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4

사성제는 불교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부처님이 불교란 무엇인지 1분 요약으로 설명한 것이다. 당시 인도사회의 보편화된 개념이었던 열반을 주제로 어떻게 열반에 이를 것인가를 이야기한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의 키워드를 ‘괴로움’으로 삼았다. 열반이란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사성제의 전반부에서 괴로움이 무엇인지, 왜 괴로운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이어서 열반이 무엇이다는 것을 괴로움의 소멸로 정의하고, 소멸에 이르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한다.
불교의 핵심은 괴로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개념을 해체하는 것을 통해 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는 것이다.

#각묵스님, 무아, 사성제, 초기불교

복습; 법(다르마)의 특징

지난 시간에는 법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복습하자면 법이란 존재를 법으로 해체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서사실은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공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법 그 자체를 통찰함으로써 법이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임을 알아서 법공을 이해한다는것을 공부했고요. 아공과 법공을 두루 숙지함으로써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법의 특징은 두 가지였습니다. 고유성질과 찰나입니다. 예를 들어 법은 해체하는 것이라고 할 때 자주 오해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핸드폰을 해체한다고했을 때 케이스, 액정, 카메라, 저장 칩 등으로 해체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드린 예는 핸드폰을 기계적으로 분해하는 것이고요. 부처님이이야기한 법으로 해체한다는 것을 그것의 고유성질로 해체하는 것입니다. 실제 핸드폰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 있는 핸드폰에 대한 생각, 핸드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고유성질로 나누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핸드폰과 다른 것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핸드폰을 휴대하는 것입니다. 휴대성이라는 고유성질을 분해해냅니다. 또 핸드폰은 계산을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산이라는 고유성질로 분해해낼 수 있겠지요. 실제 현실세계에 있는 무언가를 분해하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 있는 핸드폰이라는 개념과 이미지를 고유성질로 분해하는 것이죠. 그랬을 때 휴대성이 하나의 법이고 계산기능이 하나의 법으로 해체됩니다. 법을 해체한다는것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제2편 초기불교의 교학

지난 시간까지는 개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목차를 보면 제1편 초기불교의 기본 주제를 했고, 이번 시간부터는 제2편 초기불교의 교학을 공부합니다. 그중 가장 먼저 사성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방불교의 전통적인 교재인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보면 사성제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끝에 나옵니다. 전체적인 가르침을 사성제로 총괄하여 정리하는의미로 그렇게 배치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책 <초기불교 이해>에서는 교학의 제일 처음을 사성제로 시작합니다. 그건 아마도 사성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한마디로 요약한 것이기에 부처님 가르침의 전체적인 틀과 체계를 잡고 시작하자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사실 사성제의 내용은 12연기의 내용과 팔정도를 합친 것입니다. 때문에 사성제의 각 부분을 설명하려면 12연기와 팔정도를 세부적으로 다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사성제의 전체적인 틀이나 사성제의 의미,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사성제를교학의 가장 처음으로 배치한 것 같습니다. 

사성제 ; 괴로움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 어떤 유익한 법이든 그것들은 모두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총섭됩니다. 무엇이 넷입니까?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89p)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고성제, 두 번째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고집성제, 다음은 고멸성제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네 번째는 고멸도성제입니다. 이것을 편하게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라고 하는데요. 정확하게 말하면 고성제 고집성제 고멸성제 고멸도성제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왜 사성제를 이렇게 이야기했을까요? 사성제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성제만의 특성을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부처님에게 “당신이 깨달았다는 바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달라.”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불법에 관심이 있는사람은 파고들어 공부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간단한 한 마디로 압축해서 듣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고심한 끝에 당신이 깨달은 바를압축하여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 사성제입니다. 요즘 말로 ‘한 줄 요약’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 ; 불교에 대한 부처님의 ‘한 줄 요약’

첫 번째, 고성제는 부처님이 보는 이 세상입니다. 일체는 괴로움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선언입니다. 선언을 하고 나서 왜 그런가, 그 원인으로 집(갈애)를꼽습니다. 고성제와 고집성제에서 괴로움에 대해서 설명하고요. 세 번째는 괴로움이 멸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괴로움이 소멸하는 것은 열반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하지요. 네 번째 고멸도성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사성제는 크게 보면 전반부와 후반부로 이뤄집니다. 전반부는 괴로움에 대해서 후반부는 열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 고멸성제에서 열반이란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전반부에서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것이지요. 부처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열반과 열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왜 부처님이 부처님의 깨친 바를 한 줄로 요약할 때 열반이라는 키워드를 꺼냈는가. 이 지점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왜 열반을 이야기했을까? 첫째, 상대방이 열반이라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열반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이야기는 이미 부처님 당시에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이야기하면 알아 듣는 겁니다. 

