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란 무엇인가?

현대인들이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이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나’라는 존재 그 자체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답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답이 없으니까 고민을 한다. 이 말을 서양철학자들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표현했다.
나라는 실체를 상정하는 오류에서 고민과 불안이 나온다. 이런 근본적인 오류를 위로하기 위해 종교가 등장했다. 신이라는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하고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위로한다.
불교는 신을 상정하지 않고 스스로 수행을 통해 고통의 완전한 종식에 이르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종교면서 종교가 아닌 종교다. 세상 모든 일이 신의 뜻이 아니라 연기임을 깨달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수행해야한다는 것의 불교라는 종교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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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n51IycpoxdA

불교는 종교

2021년 증심사 온라인 불교학당 첫 번째 주제는 ‘종교란 무엇인가?’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불교가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불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종교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가 왜 탄생했는지, 과학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21세기에도 여전히 종교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불교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종교라는 범주에 딱 들어맞는 것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요? 더 근본적으로는 과연 인간에게 종교란 필요한 것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원시인들이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자연의 위력 앞에 살아남기 위해서 종교를 탄생시켰다고 말입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원시시대가 아닙니다. 자연재해나 기아, 기근, 역병, 전쟁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리는 시대가 아닌 21세기, 지금 이 시대에 종교가 필요한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람들의 네 가지 고민 

 가지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겠습니다. 템플스테이 등으로 절에 와서 이야기를 나눈 분들의 고민을 분류하자면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어떻게 하면 화를 안 낼 수 있을까?’ 화를 내면 나도 힘들도 상대방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싶지 않은데 화가 불쑥불쑥 나니까 그것도 힘들다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나는 자존감이 너무 낮아.’ 자존감이 낮아서 내 자신이 싫고 모든 일이 힘들고 대인관계가 힘든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시험 공부를 오래 하고 있는 청년들의 사례가 많습니다. 

세 번째,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항상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고 편치 못합니다. 조금만 정신적인 여유가 있으면 걱정거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웁니다.

네 번째,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의  젊은 친구들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지 잘 모르겠어.’ 라는 고민을 토로합니다.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아야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할 텐데,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고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 고민들을 하나씩 짚어봅시자. 

내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첫 번째, 어떻게 하면 화를 안 낼 수 있을까? 화를 내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간단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다 되면 화를 낼 일이 없습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경험을 많이 할수록 화를 많이 내게 되고, 작은 일에도 상습적으로 버럭하게 됩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화를 참지 못하는 분노조절장애, 혹은 반대로 무기력증이나 우울증 같은 병적인 상태로 진행되기도 쉽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은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고통스러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답답한 것, 이것이 고민입니다. 괴롭지 않으면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왜 화를 내는가? 내 뜻대로 안 되니까 화를 냅니다.

두 번째, ‘나는 자존감이 너무 낮다.’ 첫 번째 경우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경험을 어릴 때부터 많이 했거나, 무엇을 하려고 할 때마다 주변에서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들이 쌓이면 지레 포기하게 됩니다. 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서 실행한 경험이 별로 없고, 그나마 무엇을 해도 뜻대로 잘 안 되니까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자존감이란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스스로를 존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존감은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형성됩니다. 자존감의 기저에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감이 부족하니까 자존감이 낮고, 또한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니까 자신감도 잃게 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결국 두 번째 문제의 원인도 결국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세 번째,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잠시라도 한 가지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걱정거리들이 줄을 잇는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생각이 많은 것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걱정하는 것은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미래의 상황을 미리미리 생각해서 대처하기 위함입니다. 대비를 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서 가설에 따른 대책을 여러 갈래로 그려보고 예행연습을 해야 하니다. 이는 내 앞에 닥칠 미래가 확실하지 않고 불투명한기 때문이죠.

 만약 어떤 사람이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한 확신이 있을 것입니다. 나의 이런 행동에 저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나마 덜합니다. 자신감이 낮을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은 커집니다. 내가 나의 미래를 결정하고 책임지지 못하니까 모든 상황이 다 불안한 것입니다. 생각이 많은 것은 모든 상황을 다 걱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내가 뭘 하고 싶은 지 모르겠다.’ 젊은 친구들은 이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뭔가를 하려면 그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욕망해야 한다’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할 때, ‘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발전해서 ‘공무원이 되겠다’라는 의지가 나오고, 이러한 의지가 있어야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준비 즉 실천을 하며, 실천을 해야 미래에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어떠한 결과가 나옵니다. 

즉 욕망이 있어야 의지가 나오고 의지가 있어야 실행을 하고 실행을 해야 미래를 주도할 수 있다고 막연하고도 본능적으로 생각합니다. 왜 미래를 주도하고 싶어하는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고 싶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본능적으로 욕망에 대한 강박으로 발현합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내가 생각한대로 나의 미래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사회에 나가서 직업을 가진다거나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더더욱 무언가를 욕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일종의 선입견입니다.

