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가을이 와 낙엽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낙엽은 사실 나뭇잎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일 뿐인데 우리는 왜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그 이유는 우리는 실제 세계를 보지 않고 마음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길에서 깨달은 것도 이와 같다.
원효스님의 ‘일체유심조’은 세상이 마음 먹은 대로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린 그림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데에 그 참뜻이 있다.
우리는 마음이 그린 그림을 실제 세상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낙엽이 아름답다. 연기실상을 깨친다는 것은 낙엽을 아름답게 보는 것이 아니라 낙엽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이 모든 세상이 다 연결되어 있고 그 실제 모습과 내가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삶이 완전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마음, 실상, 일체유심조

가을 단상

법당 밖은 벌써 단풍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종무소 옆 은행나무 잎은 초록빛에서 노란빛으로 연해지고 있고요. 가을이 아주 빨리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을이라 함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다 보면 언제 온지 모르게 스윽 다가왔다가, ‘이제 가을의 낭만을 만끽해볼까!’ 하면 어느샌가 찬바람으로 바뀌어 손발이 추워지는 겨울로 뒤바뀌어 버렸는데 말입니다. 올해는 그런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같습니다. 

오늘은 낙엽을 주제로 법문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흔히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요. 과연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아름답게 물드는 단풍을 바라보면 누구나 ‘참 아름답구나.’ ‘정말 멋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 아름다운 장면을 사진으로 남깁니다. 바쁜 일상 중에서도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인생이 뭔지, 산다는 게 뭔지 감상에 젖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우리는 단풍을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단풍이라 함은 이파리가 붉게 물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잎이 늙어서 병드는 겁니다. 여기 계신 나이 드신 보살님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 들어서 피부가 쪼글쪼글해지고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뽀얗던 피부에 검버섯이 핍니다. 이런 것처럼 단풍잎도 늙어서 변한 겁니다. 

낙엽, 나뭇잎의 노화

또 단풍이 붉게 물들어서 나무에 매달려 있으면 그런 대로 봐줄만 할 것 같은데, 추풍낙엽이라 하지 않습니까? 바람만 불면 우수수 떨어져 내립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단풍잎을 보면 ‘나무도 나처럼 나이가 들어서 저렇게 변해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왜 우리 사람들은 나뭇잎이 늙고 병든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너무 멋있다고, 구경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낙엽은 떨어진 이파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늙고 병들어 더이상 나무에 매달려 있을 힘이 없으니까 떨어져서 죽은 것입니다. 낙엽은 죽은 나뭇잎입니다. 그런 낙엽이 길에 깔려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센티메탈해지고 감상적이게 변합니다. 낙엽이 인간이라면 수천 명의 군중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장관이라며 감탄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왜 나무의 나무의 늙고 병들고 죽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사실은 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봄에 새순이막 나올 때 산의 신록이 가장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무의 생로병사에 아름답다고 극찬합니다. 

낙엽이 아름다워보이는 이유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의 생로병사는 어떻게 봅니까? 생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축하를 합니다. 그런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해서는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낙엽의 생로병사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가지면서 우리 자신의 생로병사에 대해서는 양극단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가질까? 그런 의문을 손발이 시려가는 이 계절에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이유는 단순합니다. 눈으로 보기에 빨갛고 노랗고 멋있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멋있게 보이니까 멋있게 생각합니다. 그 전에는 녹색밖에 없었는데 울긋불긋 온갖 색의 경연이 펼쳐집니다. 우리가 ‘본 그대로’ 느꼈을 뿐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어제 송광사에서 한 스님의 다비식이 있었습니다. 굳이 족보를 따지면 저에게는 조카뻘 되는 스님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근 20년간 동오스님과 동호스님이 따로 있는 줄 알았습니다. 동호스님은 1, 2년에 한두 번 정도 보는 스님이었습니다. 나름 선방을 열심히 다닌 스님이었고요. 

