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 머릿말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란 멋에 살건마는 살건마는
이몸은 언젠가는 한줌 재가 아니리
묻노라 주인공아 어느것이 참 나런고?
나란 정의와 한계와 가치를 알고
올바른 길을 택하여 진실한 희망의 길로 갑시다.”
빈소(殯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잘났다고 성화지만 결국 언제가는 죽어서 한 줌 재가 됩니다. 얼마 전에 스님 한 분이 입적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에 조문을 갔습니다. 그 스님은 나이가 많아 가신 것이 아니라 5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적은 나이도아니지만 많은 나이도 아니지요.
보통 큰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절에다 빈소를 차리고 절의 주관 하에 5일장을 치르기 때문에 ‘이 양반이 돌아가셨구나.’라는 생각보다는 ‘큰스님께서 열반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노환이 아니라 기저질환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빈소는 병원 장례식장에 차리고 다비만 송광사에서 진행했습니다. 절에서 치르는 5일장이 아니라 일반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간 것이 오랜만이어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조문을 갈 때는 들어가기 전에 나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여건 그리고 고인 내지는 유족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관례적으로 정해진 조의금을 준비합니다. 조의금을 내고 그 다음에 빈소에 들어가서 조문을 하고 유족들과 짧은 이야기를 하고나오는데요. 여기에서 바로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기도 하고 간단하게 차나 음료수를 마시면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 정도 머물러 있었으면 충분하다, 고인과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나의 정성이나 애도의 마음을 충분히 보여줬다 싶으면 조문을 끝내게 됩니다.
조문이라는 것, 추모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관례화되어 있습니다. 조문을 하는 것은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공간에 가서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을 나누는 것인데요. 실제 행태를 보면 고인의 명복을 빌거나 유족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2~3분이면 끝납니다. 다음 조문객이 들어오니까 빨리 자리를 비켜주는 게 유족을 도와주는 것이기도 해요. 그 후에는 30~40분 정도 테이블에 앉아 지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오랜만에 만난 겹지인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각자 근황토크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충분한 시간 앉아있음으로써 성의 표현을 했다 싶으면 자리를 뜨는 것이 보통의 순서입니다.
지금 내가 죽는다면 나의 빈소 풍경은?
이번 조문길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큰스님이 아닌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내 장례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겠구나. 전대나 조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려 3일장을 하고 송광사에서 다비를 하게 되겠구나.’
그러면서 잠시나마 고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일 내가 죽어서 나의 유족들이 빈소를 차렸는데, 정작 조문 온 사람들은 나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생전의 나를 추억하기보다 지인들하고 이야기 하기 바쁘다면? 돌아가신 분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서운한 일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슬픈 사람들은 유가족입니다.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초상 기간 동안은 이런저런 복잡다단한일들이 많아요. 사망신고서를 발급하는 것부터 장례식장 잡는 것, 입관 시간, 매장할 것이나 화장할 것이냐 등등. 상조회사란 것이 있기는 해도 역시 복잡합니다. 이런 가운데 앉아 있을 시간도 없이 조문객을 맞이해야 하니 슬퍼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상 치르는 동안에는 유가족들도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하고 슬퍼할 시간이 없는 것이지요.
내가 고인이라면 본인의 빈소만큼 서운하고 섭섭한 자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문객들은 와서 생색만 내고 자기이야기 하기 바쁘고, 유가족들은 바빠서 정신이 없습니다. ‘이 자리는 내 마지막 길을 위해 있는 자리인데, 나의 죽음이 주제가 아니네.’ 하는 거죠.
죽음, 세상과 타인에게서 사라지는 것
죽음은 내가 사라지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이걸 잘 모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남의 죽음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죽음은살아서 경험할 수가 없어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죠. 죽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빈소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일상은 하나도 변하는 게 없습니다. 사람들은 잠깐 조문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는 그들의 기억에서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내가 사라져도 이 세상은 내가 있을 때와 변함없이 굴러가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일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흘러갑니다. 내가 빈소의 영정사진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명확하게 다가올 겁니다. 장례식은 형식적으로 고인을 위한자리이지만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한 자리를 만든 겁니다.
죽음이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지는 것이라면,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스스로가대답을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조금이라도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삶은 1인극 판토마임
제가 생각할 때 인생이란 1인극, 판토마임 같은 것입니다. 배우가 혼자 나와서 말을 하지 않고 동작과 표졍만으로 연기하는 것을 판토마임이라 합니다. 관객들은 배우의 동작과 표정을 보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템플스테이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삶의 고충을 하소연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식이 먼저죽어서 이 아픔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자식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자해를 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막막하다거나, 몸이 아픈데 그 병의 원인을 의사들도 모르니 참 답답하다거나.
다른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들을 전해 들으면 ‘참 안됐다. 참 힘들겠다.’라고 짐작은 하지만 그 고통이나 슬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는 없습니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화내고 우울해 하는 모든 감정들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판토마임 배우를 관람하는 관객처럼 나의 행동이나 표정을 보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짐작할 뿐, 내가 느끼는 감정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연극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배우와 배우의 표현에 빠져들지만, 연극이 끝나고 나면 관객들은 자기의 일상생활로 돌아갑니다. 어느 날 누가 연극 이야기를 하면 다시 떠올리기는 하겠지만 항상 그 연극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연극이끝나면 배우와 관객의 관계도 끝이 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내 뜻대로 해주기를 바라고 챙기고 위하고 때로는 혼을 내도, 자식에게는 자식의 삶이 있고나에겐 나의 삶이 있습니다. 우리 삶은 1인극 판토마임 같아서 남의 인생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내 뜻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고 우울해하고, 슬퍼하거나 기뻐합니다.
무아를 아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법
마치 연극이 끝나면 연극과 관객과의 관계도 끝나버리듯,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몰라도 내가 죽고 나면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겁니다. 내가 죽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이걸 잘 모릅니다.
흔히 하는 말로 ‘태어나는 데에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가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평소에 나의 빈소를 마음속으로 차려보아야 합니다. 조문객이 오는 상상을 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고 난 자리에서 그들은 내 얘기는 별로 안 하고 저들 사는 이야기를 하겠지. 그렇다면 지금 내가 아둥바둥하는 이 삶, 내가 그렇게나 챙기고 잘해보려고 하고 아쉬워 하고애지중지하는 내 삶이란 무엇인가? 죽는 순간에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겁니다.
불교의 핵심은 무아입니다. 무아는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무명으로 가득 찬 아상을 털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지금 고인의 입장이 되어서 나의 빈소를 차리는 상상을 해보아야 합니다. 나에 대한 애착,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잘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수행에 다르지 않습니다.
열심히 참선하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일상생활에서 나에 대한 집착을 털어내는 것만큼 불교를 제대로 실천하는 게 없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