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말의 함정

긴 숟가락만 있는 극락과 지옥에서 극락 중생들은 서로에게 음식을 떠먹여주고 지옥 중생들은 자기 것만 먹으려다가 밥 한 톨도 먹지 못해 고통 받는다는 우화가 있다.
숟가락이 길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고통 받을 필요가 없는데 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까? 앞뒤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괴롭기 때문이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마음이 고요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생각 사이를 넓혀야 한다. 논리, 감정, 느낌, 공상, 망상과 같은 생각과 생각 사이를 넓히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고요한 마음에 세상이 비치면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도리이고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극락, 마음, 수행, 알아차림, 중도, 지옥, 팔정도

극락과 지옥

오늘은 불교에서 극락과 지옥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잘 알려진 우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극락과 지옥을 모두 가보았는데 겉으로보기에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생과 다른 게 하나도 없더랍니다. 도대체 어떤 곳이 극락이고 어떤 곳이 지옥일까? 궁금해 하던 차에 공양시간이 되자그 차이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극락과 지옥에서는 사람 팔보다 긴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지옥에서는 먹고 싶은 반찬이 있어도 서로 먹으려고 싸우고, 숟가락이 길어서 스스로는 절대 입에 넣을 수가 없는 겁니다. 산해진미가 있어도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너 때문에 못 먹었다고 원망하면서 싸우더라는 거니다. 

이 양반이 극락에 가서 보니 지옥과 똑같이 기다란 숟가락을 쓰는데요. 극락의 중생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앞에 앉은 사람이 맛있어 보이는 반찬을 떠서 상대방에게 먹여주는 겁니다. 서로서로 먹여주니까 멀리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편하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거죠. 그러고서는 ‘나는 오늘당신 덕분에 맛있는 식사를 했다’고 서로 칭찬하고 고마워하더라는 겁니다. 

불자님들은 한 번씩 들어봤음직한 이야기입니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불교에서 만든 이야기는 아니고요. 인도에서 예전부터 내려오던 옛날이야기랍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지옥과 천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남을 위하고 배려하고 자비심을 내면 그곳이 극락이고, 그런 마음을 낸다면 극락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질투하고 나만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면 그곳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모두 아는 이야기, 쉽게 잊히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비단 불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끝내면 너무 뻔하고 재미 없는이야기입니다. 이런 우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은 깊고 심오한 진리, 내지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사실을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이 우화도 마찬가지로 자비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극락이나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를 짧은 이야기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알기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훌륭한 법사혹은 강연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단점도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쉽기 때문에 한 번 듣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몇 년 동안 수행하고 고생한 끝에 가르침을 받은 것이 이 이야기라면 마음이 깊게 남겠지만, 어쩌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유명한 사람이 이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면 ‘아 그렇구나.’ 하고끝입니다. 아무리 삶의 진리라든가 명심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어도 너무 쉽게 들어온 것은 쉽게 나가버립니다. 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들어온 것은 쉽게 나가버려요.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세세하게 분석하고 이해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지옥 중생이나극락 중생이나 다 눈이 달려 있을 텐데, 숟가락이 길어서 그걸로 밥을 먹으면 다 흘린다는 것을 알면서 지옥 중생은 왜 서로 싸우고 발악을 하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데 왜 그걸 알지 못할까?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세간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내 마음도 편해지고 상대방에 대한 애정도 솟아난다. 있는 그대로 보라.’ 이전에는 큰스님들이 하던 말이었는데 요즘에는 연예인들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을 토대로 하면 지옥 중생들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했으니까 괴롭게, 번뇌 속에서 헤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행복한 삶을 살려면어떻게 해야 하는가? 있는 그대로를 보면 됩니다. 숟가락이 긴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서로 떠먹여줘야겠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해서 괴롭고 증오와 분노로 마음이 가득 차는 게 아니라요. 반대입니다. 마음이 이기적이고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있으니까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미움, 불안 같은 것으로 가득 차있으니까 숟가락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있는 그대로보라고 이야기해봐야 안 되는 겁니다. 

마음이 고요해야 있는 그대로 본다

마음이 분노나 슬픔, 불안으로 가득 차있어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니까 마음 속의 감정들이 더 커진다는 원인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더라도 미운 건 미운 겁니다. 

앞뒤가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답은 이미 나와있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제대로 보려면 보는 내 마음이 거울처럼 반질반질해야 합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라는 말로 티끌 없이 깨끗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뭔가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마음이 거울처럼 고요해야 합니다. 그래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으면 인생이괴로운 겁니다. 인생이 괴로우면 그 괴로움이 계속 증폭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바세계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마음이 고요하다는 것과 마음이 고요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 할까요? 마음이 고요하다, 잔잔한다, 호수에 약간의 파동도 없다는 것은아무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짜증내거나 불안해하거나 뭔가에 대해서 곰곰이 그것만 생각하는 것이 없다는겁니다. 

불교에서는 생각이라는 것이 아주 포괄적입니다. 감정, 공상, 망상,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느낌 모두를 포함합니다.마음이 파도치듯 출렁이는 그 자체가 바로 생각이고 감정이고 느낌입니다. 그런 게 없으면 세상이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겁니다. 내 마음이 고요하면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바로 본다는 말의 함정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는가? 요즘은 명상이 비즈니스가 되어서요. 거의 비즈니스와 같이 강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마음을 관찰한다는 말, 내 자신을 바로 본다는 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에 핵심이 없습니다. 공허합니다. 

