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기복신앙: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나?

‘기복신앙’이라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기복행위는 인류 문명과 함께 출발했다.
제사장 만능 사회에서 바라문의 권위를 비판하며 기복신앙에 반기를 든 것이 사문이라는 수행자 무리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부처님이다.
기복하더라도 이기심에 바탕한 발원이 아니라 순수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기도해보자. 기도와 축원을 순수한 자비심으로 전환할 때 이것은 이기심의 족쇄로부터 벗어난 수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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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신앙’이라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해방 이후 우리사회가 급격하게 서구화되면서 과학 중심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따르다보니 무당, 점, 굿, 기도, 기복신앙 등 민족의 정서나 전통, 정체성이 담긴 것들은 모두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평가절하 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자로서 기복신앙을 깊이 이해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사고대 인도 바라문교의 핵심

2,500년 전 부처님이 인도에서 음 가르침을 펼 때, 당시 인도사회를 작동하던 기존 종교는 바라문였습니다.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바라문교는 단순한 종교를 넘어 문화였고 인도인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바라문교는 제사를 중시한다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제사를 중시한 끝에 미워하는 사람을 저주하는 제사, 아들을 낳게 해주는 제사를 하게 되는 등 제사 만능주의로까지 치닫게 됩니다.

모든 제사 방식은 각각 다를 뿐더러 복잡하고 섬세합니다. 제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바라문교에서는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이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노하우를 가지게 됩니다. 

여러 제사를 언급했지만 바라문교의 기본 사고방식은 공양물을 태워 연기를 하늘로 보내 선신을 응원하고, 선신이 악신에게 이겨서 사람들에게 이익을 돌려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선신과 악신이 싸우는데, 내가 선신에게 공양물을 올리면서 ‘올해 홍수가 안 나고 농사가 잘 되게 해주세요.’ 비는 겁니다. 선신이 공양물을 받아서 힘을 내 악신을 물리치면 공양물의 대가로 농사가 잘 되게 해줍니다. 

기복인류 문명의 출발

복 복(福) 자를 뜯어보면 신주(위패) 앞에서 술독을 바치고 따르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상형자 자체가 제사 지내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언젠가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서 3,000년 된 엄청나게 큰 청동 단지를 봤습니다. 제사에 쓴 것이었습니다. 

일반 가정도 아니고 국가 차원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이니 단지를 만드는 데에도 얼마나 공을 많이 들였겠습니까.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늘에서 원하는 바를 들어줄 것 아닙니까. 그 단지에 술을 담아서 제사를 지내는데, 술이 맛있어서 올린 것이 아니라 귀한 것이라 올린 것입니다. 백성들은 당장 먹을 쌀도 없는데 그 귀한 쌀로 빚은 것이 술이니 얼마나 값진 것이겠습니까

복의 출발은 비는 것입니다. 이렇듯 제사의 기본은 기복(忌服)입니다.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인류 역사는 ‘이런 이런 것들을 이루게 해달라.’는 데에서 시작했습니다. 중국이나 인도 뿐만 아니라 4대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그랬습니다. 

사문제사와 기복에 반기를 들다 

부처님은 제사 만능주의에 빠져 있던 바라문교를 비판하고 나선 혁명가였습니다. 당시 부처님만 지나친 형식에 빠진 바라문교를 비판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인도 동북부 지역에서 기존의 전통을 부정하고 비판하고 일어난 사문(수행자) 무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사외도라 불렸던 주요 사문들은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궁극적인 행복이라고 주창했습니다. 해탈을 통해서만 궁극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었지만 어떻게 하면 해탈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은 모두 달랐습니다. 

불교는 특별히 열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요. 해탈과 열반은 엄연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탈은 윤회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고, 열반은 번뇌의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문의 무리들이 추구한 것은 기복이 아니라 해탈이었습니다. 이들은 제사를 지내서 행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궁극적인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떤 수행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모두 달랐는데요. 그 중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가 주장한 방법이 가장 진리에 일치했기에 2,500년이 흐른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인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제자백가 시대의 사상가인 순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근심을 없앨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복이다.” 복이라는 것이 제사를 지내고 열심히 빌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근심이 사라지면 그게 바로 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근심은 지나친 욕심에서 오니 욕심만 내지 않으면 복은 저절로 들어온다는 일부의 주장이었습니다. 

수행자가 머리를 깎은 이유 

사문들은 하루종일 수행만 했습니다. 왜? 수행을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사는 게 편합니다. 돈을 좀 벌다 보면 나이 먹고 연금 나오고, 혹은 잘 사는 집에 태어나면 젊어서부터 먹고 놀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습니다. 그런데 2,500년 전에는 하루종일 일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수행자랍시고 농사도 안 짓고 돈 한 푼 벌지 않고 수행만 한다는 것은 일견 자기의 책임을 방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다못해 바라문교의 바라문 계급도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후에야 출가 수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문들은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는데도 출가를 한 거예요. 당시 인도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요. 그러니 사문들은 가족이나 세상과 인연을 완전히 끊고 수행만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야만 했습니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확실하게 구분되어야 했습니다. 

