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사상과 불교 2

기원전 5세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제사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나’에 대한 고대인도인들의 본질적인 탐구가 시작된다.
인도 전통사상에서는 나와 세계의 관계를 아트만과 브라흐만으로 설명한다. 육체적 나는 거짓된 나이며 진실된 나는 아트만이다. 진실된 나를 주체로써 생각하면 아트만이고, 내 밖의 객체로 대하면 브라흐만이라 이름 붙인다. 본질은 같으나 이름이 다를 뿐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인도사상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비판하고 자신만의 논리를 펼친 사상가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아트만이나 브라흐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해체하고 관찰하면 실체 없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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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나와 세계에 천착하다

베다시대의 제사의 중요성이 감소되고 ‘나’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가 시작된 때가 기원전 8세기 우파니샤드 시대입니다. 베다의 주된 관심이 자연의 질서와 운행이었다면 우파니샤드는 인간 내면세계에 집중합니다. 우파니샤드의 관심은 나와 세계에 모아집니다. 나는 누구이며, 세계의 궁극적 본질은 무엇이며, 나와 궁극적 본질과의 관계는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천착하게 됩니다.

나와 세계에 대한 질문은 전변설과 적치설로 귀결됩니다. 전변설은 브라흐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모습을 달리하여 나툰다는 것이고, 적치설은 여러 가지 원소가 모여서 무언가를 형성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사상가들의 설왕설래가 가장 극에 달했을 때가 기원전 5세기이며, 부처님도 이런 사상가들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생각과 논지를 전파했습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따지고 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나와 진실의 아트만

그렇다면 과연 인도 전통 사상에서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거짓된 나이며 진실된 나는 아트만이다’라고 합니다. 인도 사상에서 ‘나’는 5장의 부속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다섯 가지는 ▲음식 ▲호흡 ▲마음 ▲지성 ▲환희입니다. 숨(호흡)은 밥 속에 존재하고, 마음은 숨 속에 존재하며, 자아는 지성 속에 존재합니다.

밥이나 숨이 진실이라면 자아는 진실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육신 속에 생명으로써의 내가 내재해있고, 생명으로써의 내 안에 보고 듣고 느끼는 마음으로써의 내가 있고, 그 마음 안에 생각하고 듣는 즉 인식 작용하는 내가 있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일체된 경지에서 느끼는 진실된 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찾아가는 길에 대해서도 제시했습니다. 각성위, 몽면위, 숙면위를 통해 투리야라고 하는 지복, 영원한 평화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평상시 일상생활을 하는 나, 꿈을 꾸는 나,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자는 나는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실은 간화선 실참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화두가 일상생활을 할 때도 성성한가? 꿈을 꿀 때도 여여한가? 깊은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자각하고 있는가?를 따졌을 때 ‘그렇다’고 할 때만이 화두를 잘 들고 있는 것입니다.

아트만의 세 가지 특성

인도 전통사상에서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존재를 상정합니다. 첫째, 아트만이란 자신과 구별되는 타자를 갖지 않는 단일한 주체입니다. 이를테면 ‘나’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나’는 ‘나 아닌 다른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나 자신과 구별되는 나 아닌 타자를 갖지 않습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지요.

아트만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으므로 차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불교에서도 익숙합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는 분별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 불교의 언어가 실은 불교 고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당대의 인도사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아트만은 인식될 수 없으므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을 통해서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왜 인식할 수 없을까요? 인식한다는 말 속에는 이미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을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설명도 불교의 언어와 유사합니다.

셋째, 아트만은 설명될 수 없더라도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므로 궁극의 자아의 존재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불교와 전통 인도사상의 차이는 이 세 번째 아트만의 정의에서 나타납니다. 불교에서는 무언가 궁극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空)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공하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 공하다는 말은 연기의 다른 말이라고 합니다.

본질은 같으나 이름이 다를 뿐

그러나 전통사상에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무언가는 단일한 실체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지만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파니샤드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소금덩어리를 물에 던지면 용해되어 다시 집어낼 수 없지만, 어느 곳의 물을 맛보더라도 짠맛이다. 마찬가지로 무한하고 끝없는 이 위대한 존재는 의식으로 이 세상에 용해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본질을 무엇입니까? 베단타 학파는 전변설로써 세계의 근원을 설명했습니다. 인도 사상의 주류이지요. 이들은 ‘한 덩이의 진흙을 앎으로써 진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알게 되나니, 그것들은 다만 말로부터 비롯된 명칭의 변화일 뿐, 진실은 진흙덩이 다만 그것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것의 본질은 같으나 이름을 달리 붙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핵심논리와 비슷합니다. <금강경>에서는 ‘A는 A가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A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인도사상과 불교의 차이는 두 번째 정의에서 갈립니다. 두 번째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그것으로 인해 말이 표현될 수 있고, 마음에 의해 사유되지 않지만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사유할 수 있으며,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눈이 볼 수 있으니, 브라흐만은 세상 사람들이 예배할 대상이 아니다.”