확고한 욕망이 없다는 것, 뭔가를 뚜렷하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내가 볼 때는 오히려 정상입니다. 일반적인 경우에 사회생활이나 인생의 어떤 경험도 없이 어떻게 ‘나는 공인회계사가 되고 싶다’라고 확고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이러한 욕망은 몇 가지 피상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판단에 불과합니다. 미래를 이미 다 설계해 놓고 그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않는 이상은 욕망이라는 게 생기기 힘들 것인데, 처음부터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 놓고 시작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딜레마는 결국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고민의 2대 요소, 나와 불안 

이처럼 현대인들이  이런저런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라고 하는 놈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시시대에 살고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고민을 하기 전에 우선은 배가 고프니까 먹어야 하고, 맹수에 쫓기거나 싸워야 하고, 따뜻한 잠자리를 확보해야 하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기본적인 생존이나 의식주 해결에서는 어느정도 자유롭기 때문에 이런 고민들을 하는 것입니다. 

고민의 2대 요소는 ‘나’와 ‘불안’ 입니다. 괴로우니까 마음이 답답하고, 정신적인 고통이 또 다른 고통을 계속 유발해냅니다. 앞서 이야기 한 분노, 자존감 상실, 무기력 등 고민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괴로운 정신적인 고통의 산물입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이 ‘나’와 결합하면 필연적으로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괴로움을 자각하는 상태가 고민입니다.

한편 우리는 고민을 해서 해답을 얻는다고 착각합니다. 고민을 해서 확실하게 무언가 해결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딴짓을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청소를 하다가, 빨래를 하다가,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민을 한다는 것은 단지 내가 지금 괴롭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괴롭구나.’ ‘괴롭다.’ ‘괴로워.’  스스로 괴롭다고 계속 자기 최면을 거는 것입니다. 

커피는 언제 내가 되나

이번에는 ‘나’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내가 지금 커피를 마시면 이 커피는 어느 시점부터 내가 될까?’

  커피를 마시면 커피라는 액체가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 커피가 입술에 닿는 순간 내가 됩니까? 커피를 입안에 머금고 있을 때 나의 일부가 되나요? 커피가 식도를 타고 위 안에 들어갔을 때의 상태를 나의 일부라고 봐야 할까요? 커피가 분해되어서 대장, 소장, 간으로 갔을 때 내 몸의 일부인가요?

커피를 마시면 이 커피도 어느 순간에는 내가 되는데 언제부터 내가 되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경계가 불분명합니다. 상식적으로 입안에 머금고 있는 액체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장 안에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내 몸속으로 흡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닙니다. 소화효소가 커피를 분해해서 몸속 여기저기에 어떤 것은 물로 어떤 것은 카페인으로 돌아다닌다 하면 그게 나인가요? 카페인이 나인가요? 물방울 하나가 나인가요?

그렇다면 손은 어떤가요? 이 손은 나인가요? 이 손은 ‘나의’ 손이지 ‘나’는 아닙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을 뿐이지 나 자체는 아닙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내가 무엇인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요즘 몸이 안 좋아.’ 라고 이야기할 때 몸이란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 몸인데, 나 자체는 아닙니다. 몸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이 나지 어떻게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말이 되지 않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 무언가 문제가 있으니까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본질, 의자가 의자인 이유 

다음으로는 ‘불안’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우리를 정신적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불안인데, 불안과 욕망은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욕망이 불확실한 미래를 내 뜻대로 주도할 수 있게 하며 그렇게 하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원해야만 불안이 사라지기 때문에 욕망에 대한 강박관념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20세기를 풍미했던 현대철학 실존주의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의자라는 것이 있입니다. 나무로 된 의자도 있고 쇠로 된 의자도 있고 길다란 의자도 있고 한 사람이 앉는 의자도 있입니다. 카페에 가면 나무 토막을 의자로 쓰는 곳이 있습니다. 밖에 있을 때는 그냥 나무조각인데 테이블 옆에 두면 의자가 됩니다. 

‘저것이 의자다.’라고 말하는 것은 저 무언가가 가진 본질, 저 무언가가 존재하는 이유, 저 무언가의 존재의 목적이 의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저 무언가는 사람들이 앉기 위해서 존재한다’, ‘저 무언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앉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의자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이고 본질입니다. 