한 스님의 다비식

그런데 동오스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잘 모르는 스님이지만 죽고 사는 문제는 큰 문제이기이에 송광사 스님이 입적했다고 하자 전국각지에서 스님들이 모여들어 다비를 치렀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송광사 스님이라지만 지금까지 송광사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은 스님을 위해서 이렇게 지극하게 장례를 치러야 하는가?’ 

그런데 다비식에 가서 영정사진을 보니까 동오스님이 내가 아는 동호스님이었던 겁니다. 나는 있지도 않은 동호스님을 실제로 있다고 생각했고, 동오스님에 대해서는 큰절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이기적인 스님으로 매도했던 겁니다. 이름이 헷갈려서 다른 사람으로 생각했을 뿐이지요. 

어제 영정사진을 보기 전까지 나는 동오스님이 대해서 그렇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정사진을 보고 나서는 참 미안하기도 하고, 많은 나이가 아닌데 일찍 세상을 뜬 것에 대해서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동오스님이 입적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내 마음속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 봤습니다. 내가 본 대로, 기억하는 대로 느꼈는데 영정사진을 보기 전과 후의 내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이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효대사 해골물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오래 전에 원효스님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원효대사 해골물’ 일화를 잘 아실 겁니다.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 선진 불교를 배우기 위해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가는 도중 동굴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는데 한밤중 목이 말라 잠에서 깬 원효스님이 주위를 더듬거리다가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맛있게 마십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바가지가 아니고 해골이었습니다. 어제는 감로수였던 물이 오늘은 해골물이라니. 여기에서 크게 깨달은 원효스님은 당나라에 가지 않기로 하고 의상스님만 유학길 여정을 계속 갑니다. 

이때 교훈으로 내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원효스님이 깨치고 당나라 유학길에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일체는 유심조다. 세상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과연 원효스님이 해골물을 마시고 깨친 것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일까요? 그 말의 참 뜻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내가 따듯한 물을 마시면서 ‘이건 인삼차야.’ 라고 생각하면 물이 인삼차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 앞에서 자식이 굶어 죽어가는데 ‘내 자식은 내일아침이면 벌떡 일어나서 씩씩하게 다닐 거야.’ 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자식이 벌떡 일어납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굶어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는 뭔가를 먹여야 하지요. 

부처님께서는 병에 걸려 돌아가셨지요. 그 때 ‘내가 좀 더 중생들을 위해 교화를 해야하니까 한 3년은 더 살아야겠다. 내일은 병이 나아야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병이 낫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수행을 해서 얻은 다섯 가지 신통력 중에도 이런 것은 없습니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그렇다면 원효스님이 깨쳤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과연 세상 일은 마음 먹은 대로 다 되는 것일까?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이 있습니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세간의 모든 것을 그려낸다.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나니 일체가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이 게송을 잘못 이해하면 ‘일체유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화엄경에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그린다고요. 

바람이 불어서 은행잎이 흩날리는 풍경을 그린다고 칩시다. 그렇게 그린 그림하고 실제 저 풍경이 완전히 같을 수 있나요? 그것은 사진으로 찍어도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는 순간이 지나면 빛의 양도 바람의 속도도 떨어지는 나뭇잎의 숫자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찰나찰나 변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세상을 보고 그림을 그립니다. 여기까지는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봅니까? 아니면 마음이 그린 그림을 봅니까? 우리가 보는 세상은 마음이 보는 그림입니다. 마음이 보는 그림을 이 세상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단풍이 아름답게보입니다. 왜? 마음이 아름답게 그렸기 때문입니다. 단풍이 어떤 측면에서는 늙고 병든 모습이겠지만 내 마음이 그린 그림은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닙니다. 마음이 그린 그림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동오스님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동오스님의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근거는 없지만 내기억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팩트체크를 해서 ‘동오스님은 이렇다’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동오스님을 있는 그대로 생각했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그림을 그릴 때 동오스님을 실제 동오스님과 다르게 그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더 곰곰이 생각하면 원효스님의 사례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 세상 일은 마음먹은 대로 된다? 

