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문 해설 3

부처님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무명에 빠져 사는 것은 말세의 특징이 아니라 중생들의 원래 살아가는 모습이다. 중생들은 연기법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인연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인과업보의 도리를 알지 못하기에 몸뚱아리가 ‘나’라고 철석같이 는다. 이러한 무명에서 교만이 싹트고, 이러한 무명에서 전도몽상의 삶을 살아간다.
깨닫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기에 오직 수행하고 금생에 마음을 밝히는 것으로 은덕을 쌓아야 한다.

#무아, 수행, 연기실상, 의지

혼탁함, 말세의 특징? 중생의 특징?

말세가 되니 부처님 당시와는 멀어져 마군은 강해지고 불법은 점점 약해져서 꾸미는 이만 많아지고, 도를 이루게 하는 이는 적고 망치게 하는 사람은 많으며, 지혜 있는 사람은 적고 어리석은 자는 많아 스스로 도를 닦지 않은 뿐만 아니라 남을 번뇌케 하나니, 수행을 방해하는 갖가지 인연은 말로 다 할 수 없느니라.

말 그대로 세상이 말세입니다. 점점 깨닫기가 힘들어집니다. 말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부처님 당시와 멀어지니 불법은 약해지고 불법을 방해하는 마군은 많아집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적고 어리석은 무명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꼭 말세에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원래 중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바세계에 부처님이 태어난 후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중생들을 교화하면서 당대에 깨친 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사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런 부처님 법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이지요.

이 말은 사실 부처님 사후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원래 우리들의 모습, 원래 중생들의 모습이 또렷해진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중생들은 이런 모습일까요? 도를 이루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어리석고, 남을 번뇌롭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부처님이 말한 대로 전하자면, 우리가 이렇게 사는 이유는 무명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무명에 빠져 연기실상을 알지 못하는 것이 중생

무명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뭘 몰라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연기법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인연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인과업보의 도리를 알지 못하니까 사람들은 이 몸뚱아리가 ‘나’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나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삶의 기본적인 이유와 목표가 되다보니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남을 힘들게 하고, 깨닫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부처님께서 이야기하시기를 우리가 무명에 빠져서, 연기의 진리를 몰라서, 나라는 것이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대가 길을 잘못 갈까 하여 내 조그마한 소견으로 열 가지 수행의 문을 만들어 주인공에게 경책하노니, 반드시 믿고 실천하여 한 가지도 어김없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비는 바이라.

송하여 가로되 어리석어 배우지 않는 마음 교만만 자라고, 수행하지 않는 어리석음 아상과 인상만 키움이로다. 공부 없이 잘난 마음 굶주린 범같이 되고, 앎이 없이 게으르니 미친 원숭이 같이 되는구나. 삿된 말과 마구니 말은 넙죽넙죽 받아 듣고, 부처님과 조사 가르침 모른 채 외면하네.

깨달음에 인연 짓지 않으니 누가 건져주리오. 길이 악도에 빠져 괴로움이 몸을 얽는구나.

불교에서 어리석다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공부를 못한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실상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착각을 크게 해서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야심경에 ‘전도몽상’이라는 구절이 나오지 않습니까. 꿈 속을 살고 있는 듯 전도된 생각이지요.

무명은 교만의 씨앗

그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연기실상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이치를 모르면 멍청하게 사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교만만 자라납니다. 연기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내가 잘났다는 생각, 내가 최고다, 나는 잘났다는 생각이 커집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니까 남보다 내가 잘되어야 하고, 남보다 더 벌어야 하고, 내가 하는 생각은 모두 올바른 생각이고, 다른 사람들은 내 생각대로 해야 하고, 나는 남들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하고, 아프면 안 되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에 빠져서 사는 것은 부처님이 밝힌 연기실상의 진리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생각만 바뀌는 것이 아니고 습관이나 순간순간의 행동 그 모든 게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만이라는 것은 단순히 ‘싸가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의 일반적인 속성이 ‘내 생각이 맞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가지는 가장 큰 착각은 이 몸뚱아리가 나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나는 십 년 전에도 있었고, 이십 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십 년 뒤에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바탕인 가운데 교만한 사람도 있고 비굴한 사람도 있고 자신감이 유독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건방진 사람과 매사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마음 바탕에는 내가 잘났다는 무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원래 인간의 특성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부처님의 법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마음이 깨우쳐지지 않습니다. 아상과 인상만 커집니다. 어리석은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4상이 더욱 더 견고해집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상입니다. 아상이란 이 몸뚱아리가 나라는 착각입니다. 인상이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개나 고양이, 소, 돼지가 아니고 그보다 차원이 높은 인간이라는 생각입니다. 중생상은 깨달은 보살이 아닌 아직 깨치지 못한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수자상은 영혼 혹은 생명을 말합니다. 지금 있는 내가 죽어도 나의 영혼은 다른 몸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지금 이 육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혹은 생명이 있는 것, 즉 유정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술래인지도 게임인지도 모르는 술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놀이가 있습니다. 술래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술래 곁으로 다가가고, 술래가 돌아볼 때는 다른 사람들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놀이를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술래가 보지 않을 때 움직입니다. 술래는 움직이는 아이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게임의 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술래가 자신이 술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자기가 술래인지 모르는 술래입니다. 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술래 역할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아이들을 잡지 못하니까 평생 술래 역할만 해야 합니다. 자기가 술래인지도 모르고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도 모르고 그저 사는 게 이런가보구나 생각하며 평생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자는 자신이 술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부처님이 그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그 말을 믿고 술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고민하고 노력합니다. 술래 역할을 열심히 해서 아이들을 다 잡으면 더 이상 술래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지요. 깨닫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연기 실상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실제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고 분별할 수도 없고 이름을 지을 수도 없는 것이 실제 세계이고 연기실상의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는 마치 술래가 보지 못하는 순간에 움직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깨치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전도몽상의 세계

