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불교)의 여러 가지 모습

하나의 종교에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불교도 그렇다. 혹자는 불교를 수행 시스템이라고 하고, 포교 현장에서는 기복신앙의 모습을 목도하며, 일상 행동의 기준 즉 실천윤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합쳐진 모습의 불교가 불교로 역할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불교의 얼굴 가운데 내가 아는 모습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습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불교의 여러 면면을 하나의 뿌리로 융합해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별한 공간과 신성한 시간 속에서 일상의 불안함을 떨쳐내고, 신성한 의식을 일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실천윤리로써의 불교가 등장하며, 윤리를 관철시키기 위한 힘으로써 절대적인 존재를 성정하게 되는 일련의 사이클을 이해할 때 불교의 여러가지 모습을 큰 틀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기도, 기복, 수행, 윤리, 의지

오늘의 불교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여러 가지 불교가 서로 너무 다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통하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런 불교 저런 불교: 수행 시스템

제가 아는 불교는 수행입니다. 열심히 수행해서 깨달음을 증득해서 부처가 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저는 불교를 수행시스템이라고 10년 넘게 알고, 이해하고, 수행했는데요. 스님들과 생활하다가 포교 일선에 나와서 신도님들과 마주하다보니 신도님들이 생각하는 불교의 모습이 달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 말사에 주지 부임을 했을 때 신도님들이 원한 것은 부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이해가 안 됐습니다. 별 생각 없이 기복신앙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때가 되면 부적을 써서 삼재막이를 하고, 동지가 되면 동지기도를 올리고, 정초가 되면 정초기도를 올리고, 백중이 되면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지만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때가 됐는데 뭔가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좀 불안합니다.

이런 불교 저런 불교: 기복신앙

기복신앙을 쉽게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기도를 하면 부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하는 분들도 많지요. 그런데 수능 기도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내 자식이 전남외대에 가고 싶어 하는데, 오백전에 와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꼭 전남외대에 붙으라고 하는 현실적인 기대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내 자식이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을 보는데 엄마로서 나도 무언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엄마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을 현실적인 기대나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측면에서 더 확장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행시스템으로써의 불교, 기복신앙으로써의 불교만 있을까요? 더 있습니다. 얼마 전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젊은 친구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불교도는 아니지만 불교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불교는 기독교나 타 종교와는 다르게 내가 행동을 할 때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 같다”고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불교 저런 불교: 실천윤리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실천윤리’입니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기준,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남에게 베풀고 살아라, 자비심을 가져라 등등의 가르침이 행동의 기준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의 불교는 하나의 실천윤리가 됩니다.

언젠가 인도와 남아시아를 연구하는 학자가 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업차 인도에 가면 제일 당황하는 것이 인도 사람들이 처음 묻는 질문 때문인데요, 그 질문이 바로 종교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55%가 무교입니다. 절반 이상이 믿는 종교가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이 무종교인이 종교가 없다고 대답하면 인도사람이 상당히 불쾌해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개냐? 사람이 어떻게 종교가 없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 사업 한다고 인도에 가자마자, 파트너를 처음 만나자마자 분위기가 어긋나버리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인도인이 생각하는 종교와 우리나라 사람이 생각하는 종교가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는 믿음, 신앙, 간절함, 신을 향한 복종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종교는 생활 방식입니다. 저 사람이 무슬림이라면 저 사람과 밥을 먹을 때는 메뉴에서 돼지고기를 빼야 하는 것. 그것이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종교의 호불호를 논하거나 종교의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요, 저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느 종교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 종교를 묻습니다. 인도에서 종교는 삶 그 자체이고, 내 생활의 반경을 결정해주는 것입니다. 템플스테이에 온 젊은 친구가 ‘불교가 행동의 기준을 제시한다’고 한 말이 인도인들의 이런 종교관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면요. 첫 번째, 불교는 수행 시스템입니다. 둘째, 불교는 기복신앙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관습적으로 행하는 내 삶의 영역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불교는 내 삶의 실천윤리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불교의 모습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모습도 있습니다.