원효스님이 한밤중에 물을 마실 때 ‘이 물은 해골에 담긴 물이지만 더럽거나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물을 마셔서 세상 모든 일이 마음 대로 된다는 말이 나왔을까요? 한밤중에 물을 마실 때는 그것이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침에 깨서야 그것이 해골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원효스님도 거기에서 깨달은 겁니다. ‘내가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내 마음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는 거였구나!’

원효스님이 크게 깨친 계기가 된 것은 아침에 마주한 해골이었습니다. ‘어떻게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실 수 있었을까?’ 큰 충격을 받은 것이죠. ‘어젯밤에는 달디 단 물이었는데 이것이 해골물이었다니. 이렇게 놀랄 일이 있나!’ 우리 같으면 한 번 놀라고 넘어갔겠지만 원효스님은 큰스님이라서그 일을 곰곰이 되짚어 본 것입니다. 

‘왜 내가 놀랐을까?’ ‘왜 내가 당황했을까?’ 그 이유가 내 마음이 그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한밤중에는 달콤한 물로 그렸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해골물로 그린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화가와 같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그림을 그리고 마음이 그림을 본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있는 그대로의 세상, 불교에서는 실상이라고 이야기하는그것을 마음이 보고 그리는데, 왜 그림을 보면서 실상이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왜 그럴까? 

몇 년 전에 백내장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을 해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세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백내장은 눈의 수정체를 인공으로 바꾸는 것인데요. 수술을 하면 시력이라든가 보이는 게 완전히 달라지니까 한쪽만 바꾸면 헷갈려서 못 봅니다. 때문에 한쪽에만 문제가 있어도 양쪽 다 해야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양쪽 눈을 다 수술하면 이틀 동안 완전히 봉사가 되기 때문에 하루에 한 눈을 수술하고 하루 쉬었다가 그 다음날 다른 눈을수술합니다. 

수술이 진행되는 이틀 동안 보통 사람들은 못 하는 독특한 체험을 합니다. 수술을 한 눈으로 보면 세상이 아주 깨끗하고 선명하고 약간 푸르스름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수술을 하지 않은 원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희미하고 중간중간 상들이 일그러지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색조가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한 기운을 띱니다. 한쪽은 파란색 필터를 끼운 것 같고 한쪽은 빨간색 필터를 끼운 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실상이 아니라 마음이 그린 그림을 본다

그때 알았습니다. 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내 눈이 어떠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보인다는 것을요. 젊고 건강한 눈이보는 세상과 나이들어 노쇠한 눈이 보는 세상이 완전히 다르더라는 겁니다. 이것은 경험하지 않는 이상 완전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내 눈이그렇게 보는 것을 사진을 찍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내 눈이 망막에 맺히게 하는 상에 따라 이 세상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라고 하는 시각 기관이 없다면 세상을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않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기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고 내 눈에 맺힌 상입니다. 사진기의 필름을 보고 이 세상을 단정짓고 있습니다. 신체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가 생겨 먹은 자체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내 눈이 본 대로 세상을 봅니다. 그림을 그릴 때 스스로는 대상을 똑같이 그린다고 하는데, 실은 내가 좋아하는 패턴과 색깔 같은 것들이 가미됩니다. 사진은 그림과 다르죠. 개인의 습관이나 기호, 계산 같은 것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사진을 찍는 게 아니고 그림을 그립니다. 세상을 마음이 볼 때 이미 세상에 대한 나의 감정, 느낌, 생각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낙엽을 보면 ‘나뭇잎이 늙고 병들어서 변하는 노화작용일 뿐인데 나는 이렇게 아름답게 받아들이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보는 순간‘와, 색깔이 정말 예쁘고 낙엽 지는 모습이 멋있다.’라는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원효스님이 깨달았습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마음이 화가와 같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연기실상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실은 깨달아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마치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깨치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한 강렬한 체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모든 세상이 다 연결되어 있고 그 실제모습과 내가 보는 이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쳐서 삶이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세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낙엽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어제 돌아가신 한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원효스님의 일화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지점은 우리는 마음이 그린 그림을 실제 세상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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