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반야심경

반야심경 해설 6 반야심경의 구성과 의미

앞선 다섯 시간에 걸쳐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 반야심경의 전체를 요약하고 있으며, 팔만대장경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를 누차 드렸습니다. 오늘은 반야심경의 구조를 알아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다시 첫 번째 문장으로 돌아가서, 이 분장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문장은 세 구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문장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 두 번째 문장은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았다.’, 세 번째 문장은 ‘온갖 고통에서 건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온갖 고통을 건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보면 된다.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면 된다.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날 것인가?

이 말은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라는 문장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볼 수 있을까요?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너무 압축적이라서 듣는 사람이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 뒤에서 부연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명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템플스테이에 온 참가자들이 저에게 흔히 하는 질문이 이런 것입니다. ‘불안을 털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때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그 이유는 괴롭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불안한데 전혀 괴롭지 않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불안 자체가 고통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마음이 불안한데, 불안한 감정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그에게 일러줄 수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예를 들면 반야심경의 첫 번째 문장과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나요?’ 행복한 인생은 괴롭지 않은 인생입니다. 괴롭지 않은 인생을 사는 방법 또한 같은 대답입니다. ‘어떻게 하면 화를 참을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참을 수 있나요?’ 라는 질문은 반야심경의 첫 번째 문장을 거꾸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질문들이 말하는 바는 모두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와 같습니다.

고통, 괴로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욕심을 먹고 사는 중생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감정들입니다. 이런 감정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오온이 공한 것을 깨닫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면 됩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실은 심오한 교리라기보다는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 겪는 희로애락 애오욕을 어떻게 하면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반야심경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우리 인생의 처세술에 다름 아닙니다.

오온이 공한 것은 오온이 연기한다는 뜻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니라.

색 수 상 행 식은 오온이지요. 두 번째 단락은 첫 구절에서 나오는 오온을 부연설명하는 것입니다. 오온이 공하다는 말을 풀어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지난 시간 공(空)이라는 말에 현혹되면 안 되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공은 아무 것도 없거나 텅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연기입니다. 연기는 모든 것들은 무언가에 의지해서 생기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단어나 개념을 들으면 머릿속에 먼저 공간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습관이 있습니다. 공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어있는 잔, 텅 빈 방을 생각하지만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무언가에 의지해서 생기고 사라지고, 그물망처럼 얽히고설켜있는 것이 공입니다. 왜 공이라는 표현을 쓰냐하면, 자성이라고 할만한 게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색수상행식이 공하다는 것은 색수상행식이 연기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어떤 한 나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땅에 의지해야 하고, 땅 속 수분에 의지하고 있고, 햇빛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의지해야만 나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색은 연기하는 존재라는 것을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고 표현했습니다.

반대로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떠나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세계가 연기하는 세계라고 한다면, 이 세계 넘어 무언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어서 이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기는 없는 것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이며, 공은 연기를 말합니다.

위의 두 번째 단락은 오온에 대해 설명하거나 공에 대해 설명한 것이 아니라 오온은 색수상행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부연설명이지요. 이어지는 세 번째 단락에서 공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나고 멸하는 것 또한 마음속 이미지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모든 법은 다 공하며, 공하다는 것의 특징은 이러이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이 공의 특징입니다. 이 역시 첫 번째 문장에서 나오는 공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법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공하기 때문에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세상에 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부처님은 분명 생주입멸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더운 여름날 김치찌개를 먹다가 냉장고에 넣지 않고 바깥에 두면 상하지 않습니까? 변하잖아요. 세상의 모든 건 이렇게 변합니다. 그런데 모든 법은 공해서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 그렇다면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은 나고 멸하고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무언가가 있구나!’ 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공이구나!’ 하고요. 그런데 그 말이 아니고요. 여기에서 법은 연기실상을 말합니다. 실제 이 세계, 진리의 세계, 내가 보건 보지 않건 있는 세계입니다. 인식되기 이전의 세계 자체는 생기고 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세계는 공합니다.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깨끗했다가 더럽다가 늘었다가 줄지 않습니다.

법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쓰이는 데요. 여기에서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불교에서는 ‘틀’을 말합니다. 시계라고 생각하게 하는 머릿속의 틀. 컵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틀이 있습니다. 사실 정해져 있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틀일 뿐인데, 우리는 실재 존재하는 그 무엇을 내가 붙인 이름으로 착각합니다. 현실에 있는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실상의 세계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고 멸하고 더럽고 깨끗하고 늘고 줍니까? 우리 머릿속에 있는 틀입니다. 우리 머릿속에 정해져 있는 틀을 현실 세계라고 착각하니까 현실 세계가 변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할 때, 일체라는 것은 실제 있는 현실의 세계, 진여의 세계, 연기실상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인식활동과 이 세계의 무언가가 서로 의지해서 내 마음속에 만들어낸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미지와 실재를 착각하는 것입니다.

공에는 12처도 18계도 12연기도 없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색수상행식, 오온이 공 안에는 없다는 이야기와 안의비설신의 육근 역시 공 안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을 합쳐 십이입처 또는 십이처라고 합니다. 즉 공 안에는 십이입처도 없다는 것이지요.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는 것은 18계를 말합니다. 이 십팔계도 공 안에 없습니다.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12연기는 무명으로 시작해서 노사로 끝납니다.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의 순서로 가면 유정문이고 역순으로 가면 환멸문이라고 기초교리 12연기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공 안에는 12연기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고집멸도도 없다고 합니다. 고집멸도는 사성제입니다. 공 안에는 사성제도 없다는 말이지요. 공 안에 이러이러한 것들은 없으며, 앞서 언급한 것들은 공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언수행으로써 완성하는 지혜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반야바라밀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이고 육바라밀 수행을 하는 것과 같고 팔정도 수행을 하는 것과 같다 했습니다. 즉 불교의 수행을 말합니다. 지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 단락에서는 수행을 하면 그 결과 이러이러한 것을 얻어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첫 번째 문장을 거꾸로 설명한 것입니다. 앞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이어지는 진언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독려의 말입니다.

이 진언이 왜 반야부 경전에 들어왔을까요? 반야심경은 초기대승불교 반야부에 속한 많은 경전 중 가장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반야부는 부파불교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불교로 거듭나자는 차원에서 등장했습니다. 일반 신도, 대중과 함께 하자는 것이 모토였기 때문에 당시 인도사회의 보편화되어 있던 힌두교적인 문화나 의식을 수용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언을 외우는 진언수행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진언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 진언은 본디 인도말인 ‘갓데갓데 바라갓데 바라상갓데 모지 스와하’라는 발음을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렇듯 반야심경은 맨 처음에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오온을 부연설명하고, 공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공의 핵심을 부연설명하고, 이후 수행의 방식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면서 마무리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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