신불습합神佛襲合의 일본 불교

지난주, 3월 일본불교순례를 앞두고 현지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나라 외곽에 법륭사라는 절이 있고, 이 안에 성덕전이라는 전각이 있는데요. 일본이라는 나라의 틀을 처음으로 만든 성덕태자를 모시는 전각입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법륭사라는 절은 우리나라로 치면 불국사 정도 되는, 통일신라 때쯤 만들어진 엄청나게 오래된 절입니다. 이 절은 성덕종이라고 하는 종파의 총본산이기도 한데요. 성덕종은 성덕태자를 신(神)으로 모시는 종파입니다.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기 때문에 신인데 관세음보살의 화현이기도 합니다.

‘아니. 불교인데 왜 부처님이 아닌 실존인물을 신으로 모실까?’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요. 일본불교는 일본의 토속신앙인 신도와 거의 하나라고 보면 됩니다. 신도의 특징은 자기들이 생각할 때 위대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이 죽으면 사당을 짓고 이 사람을 신으로 숭배합니다. 한일관계에서 야스쿠니 신사가 문제가 되는 것도 이 지점에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전쟁에 나간 사람들을 신으로 모십니다.

성덕태자의 경우 역사적인 인물과 신과 관세음보살이 하나의 상에 다 모여있습니다. 불교의 이름으로 성덕태자를 숭배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일본불교의 특성을 신불습합(神佛襲合)이라고 합니다. 신도의 신과 부처의 불이 서로 흡수되고 합쳐져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일본불교의 중요한 특징이며, 이런 불교도 불교인 것입니다.

서로 다른 얼굴의 불교를 융화하다

서로 다른 모습과 얼굴을 가진 불교를 우리는 어떻게 하나의 불교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누군가는 기복신앙을 볼 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돈만 내고 소원 비는 것은 불교에 처음 발을 들일 때나 그렇게 하는 것이지 공부가 깊어지면 기복신앙을 버려야 해. 그리고 수행하는 불자로 나아가야 해.”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기복신앙은 없어져야 할 대상이 됩니다. 수행하는 불교만 진짜 불교라면 우리나라 불교의 80%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또 생활윤리로써의 불교만 진정한 불교라면 나름대로 불교적으로 살되 절에는 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따로따로 생각합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법당에서 기도할 때 대웅전에 있어도 관세음보살님을 찾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전각에서 왜 관세음보살님을 찾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수행해서 깨달으신 분이라 소원을 말하기가 조금 면구스러우니 친근한 관세음보살님을 찾습니다.

이처럼 불교에 여러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머릿속에서 하나로 합쳐지지 않고 각각등보체하고 있습니다. 내 안의 불교가 이렇게 파편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뿌리로 자연스럽게 합쳐져야 합니다.

신성한 공간과 시간에서 일상의 불안을 다스리다

앞서 말사 주지로 갔을 때 신도님들께 부적을 드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인상은 ‘부적을 받아서 뭔가 원하는 소원을 빌려고 하는구나.’라는 것이었는데요.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때가 되면 부적을 쓰고 때가 되면 기도를 올려야만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동지기도를 해서 원하는 소원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때가 되면 기도를 올리는 것이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있는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 분들은 왜 부적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기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 손자들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잘 안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을 다스리는 방법인 것입니다.

부적을 쓴다고 해서 날 사고가 나지 않고, 붙을 시험이 붙지 않는 것이 아니라요. 내 자신과 내 가족, 내 생활에 애정과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따라오는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서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방법으로 일정한 장소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의 나는 일상의 내가 아닙니다. 일상의 나는 항상 자식들을 걱정하는 나인데, 동지기도를 하는 시간 동안의 나는 무언가 성스럽고 신성하고 종교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내 안의 불안이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는 자식들에게 험하게 말하고 잔소리를 하다가도 절에 오면 부처님 앞에서 얌전해지고 좋은 말만 쓰게 됩니다. 일상에서의 나와 종교공간 안에서의 내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신성한 공간에서 가지는 마음을 일상으로 연결하기 위해서 가지는 것이 말하자면 계율입니다.