주체면 아트만, 객체면 브라흐만

근원적인 실제, 아트만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지만 아트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내 마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에서 표현하면 아트만이고, 세계를 이루는 본질 즉 객체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브라흐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세계의 본질은 단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이며, 브라흐만이 곧 아트만입니다.

명칭과 형태를 달리할 뿐 본질은 동일하며 브라흐만이 곧 아트만이라는 것이 전변설의 핵심입니다. 세계의 차별은 명칭과 형태에 근거할 것일 뿐, 궁극적으로는 브라흐만의 변화된 모습이며 결과는 원인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인중유과설과도 궤를 같이 합니다.

이러한 사상에 의하면 브라흐만은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순수 그 자체인데, 어떻게 그 안에서 하늘, 물, 땅과 같은 차별적인 세계가 나오는 것일까요? 다만 환영일 뿐일까요? 이에 대한 베단타 학파의 답은 이렇습니다.

“브라흐만의 변화는 실제 변화가 아니라 무지에 의해 일시적으로 그렇게 나타나 보이는 것일 뿐이다. 우리의 제한적이고 차별적인 감각과 사유로 인해 그것이 세계로 나타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새끼줄이 뱀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착각 즉 무지에 의해 일시 그렇게 보여질 뿐이다.”

베단타 학파에게 세계는 환상일까요? 새끼줄이 뱀인 줄 알고 깜짝 놀라는 사람에게 뱀은 실제 존재합니다. 다만 새끼줄인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만 말입니다. 새끼줄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는 한 뱀은 결코 환상이 아닙니다. 인도사상에서는 세계도 브라흐만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 없이는 실재하는 것입니다.

요가학파가 생각한 세계의 근원

같은 질문에 요가 학파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요가 학파는 푸루샤라고 하는 순수정신과 세 가지 속성의 복합체인 프라크리티를 상정합니다. 프라크리티는 밝음, 가벼움을 라자스는 운동, 격정, 욕망을, 타마스는 어둡고 무거움, 무기력함, 미망, 무지 등을 의미합니다. 푸루샤가 프라크리티를 비추면 균형상태가 깨져서 차별적인 세계를 연출해낸다고 주장합니다.

무지는 순수정신인 푸루샤와 몸뚱아리라라고 하는 현실적 복합체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의 육체가 아니라 푸루샤가 진실한 나라고 깨닫는 것이 요가학파의 목적입니다. 진실의 자아인 푸루샤가 홀로 존재함을 확인하는 것, 일상에서 경험하는 자아가 진실의 자아가 아님을 통찰하는 것을 추구하지요.

어떻게 하면 무지를 뚫고 푸루샤의 독존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요가 학파는 요가 수행을 통해 진실한 자아를 통찰하고, 상캬 학파는 제대로 아는 것 즉 지식을 통해서 푸루샤의 독존을 자각합니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고대 인도인들은 어떻게 살려고 했을까요? 바가바드 기타에 따르면 인간은 행위를 요구하는 세속에 몸담고 있으면서 진실의 아트만을 추구하는 양면적 존재입니다. 세속에 머무르는 육화된 자아에게 행위는 불가피합니다.

인도사상 측면에서 생각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일상에서 슬픔과 기쁨 등을 경험하는 자아는 육화된 자아이며, 진정한 자아는 세계를 관조할 뿐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육화된 자아가 진정한 자아인 줄 잘 못 알면 라자스(격정)에서 생겨나는 욕망이 진정한 자아를 은폐할 것이며, 무지하지 않으면 어떤 욕망이나 집착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행위는 속박을 낳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입니다.

카르마 요가에 따르면 욕망은 행위 자체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행위가 낳게 될 결과에 대한 욕망입니다. 따라서 육체를 가지는 한 행위는 불가피하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포기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 결과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지요. 이 말은 곧 행위결과에 집착함 없이 행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인도사상을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진실의 자아인 아트만은 현상적인 자아 즉 행위자가 아님을 식별하는 것이며, 나아가 아트만이 곧 브라흐만임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욕망을 떠난 행위와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의 원천이 됩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무주상보시와 자비심을 내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아트만에 대한 부처님의 비판

근원적인 실재가 존재한다는 인도 전통사상에 부처님은 어떻게 비판하고 반박했을까요?

다시금, 공입니다. 어떠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얽히고설킨 그물망일 따름이더라 라는 것이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가 깨달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브라흐만이나 아트만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관찰하면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초기불교 논리의 핵심입니다.

초기불교에 이어 반야부 불교, 여래장 사상이 모두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남방불교가 고수하고 있는 아비달마 불교와 우리나라가 표방하는 대승불교가 또 다르지요. 어떤 흐름 속에서 불교사상이 변화하고 발전해왔는지는 또 다른 시간에 심도 있게 다뤄볼 주제입니다.

두 시간에 걸쳐서 부처님이 어떻게 인도의 전통사상을 반박하고 당대의 바라문을 비판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이번 공부가 무수한 변화를 거듭한 불교의 원형, 즉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를 도왔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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