주변의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본질이 있습니다. 의자는 의자의 본질이 있고, 마이크는 마이크의 본질이 있습니다. 컴퓨터는 컴퓨터의 본질이 있기에 증심사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서 비치해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본질이란 A를 A이게끔 하는 그 무엇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이게끔, 사람을 사람이게끔 하는 그 무엇은 무인가? 학교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고 배웁니다. 그러나 인간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나 고양이, 돌고래도 생각하고 심지어 새도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라는 명제는 어떨까요? 원숭이도 인간만큼 도구를 사용합니다. ‘인간만이 종교를 가진다’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랑우탄도 인간이 볼 때 종교의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행위를 한다고 합니다. 과연 인간만이 가진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게 되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나의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렇게 자문하는 시기가 반드시 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내 삶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인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의 핵심이 바로 본질입니다. 인간 그 중에서도 특히 남이 아닌 나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내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답이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다. 왜 답이 안 나오나요? 답이 없으니까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이라는 것은 바로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이 자체입니다.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실존입니다. 내가 여기에 그저 있는 것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서, 목적이 있어서, 나의 본질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사는가? 인생이 무엇인가? 백날 물어도 답이 없습니다. 정답이 없는 문제를 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를 푸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정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풀어도 답이 나오지 않기에 부처님은 문제 자체를 풀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풀고자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출제자의 의도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나는 이런이런 이유를 가지고 지금 이 상황에 21세기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저는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날 때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데에는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습니다. 그냥 사는 것입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주도적으로 능동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피동적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것을 피투성(被投性)이라고 표현합니다. 삶의 본질은 피투성입니다. 인간은 마치 누군가 휙 내던진 것처럼 내던져진 존재입니다. 이처럼 인간 삶은 실존이 본질에 앞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하죠.

‘나’가 있으므로 삶은 불안한 것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하면 농담삼아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래 인생의 본질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삶이 본질이므로 미래가 불안한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런 의문을 가지는 순간부터 삶이 불안해집니다.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느끼는 순간부터 삶은 불안의 구렁텅이로 빠져듭니다. 

생존하려면 나라는 존재를 항상 인지하고 살아야 하는데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불안은 항상 우리를 따라옵니다. 그러니까 삶은 원래 불안한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건 원래 정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정답이 원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잘 푼다고 해도 틀린 것입니다. 정답이 없는 시험 문제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언가를 그냥 하라고 말입니다. 이걸 해야 하나, 저걸 해야 하나, 저 사람이랑 결혼을 해야 하나, 올해 결혼을 해야 하나 내년에 해야 하나. 고민은 많고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면 일단 합니다. 일단 하고 그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답이 없으니까 이게 정답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답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실존주의입니다. 피투성을 극복하려면 기투성(企投性)을 가져야 합니다. 기획해서, 스스로 주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인간은 피투된 존재지만 기투된 존재라는 것이 실존주의의 두 번째 핵심입니다. 기투된 존재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어차피 인생에 정답은 없으니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뭔가를 하라는 겁니다.

실체를 상정하는 오류 

철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가 지금에 와서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현상을 잘 지적했지만 삶의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에도 종교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실존적인 불안, 우리 삶을 반드시 따라다니는 불안, 우리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데서 오는 근본적인 불안이 우리로 하여금 종교를 가지게 만듭니다. 

이런 불안은 또 한편으로는 실체를 상정하는 인간 사유의 오류에서 옵니다. 나라는 놈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저것을 잡을 수 있는지 없는 지를 판단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사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과를 먹는 실천을 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체를 상정하는 오류입니다. 

‘저기에 사과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생각의 패턴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패턴이 또 우리로 하여금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와 고통을 받습니다. 저곳에 무언가가 있다라는 실체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삶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인정을 하되 거기에서 어떤 것들이 따라오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실체를 상정하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오류에서 종교가 등장합니다. 그것을 위로할 수 있는 종교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절대적인 존재인 신을 상징하며, 이 절대적인 존재와 합일하는 방식으로 인간이 가지는 근본적인 불안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인도철학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인 브라만과 개인적인 나인 아트만이 하나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며 해탈로써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서구의 기독교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에 복종하고 신에게 내 자신을 온전히 바칠 때 인간의 원죄, 우리의 잘못, 두려움,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종교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종교에서 과학까지 

이렇게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했는데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합니다. 과연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정말로 전지전능한가? 종교가 종교에 머무르면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학문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절대적인 존재는 유일신인가? 절재적인 존재는 우리와 같은 형태인가? 

절대적인 신의 존재 방식에 학문적으로 접근한 것이 서양철학입니다. 존재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2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서양철학이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범신론, 범재신론, 이원화론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핵심은 존재론과 인식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속으로 생각하고 철학을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보고 듣고 확인할 수 없으니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접근을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과학이 등장합니다. 신이 존재하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원자가 나옵니다. 원자를 깨보니 전자도 있고 핵도 있습니다. 핵을 깨보니 양성자, 중성자가 나오고 그것을 깨면 소립자가 있습니다. 