신성神聖을 일상으로 가져오는 장치, 실천윤리

신성한 공간에서 신성한 의식을 하면서 내 마음 속 불안을 다스릴 때, 평상시에도 내 마음을 다스리자며 나온 것이 일종의 실천윤리입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내 행동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 같다면, 그 이유는 앞의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절에서 예불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평상시에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방편으로 실천윤리라는 부분이 부각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한편, 실천윤리로써 살생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도 살생을 할 수 있습니다. 살생을 했다고 해서 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라는 것은 가이드라인입니다. 가이드라인이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가이드라인을 어겼을 때 벌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어겼을 때 양심의 가책, 죄의식 같은 것이 따라와야 합니다. 이런 것이 나오는 가장 대표적인 통로가 신입니다.

실천윤리의 가이드라인, 계율

살생을 하면 안 된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는데 내가 살생을 했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지요. 불교에서는 그다지 강하지 않지만 이슬람이나 기독교에서는 신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실천윤리가 작동하려면 가이드라인을 통제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이라던가, 유교 같은 경우에는 엄격한 전통과 같은 통제장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의 종교가 완성되는 데는 성스러운 의식, 성스러운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불안을 다스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의식을 일상생활로 확장시키다보니 실천윤리로써의 종교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윤리가 일상적으로 관철되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하는데, 힘을 부여하기 위해 절대적인 존재나 가치관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수행 시스템이 가장 크게 대두됩니다. 수행 시스템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세속을 떠나 오로지 수행하는 사람들로 일반 재가자와는 엄격하게 분리되었습니다. 출가자들은 삶 자체가 신성한 공간 속에서 신성한 의식을 하며 신성한 시간으로 흘러갑니다. 삶이 곧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 출가자들은 가족이나 친지와 완전하게 떨어져서,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생길 수 있는 애착을 떨쳐내고 별도의 공간에서 별도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수행 시스템이었습니다.

출가자의 수행, 재가자의 수행

요즘 현대사회는 2,500년 전과는 전혀 다릅니다. 과거에는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왕이나 귀족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생활이 윤택해져서 조금만 일해도 내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착각을 합니다. 출가를 하지 않아도 수행 시스템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출가자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있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삶과 완전히 절연한 사람입니다.

왜 출가자는 머리를 깎을까요? 부처님 당시 고대 인도사회에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머리를 깎았습니다. 머리를 깎은 사람이 있으면 ‘아, 저 사람은 부모님이 돌아가셨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삭발은 그 부모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다시는 부모를 볼 수 없다는 표시였습니다. 부모가 살아있는데도 삭발을 한 것은 부모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내 가족과 완전히 이별을 했다는 표시입니다.

시간이 남아서 수행을 한다는 요즘 생각과는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인도사회에서 수행자들은 내가 신이 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수행자라 함은 세속적인 공간을 떠나 신성한 공간에서 수행을 일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출가자는 모든 일상이 성스러운 공간에 있는 사람이며, 재가자는 평소에 세속에서 생활할 지라도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에 들어가서 세속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과 애착 같은 것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불교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서로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를 언뜻 보면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뿌리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측면이라고 하는 바탕 위에서 불교의 서로 다른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행 시스템으로써의 불교만 이해한다면 종교로써의 불교는 배제되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으로써의 불교만 이해한다면 내 스스로 수행하고자 노력하는 불교의 모습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불보살님의 힘을 강조하는 타력신앙으로만 불교를 본다면 스스로 부처가 되겠다는 노력을 배제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렇게 불교의 여러 가지 모습을 큰 틀 속에서 이해하자는 이야기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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