왜 열반인가? 당대의 담론이었기에

부처님이 지금으로부터 대략 2500년 전에 태어난 분인데요. 비슷한 시기 중국은 제자백가 시대였고 인도에서는 기존의 힌두교가 구태의연한 형식에 빠져든 것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였습니다. 부처님도 그 중 한 분이고, 부처님 전기에 나오는 육사외도라고 하는 다양한 사상가들이 활동했습니다. 유사한 시기에 고대 그리스에는 많은 철학가들이 등장합니다. 인류 문명사에서 2000년에서 2500년 전 사이는 사상과 철학이 폭발적으로 출현하던시대였던 것입니다. 

이 시기의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은 나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력한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고, 어떤사람은 어진 마음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기술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 군주의 눈에 들어야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도에서는 힌두교에 관한 담론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그 이전부터 있어왔던 힌두교의 윤회와 환생에 대한 개념은 이랬습니다. 윤회와 환생은 고통이니 더이상 환생하지 않는 상태를 목표로 하여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것은 인도사회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사상입니다. 

윤회나 열반이라는 개념이 이미 보편화되어 있는 가운데, 이 개념에 대해 신진 사상가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한 것이지요. 비슷한 시대에 출현한 자이나교의 경우에는 윤회의 사슬을 끊고 범아일여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은 고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상가는 윤회가 없다고 주장했고요. 이렇게 당대의 철학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펼쳐지는 가운데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도 자기만의 사상을 펼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죠. ‘내가생각하는 열반은 이런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은 이것이다. 이것이 맞다는 것을 수행을 통해 확인했다. 이것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이다.’ 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사성제의 핵심 키워드 ‘괴로움’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열반을 이야기할 때 네 가지 진리를 말하면서 한결같이 괴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열반은 괴로움의 소멸이고, 모든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움은 갈애에서 생기며, 괴로움 없애는 길은 팔정도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왜 부처님은 당신이 깨친 바를 한 마디로 이야기할 때 괴로움을 키워드로 해서 설명했을까요? 이 점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괴롭다는 흔하게, 일상적으로사용합니다. 그런데 괴롭다는 것을 정의 내리려고 생각해보면 참 막연합니다. 너무 흔하게 쓰고 다양하게 쓰기 때문에 정확한 용례가 불명확합니다. 대충 괴롭다는 말은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힘들 때 쓰입니다. 심신이 아프거나 힘들어서 편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괴롭다는 것은 지금 이 상태가 편안하지 않고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정적이지 않다는 말은 불안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괴롭다는 말은 지금상태가 무언가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육체적으로 아프거나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힘들거나 화가 나서 정신적으로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지요. 그것이 육체에서 기인하든 정신에서 기인하든 안정적이지 않고 불안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은 불안입니다. 

안정적이지 않은 것이 괴로움이라고 하면 언뜻 잘 연결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원인은 다양하지만 괴로움이 말하는 것은지금 상태가 편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상태가 고정불변이라면,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것이 태어나서 물 100밀리만 마셔도 된다고 정해져 있으면누구도 목말라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밥을 두 끼 먹었다가 어떤 때는 밥을 세 끼 먹었다가 어떤 때는 먹기 싫고 어떤 때는 더 많이 먹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편안하지 않은 것입니다. 무언가 끊임없이 변하니까 괴롭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숙명을 타고났기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움은 안정적이지 않은 상태[불안]

이것을 부처님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알아보겠습니다. 12연기를 공부하면서 더 자세히 공부하겠지만, 부처님이 진리를 깨달은 과정은 12연기를 역관하여 깨달았다고 이야기합니다. 12연기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입니다.  이것을역으로 보면 노사, 생, 유, 취, 애, 수, 촉, 육처, 명색, 식, 행, 무명이 됩니다. 부처님이 12연기를 역관하는 과정을 통해서 고와 집성제에 대해 깨달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노사, 왜 사람은 늙고 죽을까? 무엇에 의지해서 노사가 일어나는 것일까? 부처님께서 이것을 생각해보니 태어나지 않는다면 늙고 죽는 것도 있을 수 없는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어남은 무엇에 의지할까? 나라고 하는 존재가 없으면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과정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은 유, 즉 존재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존재는 무엇에 의지하는가? 유는 취에서 기인합니다. 취는 끌어당긴다, 취합한다, 가진다, 획득한다는 뜻으로 쓰이죠. 