술래가 보는 연기실상의 세계는 멈춘 모습입니다. 술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한 연기실상을 고정된 이미지로 보는 것입니다. 술래가 뒤돌아보는 순간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돌아볼 때마다 모습을 달리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중생들은 고정된 이미지를 나누어서 이건 무엇이거 저건 무엇이다, 이름을 붙이고 분별해서 봅니다. 왜 이렇게 볼까요?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욕심과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그렇게 보게 합니다. 고양이가 먹이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먹이와 먹이 아닌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인식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분별과 인식의 바탕에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연기실상의 세계를 고정된 이미지 존재로써 바라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무명을 깨우치지 못하면 이런 생각이 굳어져서 있는 것을 없다 착각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합니다. 전도몽상입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으면 굶주린 범과 같이 주변에 악업만 행하고, 미친 원숭이 같이 나무를 왔다갔다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원래 우리가 자비심이 넘치고 이타적인 존재이다가 부처님 사후로부터 멀어지면서 이기심이나 교만심이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깨치지 못한 인간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중생들의 모습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이 중생세계에 오셔서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고, 그 길을 갈 것을 권하여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어 무명과 번뇌를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돌아가신지 오래되니까 이런 중생의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거듭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중생계의 법칙

첫째,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절대로 받지 말지니라. 밭 갈고 씨 뿌리어 입과 몸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소의 수고는 물론 벌레들이 죽고 상한 것이 한이 없거늘 남을 힘들게 하여 내 몸을 이롭게 하는 것도 옳지 못한데, 하물며 다른 목숨 죽여서 내가 살려는 일을 어찌 하겠는가?

농사짓는 사람도 늘 춥고 배고프며, 길쌈하는 아낙네도 몸 가릴 옷조차 부족하거늘, 두 손을 놀리는 내가 어찌 춥고 배고픔을 싫어하리오.

이것이 우리 사바세계가 돌아가는 실제 모습입니다. 어떤 생명체가 생존하려면 다른 생명체에 어떤 피해를 줘야합니다. 잡아먹던지 뿌리를 뽑아서 씹어 먹어야 합니다. 나무나 식물은 광합성을 하고 물을 빨아먹는데, 유정이라고 말하는 모든 동물들은 다른 생명은 죽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중생계의 법칙입니다.

자비심을 실천하기를 각오해서, 다른 생명에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고 나의 몸을 유지하고자 하면 굶어죽는 것이 사바세계의 법칙입니다.

다른 생명의 목숨을 취해서 나의 목숨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생명을 유지는 하되, 마음속으로는 측은지심,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항상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 없이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님들도 마당에 풀이 많이 자라면 풀을 뽑습니다. 풀을 뽑는 것도 살생이지요. 먹을 것도 아닌데 풀을 뽑아서 버립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과보를 받습니다. 풀을 뽑고 피할 수 없는 살생은 범하되 참회해야 합니다. 법당에 가서 절을 하던지 경전을 읽던지, 형식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풀에 대한 측은지심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의 은덕을 갚는 길은 오직 수행뿐

이어서 수행자의 기준에서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노동을 하여 먹을 것을 만들지 않고 남의 수고를 통해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데, 어찌 맛있고 좋은 것만 바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은 마땅히 시주의 은혜가 무거워 도를 덜어내고, 검소한 옷과 나물반찬은 은혜가 적어서 은덕을 쌓느니라. 금생에 마음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소화하기 어려우니라.

지금 생에 깨닫지 못하면 안 된다는 갈급함이 나타납니다. 깨닫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짓는 사람, 옷 짓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고생을 해준 은덕으로 수행자는 하루 종일 편하게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치를 생각했을 때 이번 생에 깨닫지 못하면 한 방울의 물이라도 목구멍에 넘어가겠느냐 하는 질책이기도 합니다. 수행자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나의 하루를 유지시키는 데에는 사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그리고 선업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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