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에 대하여

티벳불교문학의 정수, 샨티데바 스님의 ‘입보리행론’으로 일깨우는 보리심과 초발심.
깨달음과 열반을 증득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깨달음과 열반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이에 티벳불교에서는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으로 보리심을 강조한다.
보리심이란 보살의 마음이다. 보리심이란 중생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을 버릴 때 나의 중생심과 이기심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다.
나를 좋게 대하든 나쁘게 대하든 오직 나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인연이 생기게 해달라고 하는 것, 이러한 원이 보리심이며 자타일시성불도하는 진정한 보살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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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름처럼 모호한 깨달음과 열반

지난 시간, 불자라면 마땅히 열반을 성취하겠다는 궁극적인 목표 즉 원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깨달음은 진리 중의 진리인 연기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며, 열반은 번뇌의 불길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고도 이야기했습니다.

불자들의 목표가 깨달음을 이루고 열반을 성취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상태를 꼬집어 이야기하면 궁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니 참 애매합니다.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하기 위해서는 그 목표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야 하는데 열반이라든가 깨달음은 뜬구름 잡는 것처럼 모호합니다.

깨달음이 무언지를 잘 모르겠으니까 깨달음을 향해 열정과 욕망, 각오를 다지기가 힘듭니다. 말에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 스님들이 누누이 말씀하기를 초발심을 내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온 생을 다 바쳐서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내고 나면 인생이 공허해집니다. 그 전에는 자식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아주 구체적이고 뚜렷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보내놓고 나자 무언가 뚜렷하게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목표를 제시하기는 했는데 그 목표가 무엇인지 가늠하기가 힘듭니다. 초발심시변정각이라 했습니다. 처음 깨닫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티벳불교의 방편, 보리심

티벳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으로 보리심을 강조합니다. 보리심은 깨달은 마음입니다. 보리심은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했습니다. 보디 사트바는 깨달은 중생이라고 풀이하고, 줄여서 보리살타, 보살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티벳불교에서는 보리심을 내 안에서 끌어내는 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깨달음과 열반에 대해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해해도, 그것만으로는 열심히 수행하겠다는 동기부여를 주는 데에는 부족합니다. 보리심은 이성으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감성으로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수행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초발심시변정각이고 거기에서부터 깨달음의 길로 일로매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티벳에서는 어떻게 보리심을 증장시킬까요? 티벳의 샨티데바 스님이 쓴 <입보리행론>을 참고하면 됩니다. ‘론’자가 붙은 책이라 어렵게 느껴지는데 사실 시집에 가깝습니다. 어떻게 하면 보리심을 낼 수 있는지, 보리심에 대한 원을 세우는 문학적 표현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불교문학의 정수로 불리는 이 책을 보다보면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보살의 길을 가고자 하는 각오와 감동이 밀려옵니다.

티벳불교 입문서 <입보리행론>

제3장 보리심전지품의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고통을 넘어서게 되고

내 마음도 고통이 없는 경지를 이루게 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함과 동시에

그것을 중생들에게 베푸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봉사를 하라, 무주상보시를 하라, 화 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면 중생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착한 일을 하려면 다 같이 착한 일을 해야지 나만 착한 일을 하면 나만 손해보고 나만 고통 받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중생심입니다. 이런 중생심을 털어내고 보리심으로 가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가 내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옆에서 좋은 이야기와 교훈적인 이야기를 해도 ‘세상물정 모르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산티 데바 스님은 말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모든 것에는 무엇이 포함될까요? 명예, 권력, 가족, 재력 모든 것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나 자신, 내 목숨까지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에야 중생심과 이기심이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몸 전체를

중생이 바라는 대로 맡기렵니다.

항상 죽이고 욕하고 때리는 등

무엇을 하더라도 받아들이겠나이다.

내 몸을 가지고 장난질하며

꾸짖고 비웃는 재료로 쓸지라도

이미 이 몸은 그들에게 준 것이니

이를 아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중생이 버려야 할 모든 것에는 나의 목숨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내가 봉사도 많이 하고 보시도 많이 한다고 합시다. 봉사하고 보시하느라고 내 삶이 조금 어려워진 것은 감수하겠는데, 내가 이렇게 당신을 위해 봉사하고 보시하는 것을 왜 몰라주느냐고 하는 것 역시도 중생심입니다. 욕하고 때리는 것마저도 받아들여야만 보리심으로, 깨달은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뿌리박힌 이기적인 중생심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잘 되겠다, 내가 잘 살겠다, 내가 손해 보지 않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그렇게 깊지 않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표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샨티 데바 스님의 시구를 보면서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달라이라마 존자님이 법회를 하면 입보리행론을 함께 낭송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중과 함께 낭송하면 저절로 보리심을 일으키고자 하는 초발심이 우러난다고 하지요. 그렇듯 우리도 입보리행론을 곁에 두고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나이다.

내가 언제라도 기쁨이 될지언정

의미 없는 일이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나로 인해 어느 누구라도

화를 내거나 믿은 마음이 생겨난다면

그 자체가 항상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원인이 되게 하소서

결국 내가 내 몸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는 이유는 중생들로 하여금 영원한 행복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속에 티끌만이라도 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중생들에게 몸을 바친다는 생각이 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나를 나쁘게 말하고

다른 이가 나를 해롭게 하며

그처럼 조롱해도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이 깨달음을 이루는 인연이 되게 하소서.

나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인연이 생길 수 있도록 해달라는 원을 세웁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과 인연 지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축원을 하며 항상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자타일시 성불도입니다. 모두가 다 함께 불도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고 중생이 늦게가 아니라, 중생이 먼저 가고 내가 늦게 가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깨달음을 얻게 해달라는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원을 세우고 실제 행동하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기도하고, 보시하고, 수행하는 모든 것을 중생들에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길입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쁜 사람은 바빠서 바쁘고 한가한 사람은 한가해서 바쁜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를 해야만 하는 것은, 또한 주변에 봉사를 권해야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회와 자리와 여건을 만드는 것은 봉사단체나 주최가 하는 일이지만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안의 보리심은 나 자신만이 일깨울 수 있습니다.

저를 의지할 곳 없는 이의 의지처가 되고

길 가는 이의 안내자 되며

물을 건너는 사람의 배가 되고

뗏목이나 다리가 되게 하소서.

나를 도구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곳에 나를 써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 앞에서 원을 세우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이렇게 행복하게 해주겠어.’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내가 쓰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섬을 찾는 이에게 섬이 되고

등불을 구하는 이에게 등불이 되며

침구를 원하는 자에게 침구가 되고

종을 구하는 모든 이의 종이 되고자 합니다.

언뜻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종교에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뜻하신 곳에 저를 보내시고 당신이 쓰려고 하는 곳에 저를 쓰소서.” 샨티 데바 스님의 마지막 문구도 맥락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본질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종교에서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고 불교에서는 중생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에는 자칫 특정 이데올로기나 특정인의 권력을 위해 이용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샨티 데바 스님은 모든 중생에게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으로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음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 안의 보리심을 일으키는 원을 세워야 합니다. 내 안의 이기심을 털어내고 중생들을 위해 쓰이겠다는 각오를 계속해서 다져야 합니다. 그것이 계속될 때 내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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