유는 기존의 불교 용어로 오온입니다. 오온은 현실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이 아니고 고유 성질로 나눈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를 고유성질로 나눈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을 몸이라는 성질로 보는 것이 ‘색’이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성질이 ‘수’이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키가 작구나 크구나 잘났구나 하는 마음이 ‘상’이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한가하게 살아야겠다 하는 의지를 내는것이 ‘행’이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것이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나라는 무엇을 고유한 성질로 나눈 것입니다. 나눠보니 다섯 가지로 나눠지더라는 것이죠. 이것이 오온이며 각각의법입니다. 이것이 12연기에서 말하는 유입니다. 나라는 것이 해체해서 보니 오온이 모여 있는 덩어리였더라, 하는 것을 부처님이 깨달은 것입니다. 

취는 무엇일까요? ‘몸뚱이가 나구나’라는 색온이 있는 순간 이 몸뚱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먹어야 합니다. 무언가 먹거리를 취해야 하지요. 수온 같은 경우는 어떨까요? 즐겁다고 느끼는 그것을 나라고 생각한다면 즐거움을 계속 느껴야 합니다. 괴롭다고 느끼는 것을 나라고 생각하면 괴롭다고 느끼는 무언가를 밖에서 계속 취해와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행온 같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행온은 의지인데요. 목표를 계속 세워야만 내 안의 의도 의지가 계속 유지됩니다. 이렇게 무언가를 취하지 않으면 유라고 하는 것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고성제 ; 괴로움이 시작임을 이해하는 것

그런데 이런 것들이 왜 괴로움인가? 무언가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취해야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이것이 변화하는 겁니다. 괴로움은 편안하지 않은 것이고 불안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정불변의 뭔가가 나라고 생각하니까 계속 취해야 하고, 거기에서 괴로움이 옵니다. 변화하니까 변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변화하니까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불안해합니다. 이런것들이 결국은 괴로움이고, 일체가 괴로움입니다. 

그때 당시 인도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중요한 사상으로써의 열반, 윤회 이런 것들을 부처님은 괴로움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고성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사성제의 네 가지 각각을 고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출발점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사무치게 느낄 때, 거기에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발합니다. 즉 괴로움을 정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출발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괴로움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사성제입니다. 

집성제 ; ‘나’가 있기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집성제입니다. 괴로움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냐? 12연기에서 보면 노사는 생에 의지하고 생은 유에 의지하고 유는 취에 의지하고 취는 갈애에의지합니다. 왜 취합니까? 애착하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해 애착하고 탐착하고, 이것이 지금 이 모습으로 유지되게 하고 싶으니까 계속 취하게됩니다. 사실은 그런 게 없는데 말입니다. 

조금 다른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구성요소는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성요소를 따지면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똑같습니다. 장마철이어서 계곡에 물이 불어나서 물이 콸콸 내려가는 모습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요. 저 물이 때로는 바위에 부딪히고 더러운 물에 고여 있다가 결국에는 바다로 간들, 다시 수증기로 하늘로 올라가고 구름이 되어서 무거워지면 비로 내려 계곡을 흐르는 물이 될 텐데. 그래서 똑같이 바위에 부딪히고 웅덩이에 고여 있다가 바다로 나가고 수증기가 되어서 올라갈 텐데. 물이라는 것은 이 과정을 수천 수만 번 반복할 것이라 이겁니다. 

만약 내가 물이라면 바위에 부딪히고 더러운 웅덩이에 고여 있는 상태가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위에 부딪치기 싫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것이죠. 그걸수천 번 반복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런데 물은 바위에 부딪치거나 바다에서 뜨거운 수증기로 올라가거나 구름으로 있다가 엄청난 속도로 땅에 떨어지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왜 괴롭다고 생각할까? 내가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모든 것을 괴롭게 만듭니다. 괴롭다는 말은 편안하지가 않다,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거기에서부터 불교는 출발합니다. 

