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五戒) 불살생(不殺生) 2  

오계 중 첫 번째 계율인 ‘불살생’과 관련한 여러 사례와 생각할 거리.
불교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에 대하여 죽음을 부추기거나 말로써 찬양하는 경우, 선동하는 경우는 불살생 계율에 준하여 엄격하게 금기한다.
그러나 중한 병에 걸려 자신과 주변인 모두가 고통받는 상황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는 경우, 그리고 깊은 삼매에 들어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그대로 열반에 이르는 경우에는 그것을 굳이 막지 않아도 된다.
불자의 육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면에서 순수한 고기를 섭취하는 것은 금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살생됨을 보지 않고, 그러한 사실을 듣지 않고, 그러했으리라고 의심할만한 정황이 전혀 없는 경우다. 수행자도 공양물을 선호의 대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대승불교적 견지에서 생활하되, 근본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살생, 오계, 육식, 지계

https://youtu.be/fqXjKctWBEs

불교에서 바라보는 자살(自殺)

“동기는 자비심에서 비롯되나 그 의도는 직접적인 죽음, 즉 살인이기 때문에 그 과보는 악업을 지은 것이므로 지옥에 떨어진다.”

지난 시간 자비로운 살인, 전쟁 중의 살인, 자발적 안락사를 주제로 불교의 불살생 계율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불교에서는 동기보다 의도를 중시한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가치판단을 했었지요. 이번 시간에는 자살(自殺), 사람이 아닌 중생에 대한 살생을 불교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계율을 너무 무겁고 어렵게 생각하면 실천하는 데에도 큰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실은 계율의 기본 정신은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나에게 안 좋은 것은 남에게도 안 좋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도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이지요.

자살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접하기 힘든 상황이고, 설령 접하더라도 일상의 대화 주제로 꺼내기 어렵습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가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부처님 계율에는 자살을 언급한 부분이 없습니다. 계율을 어겼을 때 당자사자 살아 있어야 처벌 혹은 경제조항을 받으라고 할 텐데, 당사자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사자가 없는 계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추기거나 찬양하는 것은 곧 살생하는 것

대신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몇 가지 일화로 스스로 택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영가전에>에는 육신의 허망함을 알아서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부처님이 가르친 올바른 도리를 깨달으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빨리 열반을 얻기 위해 육신을 버려버리는, 즉 자살을 시도하는 비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여도 무조건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 시도를 했다가 실패한 비구들도 있었겠지요.

부처님은 첫째, 죽음을 부추기거나 죽음을 돕거나 말로써 죽음을 찬양하는 경우는 불살생 계율에 준하는 엄격한 잣대로 다스렸다고 합니다. 불살생에는 직접 죽이는 것과 남에게 죽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포함됩니다. 자살을 부추긴 것은 살인행위와 같다고 보신 것이지요.

‘세상에 누가 자살을 부추기겠어?’ 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사는 세상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안락사의 경우에 환자가 너무 고통스러워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 누군가 “그래. 하루 빨리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환자의 죽음을 부추기는 행위입니다. 부처님의 관점에서 보면 불살생의 계율을 어기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고자 스스로 곡기를 끊어서 죽음에 이르고자 하는 경우도 계율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살생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예외

계율을 어기지 아니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한 병에 걸려 아주 오랜 시간 투병생활을 하여 자신도 힘들도 주위의 사람들도 극도로 고통 받는 경우, 환자가 스스로 곡기를 끊겠다고 하는 때입니다.

수행자가 음식을 섭취하는 것도 잊고 장기간 깊은 삼매에 들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마치 손을 얹을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삼매의 경지에 들어 있다면 그 삼매를 이어서 열반에 드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하자면 주변에서 죽음을 부추기거나 찬양하는 것은 살생에 해당합니다. 본인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살생에 해당하나, 본인도 고통스럽고 주변의 간병인들도 고통을 호소할 때에는 굳이 곡기를 끊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수행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명을 다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불교에서 스스로 죽음이 허용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입니다. 자살을 강하게 비판하는 불교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중생에 대한 살생

동물, 곤충, 식물과 같이 사람이 아닌 중생에 대한 살생은 어떨까요? 특히 동물에 대한 살생은 곧 육식으로 이어지고는 하지요. 스님이 고기를 먹는 것, 재가자가 고기를 먹는 것을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전생에 사슴 무리의 왕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나라의 인간 왕은 사슴 무리를 울타리에 가둬놓고 매일 사냥을 했습니다. 매일매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사슴들은 모든 무리가 고통스럽지 않도록 순번을 정하여 매일 한 마리씩 인간 왕에게 희생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임신을 한 암사슴이 희생될 차례가 되었습니다. 암사슴이 사슴 왕에게 사정을 읍소하자 사슴 왕은 기꺼이 암사슴을 대신하여 죽음의 순번을 맞이하기로 했습니다.