세상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과학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다보니 현재는 양자역학의 영역까지 도달했습니다. 이처럼 종교가 탄생하고 종교의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 철학이 발달하고 철학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 과학이 등장했고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그렇다면 불교란 무엇이며 불교와 종교는 어떤 관계인가? 불교의 핵심은 고통의 완전한 종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완전한 종식을 위한 체계,시스템, 가르침이 불교입니다. 이 문장만 놓고 보면 제일 처음 언급했던 종교의 탄생 이유와 일치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를 가지게  그 무엇과 일치합니다. 

해탈은 고통의 완전한 종식입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인도사회 모든 종교인들이 추구하는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 싯다르타 이전의 해탈과 고타마 싯다르타 등장 이후의 해탈은 그 해석이 다릅니다. 

싯다르타 이전에는 고통을 정의하기를 윤회하는 삶 자체를 고통이라고 봤습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벗어나야만 고통이 완전히 종식되며, 고통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방법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절대적인 존재인 브라만과 개인의 아트만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싯다르타는 해탈하려면 열반에 들어야 하며, 열반에 든다는 말은 번뇌의 완전의 종식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번뇌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이 열반이며 열반하는 것이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윤회하는 삶 자체를 벗어나는 것 내지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존재와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완전한 종식이 해탈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싯다르타는 기존의 해탈과 당신이 주장하는 해탈을 차별하기 위해서 열반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쓴 것입니다. 열반, 니르바나라는 용어는 불교 고유의 용어입니다. 

싯다르타는 열반을 하기 위해서는 번뇌하는 내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이 사실을 깨달으면 그게 바로 열반이라고 말했습니다. 

존재한다는 것. 컵이 존재한다, 의자가 존재한다, 내가 존재한다, 세상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착각일 뿐이며, 이런 착각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불러일으킨다고 설했습니다. 존재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오직 연기할 뿐입니다. 부처님은 이 사실을 깨달으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삶의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존재하지 않고 연기한다 

깨닫는다는 것은 뿌리 깊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착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착각,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착각만 털어내면 그때부터 불행 끝 행복 시작이이라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고 연기한다는 것이  불교사상의 핵심입니다. 

이제 불교를 종교와 비교해보겠습니다. 불교는 종교입니다. 종교가 탄생한 이유는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고통의 종식인데 불교 역시 이것을 목표로 합니다. 또한 종교의 3요소인 교주, 교리, 교단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교주가 있고, 팔만대장경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방대한 교리, 그리고 2500년이 넘도록 유지하고 있는 교단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불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 절대자, 초월자, 궁극적 실체, 전지전능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핵심은 연기입니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나아가 궁극적인 제1의 근원적인 존재를 인정한다면 불교의 가장 핵심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당에 부처님은 무엇이고 관세음보살님은 무엇인가? 신이 아닌가? 이런 분들은 불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인도문화와 종교관의 외피를 쓴 것입니다. 불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신적인 모습을 한 존재를 수용한 것입니다. 

종교이면서 종교가 아닌 것

위의 두 가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합치면 불교는 종교이면서 종교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의 핵심은 종교가 아니지만 종교의 외피를 쓰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불교는 철학이 아닙니다. 철학은 학문입니다. 궁극적 실체에 대한 학문적 탐구만을 해서 고통의 종식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학문적 탐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종교라 하는 것도 학문적인 체계가 아니라 인간에게 삶의 지침을 제공합니다. 윤리적인 지침.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살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음행하지 마라,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종교는 인간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종교인의 의무는 삶에 충실한 것이고 충실하지 못하면 죄를 짓는 것이며 죄를 지으면 참회해야 합니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실천지침을 주고 윤리와 도덕성을 부여합니다. 종교는 실천입니다. 불교도 학문이 아니라 종교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삶의 실천적인 지침을 제공합니다. 어떤 실천 체계인가? 첫 번째 나를 바꾸는 수행 시스템으로서의 실천체계고 두 번째는 우리 삶의 윤리적인 지침과 도덕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실천체계입니다. 

불교는 나를 바꾸는 수행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깨달아 고통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에는 윤리 기준이 확실하게 존재합니다. 수행은 하나의 실천이기 때문에 계율이라고 하는 도덕적, 윤리적 지침을 강조합니다. 

불교의 핵심은 수행

불교는 종교적인 외피를 분명히 쓰고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으며 중요한 부분입니다. 종교의 외피를 쓰고 있다는 말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나도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나도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 불교의 목표입니다. 이것이 종교적 외피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나를 바꾸는 수행이 시스템, 즉 실천체계입니다. 

인간의 삶은 왜 고통스러운가에서부터 출발한 이야기가 이렇게 불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불안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라는 게 나왔습니다. 절대적인 존재에 복종하거나 절대적인 존재와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우리가 가진 불안을 털어내려고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불교는 종교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착각을 바로 잡으면 고통이 해결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지침으로 삼아 수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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