고성제와 집성제가 왜 사성제의 전반부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살펴봤습니다. 불교의 핵심은 고를 이해하는 것이고, 고는 곧 무상을 이해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고, 있다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정확한 실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서양철학의 이분법적 사고와 불교의 차이

여담이지만 부처님과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람들이 활동을 했습니다. 필로소피(Philosophy, 철학)라는 말은그리스에서 처음 생겼는데요, 이 말을 풀이하면 필로소피아(Philosophia) 즉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지적 호기심’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적 호기심이 강했습니다. 왜냐? 고대 그리스는 아고라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민주주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노예제를기반으로 한, 노예에게는 해당하지 않고 도시의 시민만을 위한 민주주의였지만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은 무언가를 관철하고 싶거나 분쟁이 생겼을 때 변호를 하고 싶으면 아고라라고 하는 광장에 가서 스스로 변론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피스트라는 직업이 성행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말을 잘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변론을 잘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논리적으로 말해서 상대방을 설득할 것인가? 이런 것을 잘하는 사람들로부터 철학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어떻게 하면 백성을 잘 다스릴 것인가가 주된 관심사였고, 고대 인도에서는 어떻게 하면 열반으로 갈 것인가가 관심사였고, 고대 그리스의사상가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말로써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리스에서는 지식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겁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나와 대상을 확실하게 분리하는 것입니다. 자연이든 사회든 인간이든, 그 대상을 관찰해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이 파란것은 빛의 산란 때문에 파랗구나.’ 라고 하는 지식에는 나의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대상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자기 생각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설명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항상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에서 출발합니다. 객체에 대한 존재론, 주체가 객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인식론이 서양철학의 중요한 두 기둥이지요. 

지금의 우리도 서양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저기에 무언가가 있고, 저것을 보는 내가 있다고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렇게 나누는 것으로 하여금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 것입니다. 보는 내가 따로 있고 보이는 대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분별에서 ‘나’가 생겨나고 그런 나에게 더욱 더 집착하고 거기에서 괴로움이 나온다는 것이죠. 

도성제 ; 목적지에 가려면 목적지가 어딘지 알아야

한편, 또 한 가지 사성제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순서입니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도성제가 먼저 나오고, 도성제를 하면 멸성제가이뤄진다고 이야기해야 순서가 맞을 것 같은데 뒤바뀌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은 이런 것이다 설명을 하고, 열반에 이르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런이런 노력을 하면 이러한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한 것이 아니고요. 이 부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딘가로 가야 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어디로 갈지를 정하는것입니다. 서울에 갈 것인지 부산으로 갈 것인지 하다못해 옆집에 갈 것인지 목적지를 정해야 합니다.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지 알 수 없습니다. 비행기를 탈 것인지 걸어서 갈 것인지 자전거를 탈 것인지 그 방법이 나옵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열반이란 이런 것이라고 하는 수행의 목표를 먼저 제시합니다. 내가 가야 할 곳에 대한 이해가 먼저 되어야만 그곳에 가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도성제는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팔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팔정도의 첫 번째가 바른 견해입니다. 팔정도는 수행인데, 여덟 가지 올바른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첫 번째 나오는 것이 방법이 아니라 견해입니다. 말이 모순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팔정도의 첫 번째가 정견인가? 어디를 가려면 가장 먼저 목적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지 가는 방법, 가는 길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도달해서 보니 ‘여기가 거기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갈지 정해 놓고 수시로 내가 갈 곳을 확인해야 합니다. 아직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거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거기에 가면 기분이 어떨 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정견부터 시작합니다. 깨달음이란 이러하더라 하는 올바른 이해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때문에 팔정도는 정견으로 시작하고, 사성제에서는 도성제가 멸성제의 앞에 순서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요약정리

정리하자면 첫 번째, 사성제는 불교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부처님이 1분 요약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당시 인도사회의 보편화된 개념이었던 열반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를 이야기하면서 당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열반을 괴로움의 소멸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사성제의 전반부를 괴로움에 할애한 것입니다. 이렇게 고성제와 집성제는 괴로움의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열반이 무엇이다는 것을 괴로움의 소멸로 이야기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팔정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사성제를 괴로움이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곧 괴로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개념을 해체하는 것을 통해 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무상하다, 괴롭다,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 괴로움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사성제로써 당신이 깨친 바를 짧게 설명했습니다. 사성제의 각각의 내용은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고요. 왜 사성제인가, 부처님의많은 가르침 중에서 사성제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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