사정을 알게 된 인간 왕은 사슴 왕의 희생에 감복하여 사슴 사냥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이 때 사슴 왕이 말합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먹을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살생을 멈춰주십시오.”

그렇게 인간 왕의 왕국은 살생을 금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을 위한 살생도 가능하다면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세 가지가 순수한 고기는 금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재가신도가 스님에게 공양을 올릴 때, 그것이 육고기라 하더라도 세 가지가 순수하면 그 공양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님의 공양을 위해 동물이 살생되었음을 보지 않고, 그렇게 동물이 살생되었다고 듣지 않고, 그렇게 동물이 살생되었다고 의심할만한 정황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순수하다면 공양을 기꺼이 받아도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A라는 신도가 저에게 “스님, 내일 공양을 올리겠습니다.”라고 청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지나가다 언뜻 “A 신도가 어제 소를 잡았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 소를 공양을 하기 위하여 잡은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살생한 것이라면 그 공양을 받지 말아야 하며, 그런 것이 아니라면 공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공양을 올리는 재가자가 공양을 통해 선업을 쌓도록 하는 것이 수행자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공양을 올리는 재가신도의 입장에서도 살생의 기준이 있습니다,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살생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미 죽은 동물의 고기로는 공양을 올려도 됩니다. 스님께 공양을 올리고자 양계장에 가서 “저 닭을 잡아주세요.” 한다면 살생을 요청하는 것이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직접 죽이지 않고, 남을 시켜 죽이기 않은 경우에는 스님들께 공양을 올려도 된다고 부처님 당시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양물을 선호의 대상으로 판단하지 말 것

우리가 알고 있는 육식 금기 계율은 부처님 열반 이후 대승불교에서 정립된 것으로, 부처님 재세 시와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흔히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출가자의 육식이 금지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미 아소카대왕 시절 대승불교가 번성하면서 자비심을 바탕으로 육식을 멀리하고 채식을 권장하는 문화가 인도 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재가신도가 세 가지가 순수한 공양을 올렸는데 스님이 “나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 먹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어라 하셨을까요? “공양물을 하나의 선호의 대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비구는 걸사(乞士)입니다. 걸식은 밥을 빌어 먹는 것, 걸사는 밥을 구걸하여 먹는 사람입니다. 신도분이 제대로 갖춘 공양을 올린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초발심자경문>에도 수행을 하기 위한 이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취하는 것이지 선호와 불호를 따져서는 안 된다고 이르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데바닷타라는 수행자가 육식을 엄격하게 금하는 계율을 제정하자고 부처님께 강하게 건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육식은 개인의 선택일 뿐 계율로 정할 필요는 없다.”고 답했습니다. 부처님 당신은 죽음에 이르는 극도의 고행을 해보신 분이지요. 무엇을 먹고 안 먹고, 혹은 외형으로 내면의 수행을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현대에도 스님들이 절 밖에서 공양을 하는 경우에 오신채가 들어가지 않고 육고기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찾아 먹기는 어렵습니다. 된장찌개 하나만 먹으려고 해도 육수부터 고명까지 현실적으로 고기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식사를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바깥에서 철저하게 육식하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이지요. 엄밀하게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율에 어긋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승불교 문화권에서, 대승적으로 생각하기

다시 대승불교의 관점으로 돌아와서 생각하자면, 일반적으로 스님들은 고기를 안 먹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2,500년 전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육식을 금하는 불교문화가 이어져 왔습니다. 이렇게 면면이 이어져온 우리나라 불교의 특성도 분명히 존중해야 합니다. 마트에서 고기를 사서 공양 올리는 것이 순수하지 않은 공양은 아니지만, 신도분들께서 굳이 고기 공양을 올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고기가 포함되지 않은 공양을 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또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신도들이 스님들을 시험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정성스럽게 고기가 들어간 요리를 만들어서 올리곤 스님이 그것을 먹는지 안 먹는지를 지켜봅니다. 그렇게 올리는 공양은 선업이 되지 않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복을 쌓는다는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시기를 바랍니다.

불자라면 살생을 하는 직종에 종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가급적이면 도축을 하는 것을 업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곤충이나 식물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부처님께서 곤충이나 식물을 특정하여 불살생의 원칙을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관례에 따라서, 대승적 견지에 입각해서 가급적이면 불필요한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요즘 세상은 부처님 당시와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럴 때는 근본정신을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또한 반드시 불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써 계율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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