눈은 외부에 있는데 어떻게 마음을 본다는 겁니까. 눈은 육신 바깥에 있는 것을 보고 뇌로 전달하는 것이 하는 일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기꾼입니다. 과연 마음을 본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먼저 쉽게 접근해봅시다. 우리가 마음을 보는 것은 모르겠지만 느낄 수는 있습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화가 났다, 슬프다, 어떤 문제만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는 등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 것을 마음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자각은 어른이라면 다 합니다. 화가 난 것을 알고요 참아야 하는 걸 알고 참고 있습니다. 그런데 티가 납니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표정이 안 좋아집니다. 내가 화가 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어도 화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슬픈 것을 안다고 해서 슬픔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마음을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를 넓히는 것

티벳에서는 제자가 수행을 할 때 스승에게 화두를 끊임없이 물어보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스승이 귀찮을 정도로요. 하루는 노스님이 좋아하는 전통 연극을 정말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제자가 생각하기를 지금 스승님이 공연이 마음을 뺏겨서 마음이 빈틈이 있을 때 중요한 이야기를 물어보면 있는 그대로 대답해 줄 것 같은 겁니다. 그래서 스승이 연극을 보면서 세상 기분 좋게 보고 있을 때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승님, 수행이 뭡니까?” 

노스님이 엉겁결에 대답하기를 “생각과 생각 사이의 간격을 넓히는 것이 수행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생각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생각 뿐만아니라 감정, 느낌, 공상, 망상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과 생각 사이를 넓히는 것이 수행이라는 겁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의 간격이 넓으면, 하나의 생각을 하고 나서 그 다음 생각을 할 때, 그 다음이 생각이 시작되는 지점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의 빈틈이 넓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내 안에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자마자그 생각을 다스리거나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죠. 

저는 비슷한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음에 빈자리가 있어야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의 간극을 넓게 가지는 것이나 마음에 빈자리를 가지는 것이나 같은 맥락입니다. 

마음의 빈자리, 생각과 생각 사이는 마음이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 상태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음이라 함은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작용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정지해 있는 마음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작동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표현하는겁니다. 마치 자전거는 달리지 않으면 서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달리는 것 자체가 자전거가 존재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겁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지한 마음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텅 빈 마음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앞서 이야기했듯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요. 화로 속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이어지듯 하나의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일상에서 지속되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고요한 마음에 비치는 세상

정리해봅시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볼 수 있다면 마음도 편해지고 이 세상과 타인에 대한 애정이 솟아난다는 것은 사실은 앞뒤가 바뀐 말입니다. 마음이 자비롭지 못하고 내 안에 번뇌망상이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볼수 있느냐? 번뇌망상을 잠재워야 합니다. 번뇌망상을 잠재운 상태가 고요한 마음의 상태, 명경지수의 상태입니다. 

내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있으면 세상은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 비춰집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 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내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것입니다. 

지옥중생들이 왜 밥 먹을 때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싸우기만 하는가?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행을 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수행이란 자기 마음을 보는 겁니다. 

지옥중생들은 수행을 안 하니까 인생이 고달픕니다. 그러니까 수행을 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극락중생들은요? 만약 극락에 코로나가 퍼졌다면, 그런 상태에서도 숟가락으로 서로 떠먹여주면 어떻겠습니까? 자기 숟가락으로 자기만 먹어야겠죠. 아무리 자비심이 넘쳐도 코로나가 퍼졌다면 자기 숟가락으로 남을 떠먹여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기 위해서 숟가락으로 남을 떠먹여주자 하는 것은 좋은데요. 있는 그대로를 보아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코로나가 왔다고 하면 극락도 올스톱되는 겁니다. 밥을 안 먹으니까 배가 고프죠. 배가 고프면 괴롭죠. 그러면 거기가 극락입니까? 이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게 정답인가?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무조건 인정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이야기 마무리 하겠습니다.

상황을 관찰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도

부처님 이야기의 핵심은 연기사상입니다. 연기사상을 달리 표현하면 중도입니다. 연기사상, 중도라는 말은 어렵습니다. 딱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무엇일까요? 적절하게, 상황에 맞게, 잘 하는 게 연기이고 중도입니다. 

극락 중생들이 긴 수저로 서로서로 먹여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코로나가 번집니다. 그러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극복할 수 있는 여러 묘안을 제안합니다. 그런 식으로 나름의 방법을 고안합니다. 수저를 짧게 만들 수도 있을 거고요, 백신을 만들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모든 중생들이 행복할 수 있는 차선의 방향을 찾아나가는 것이 중도이고 연기입니다. 

코로나라는 변수가 없을 때 살아왔던 방식이 있습니다. 코로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조건입니다. 코로나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맞게 우리 스스로가 변화합니다. 변화된 우리가 또 코로나에 영향을 주겠죠. 이것이 연기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겁니다. 이게 중도입니다. 

그래서 극락에 코로나가 퍼졌을 때 극락 중생들이 ‘그러면 죽어야겠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연기사상이고중도입니다. 우리가 팔정도를 이야기하는데요. 팔정도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잘’ 하는 겁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해서 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오늘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의 함정에 속지 말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한다는 말은 내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고요하다는 것은 마음이 정지한 상태가 아니고, 번뇌망상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연기와 중도라는 것은 정해진 것, 고정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조건에 적절히 대처해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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