평범해져서 누구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가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삶의 목표가 결여된 상태를 말합니다. 왜 사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허무주의입니다.

“도대체 사는 게 뭘까?”, “요즘은 사는 낙이 없어.”, “내가 이런 대접이나 받자고 열심히 살아왔나.” 하는 말들이 니체식 표현을 빌리면 허무주의에 다름 아닙니다.

니체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 ‘신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때까지 서양사회를 지배하던 정신, 질서, 문화 이런 것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말입니다. 당시까지 서양을 지배하던 핵심 사상인 기독교가 붕괴되었으니 이제 사람들은 허무주의에 빠질 것이라고 예견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삶 자체를 지배하던 문화였는데, 이런 문화가 사라졌으니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체성을 가지라’는 말… 참일까 오류일까?

요즘 자기계발서나 처세술 강좌를 보면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쏟아라. 하고 싶은 일에 올인하면 설령 실패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혹은 “나는 나답게 살아야한다.”, “너 자신이 되어라.” 이런 이야기 말입니다. 맞는 이야기일까요?

1. 당신이 원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하라.

내가 무언가를 원해서 열정적으로 임할 수도 있고, 내가 원하는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 될 수도 있지요. 내가 그 원하는 것과 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현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시대의 정체성은 마치 마트에서 물건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체성을 진열해놓은 마트가 있어요. 거기에 가면 학생, 공무원, 연예인, 유튜버 등의 상품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골라 나의 정체성 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부모의 신분과 정체성을 그대로 세습하는 사회였다면 요즘은 진열된 상품 중 하나를 고르는 시대입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제 주머니 사정입니다. 부모님의 경제적 능력이 내가 살 수 있는 정체성의 한계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하라는 말은 현실에서 큰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2. 너다운 삶을 살아라.

‘~답다’라는 말은 본질을 말합니다. 그런데 앞서 우리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본질이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부처님께서 이미 ‘나의 본질은 없다’고 규명했습니다. 나다운 것을 아무리 찾아봐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원효스님 말씀을 빌려 동쪽으로 가고자 하면서 몸은 계속 서쪽으로 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내 자신이 됩니까. 그런 이야기는 올바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참된 불자의 정체성은?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참된 불자란 무엇입니까? 불자의 정체성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참된 불자라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마치 마트에서 정체성을 사듯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불자의 정체성을 갖추는 방법이 있습니다. 불교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포교사 시험을 봐서 합격을 하고 오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때가 되면 법회에 참석하는 등 불자로서 가져야 될 소양들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런 불자는 성실한 불자입니다.

그런데 성실할지언정 참된 불자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은 마트에 진열된 불자라는 정체성을 사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성실한 불자가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신행하는 것도 일시적인 효과가 분명히 있습니다. 신도증만 받고 불교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불자보다는 훌륭하고 신실한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불자로 살면 반드시 어느 순간 회의가 옵니다. 세상 일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절에 열심히 다니는데 내가 왜 절에 열심히 다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스스로에게 할 수 없습니다. 마트에서 파는 정체성의 한계입니다.

마트에서 파는 정체성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마음이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비록 이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 진리를 깨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내 안에 부처님이 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내 안의 부처님이 하듯 부처님처럼 행동해야 하고 부처님처럼 말을 하고 부처님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혀서 고민이 될 때는 ‘만약 이 상황에서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라고 생각하고 그 대답에 준해서 행동하면 됩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게 진정한 불자이기는 한데, 여기에서 그치기에는 조금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출가를 했건 하지 않았건 불제자라면 항상 깨우침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체성은 없다, 나의 행이 그대로 부처

그런데 위에서 말한 불자는 진실된 부자로서 살 수는 있으나 깨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를 해야 합니다. 부산 관음사에 가면 제 은사스님이신 송광사 전 방장 보성스님이 써놓은 글귀가 있었습니다.

夜夜抱佛眠(야야포불면)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朝朝還共起(조조환공기)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네

내가 부처다, 마음이 부처다 라는 이야기의 다른 표현입니다. 참된 불자로서 업그레이드를 하려면 이러한 깨침의 도리를 언제나 지향해야 합니다. 내가 따로 있고 정체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좌변에 엑스인 내가 있고, 우변에 정체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부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내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본질이 뭘까 고민할 게 아니라 매 찰나 나의 행 그 자체가 바로 부처라는 마음으로 순간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불자의 모습이며 참된 불자의 정체성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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