당시 사문들에게는 삭발이 ‘우리는 수행자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징표였습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남자의 경우 삭발을 하는데요. 부모님이 살아있는데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나에게 부모님은 죽은 사람과 같다.’는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사문이라고 반드시 머리를 깎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머리를 깎는 것은 사문의 강력한 수행 의지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2,500년 전에는 일도 하고 수행도 하는 양립이 불가능했습니다. 수행자가 전업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세상과 선을 그어야만 했고, 일을 하지 않고 수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구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남방불교에서는 스님들이 탁발을 하지 않습니까? 수행자는 평생 수행만 해야 하기 때문에 당당하게 음식을 받아서 먹는 겁니다. 

불교에서 흔히 ‘비구는 복전(福田)’이라는 말을 씁니다.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복을 짓는 것이죠. 스님은 여덟 가지 복전 중 하나입니다. 1. 우물을 파는 일 2. 물가에 다리를 놓는 일 4. 험한 길을 잘 닦는 일 4.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 5. 스님에게 공양하는 일 6.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일 7. 재난 당한 일을 구제하는 일 8. 무차대회를 열어 외로운 덕을 제도하는 일. 

이렇게 보면 팔복(八福)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무엇인지 따지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무주상보시를 하는 것이 복을 짓는 일입니다. 

달라진 시대상달라진 기복의 의미

우리 시대는 어떤가요? 우리 시대는 먹고 사는 일이나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자유롭습니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풍요로워졌습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 무언가 명확한 결단을 내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가자로 있으면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나머지 시간에 수행해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2,500년 전과 지금의 차이입니다. 

2,500년 전 수행 환경과 지금의 수행 환경이 다르듯 2,500년 전 기복신앙과 지금의 기복신앙 역시 그 성격이 다릅니다. 현대 재가자들은 기복신앙을 어떻게 수용하고 행해야 하는가? 

정초 7일기도는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적인 기복신앙입니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천수경을 외우고 축원을 하지요.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비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가족들의 안녕입니다. 

강원에 다닐 적에 방학을 맞아서 출가 전에 일하던 대장경연구소에 인사를 드리러 간 일이 있습니다. 직원들과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는데 출가 전에 같이 일했던 똑똑한 친구가 미국으로 시집을 가서 곧 출산을 한다는 겁니다. 큰절로 다시 돌아와서 새벽예불을 하다가 그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그 친구는 한문을 전공해서 박사까지 받았는데 남편 따라 미국에 나가 한인도 별로 없는 동네에 산다고 하니 측은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간절한 마음으로 그 친구가 건강하게 순산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멀리 있는 친구를 위해서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데 모기가 웽웽거리다가 나에게 앉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모기에 물리니까 짜증이 확 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데 이 놈이 분위기를 다 깨네.’ 강원 다닐 때는 모기를 죽이면 안 되는데 순간적으로 화가 많이 나서 모기를 확 잡을 뻔했습니다. 

모순이지 않습니까. 저 멀리 미국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것에 대해서는 간절하게 무운을 비는데, 당장 내 옆에 있는 모기의 생사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게요. 모기가 왜 피를 빨아 먹는가? 암컷들이 새끼를 낳기 위해서는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새끼)를 낳는다’는 것은 똑같은데 그것을 대하는 마음은 완전히 다릅니다. 왜일까요?

이기심에 발목을 잡힌 자비심이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비심입니다. 그런데 이 자비심은 내가 아는 사람에게만 통용됩니다. 내 자식, 내 남편, 내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오히려 어떤 시험 같은 경우는 남의 자식은 떨어지고 내 자식만 합격하기를 바라게 되기도 하죠. 

이렇게 우리 안에 있는 자비심이라는 것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으면 항상 이기심에 갇혀 있습니다. 욕심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정초에는 별다른 노력을 해보기를 제안합니다. 

순수한 자비심으로 기도하기 

기도나 정근을 할 때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축원을 해봅시다. 이기심이 아니라 순수한 자비심을 내보는 겁니다. 정초기도가 끝날 무렵 스님이 축원을 하면서 누군지 모를 사람의 이름을 줄줄 외는데, 여러분도 같이 마음속으로 스님이 명하는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발원해보십시오. 

내가 축원의 방식을 순수한 자비심으로 전환할 수 있으면 이것은 수행이 됩니다. 여러분의 이기심의 족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길이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정초 칠성기도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적인 의식이고 기복신앙이지만 안으로는 나의 수행이며 해탈로 가는 길이 됩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가 아니라 지혜와 자비의 종교입니다. 자비심만 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에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놓치지 않고 관찰해야 합니다. 속으로 ‘내 이름은 언제 부르지?’ 이 생각만 하고 있으면 시간만 흘러가는 겁니다. 

기복신앙인가 아닌가는 형식이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기도하는 당사자의 마음자세에 달려있습니다. 정초기도 회향을 계기로 나의 신앙은 어떠한가를 다시금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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