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불안이 너무 심하면 의료적 치료가 필요하고, 불안이 너무 없으면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다.
불안은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내보내는 신호로,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적인 감정이다.
중생은 ‘나’를 지키기 위해 불안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나를 지키고자 하는 뿌리 깊은 생각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을 피하라는 신호가 불안한 감정으로 표출된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나를 지키는 데에서 나아가,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생한다. 때문에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내 안에 뿌리 깊은 나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직시해야 한다. 그 방법은 일상 속 수행이다.

#두려움, 불안, 수행, 의지, 죽음

https://www.youtube.com/watch?v=lf5ZXeEo_-Y

불안은 위험을 피하라는 신호

이유는 모르겠지만 항상 무언가 불안한 상태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불안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대표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말을 할 때,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 무언가 노력하고, 노력하다 보면 무언가 성취해내기 때문에 미래가 보다 확실해 집니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는 위험요소를 앞에 두고 정면 돌파하거나 회피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합니다. 결국 불안의 핵심은 나에게 다가오는 위험 요소를 극복 혹은 회피하라는 신호라는 것입니다. 

불안은 다만 신호이기 때문에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불안하다는 신호를 주어서 무언가를 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 생활에 필수입니다. 아무리 불안감을 털어내려고 해도 완전히 털어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호가 너무 작으면 너무 만사태평하고 느긋해버립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고 불만이 없는 사람은 반대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없습니다. 발전이 없지요. 반면 불안 너무 크면 정신적으로 장애가 옵니다. 병원에 가서 약을 통해 불안감을 낮추는 것이 시급하지요. 불안은 너무 강해도 너무 약해도 안 됩니다. 

고양이가 다람쥐를 잡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까? 다람쥐가요, 고양이가 자기를 노리는줄 모르면 아무렇지도 않는데 고양이와 눈이 마주쳐버리면 얼어붙어서 꼼짝도 못합니다. 고양이는 그냥 얼어 있는 다람쥐를 물어갈 뿐이지요. 사람도 동물도 너무 불안하면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립니다. 

불안을 다스리는 다양한 방법

인간이 가지는 불안 중 가장 큰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인이 60대 초반인데 자식들이 다 커서 결혼할 때가 되니 그 감당을 어떻게 할지 답답하고 불안하다고 말입니다. 또 어떤 20대 젊은 친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평생직업이 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고 앞날이 불안하다고 합니다. 

미래가 불안한 것은 알지 못해서 입니다. 우리는 다 미래를 모르니까 우리 삶에서 불안은 피할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굳이 불안한 감정을 버거워하고 벗어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불안은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안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신과의사들이 하는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첫 번째,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올바르게 돌아보고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고요. 두 번째, 본인이 확실하게 해낼 수 있는 과제를 만들고 그것을 해내라고 합니다. 해낼 수 있는 과제를 설정한 후 실천하면 성취감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으며, 그만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인 것 같은데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비만이 심해서 당장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에 즉시 20킬로그램을 빼야 한다고 합시다. 위의 해결책에 따르면 지금부터 푸쉬업을 두 개씩만 해보라는 거거든요. 오늘은2개,  내일은 4개, 다음날은 6개. 이렇게 하다보면 한달 뒤에는 푸쉬업 50개를 할 수 있겠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살이 빠질 테니까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맞는 이야기인데요. 문제는 안 한다는 겁니다. 하루 푸쉬업 2개, 3개를 해서 무슨 효과가 있겠어? 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수용하는 정보는 마음이 그린 이미지라는 말씀을 여러 번 드렸었는데요. 머리는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정보를 똑같이 정보로 받아들입니다.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매일 푸쉬업을 두 개씩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두뇌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이미 푸쉬업 두 개를 한 것이나 나름 없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이미 해버렸으니까 실제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불안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두려움을 왜 느끼는가? 내가 다칠지도 모른다,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두려움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생각들에는 모두 주어가 있습니다. ‘나’입니다. 나를 지키고자 하는 뿌리 깊은 생각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내 안에서 불안한 감정이 신호가 되어 나옵니다. 출발은 나를 지키고자 하는 뿌리깊은 생각입니다. 

중생은 ‘나’라고 하는 놈을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불안을 먹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이 말은 불교에서 늘 말하는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이 명제를 제대로 알고 실천한다면 불안을 내 삶의 동력으로 삼지 않아도 됩니다. 

행자 때 마주한 평안 

제가 60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주 특별했던 기간이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9개월간의 행자생활 중 처음 3개월 정도가 아주 특별했고요. 두 번째는 2년 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1개월 정도의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행자생활을 돌이켜봅시다. 저는 출가를 하면서 ‘이 사회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만 빼면 거진 모든 것을 해봤으니 사회에 미련이 없고, 하나의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경험은 다 해봤으니 출가한 지금부터는 서비스로 사는 인생이라는 생각을 언뜻 했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깎고 행자가 되었는데, 내가 보기엔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너무 많이 생기는 거예요. 예를 들어 스무살도 안 되는 사람이 나에게 반말을 하면서, 참회를 하라면서, 성질을 내는 상황을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 하지 않습니까. 출가 초기에는 이런 일들이 엄청나게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덤으로 사는 것인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라고 생각하니까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말이 안되는 상황이 닥쳐도 ‘그런가 보다’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수행이 되는 거예요. 상행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런 상황들이 모두 수행이 됐습니다. 

그런데 상행자가 되는 순간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밑 행자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당연하고, 행자들이 이러이러하게 행동해야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원하는 게 있고 바라는 게 있고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들이 드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행자 초기에는 나 자신을 지켜야겠다는 애착 같은 것이 다른 때에 비해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행자라는 존재가 사람 대접을 못 받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행자가 큰스님보다 귀하다지만 우리 때는 널린 게 행자라서 사람 대접을 안 했어요. 처음에는 그것이 좀 당황스럽다가 시간이 지나면 ‘아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였구나. 뭘 이런 일 가지고 성질을 낼 필요가 있나.’ 하면서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집착이나 애착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겁니다. 

제가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가 저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몸은 제일 힘들었지만 마음은 애착과 집착이 줄어들어 가장 편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바라본 것 

재작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입원해 있을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잠잔 기억 말고는 다른 기억이 없습니다. 퇴원하고 나서 보름 정도 지나고 나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요.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너무 바쁘게 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물론 내 몸이 너무 쇠약해진 상태라 일상에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줄어든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사람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엄청 바쁘게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다녀오고 보니 죽는다는 게 별거 아니구나, 평범한 하루를 살다가 그냥 사람이 죽는구나 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평범한 하루를 살다가 갑자기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경험을 하여 어마어마한 고통과 슬픔이 찾아오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일시적으로 사라진 상태였던 겁니다. 그렇게 일시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고 나니 다른 사람들이 생활하는 것이 달리 보인 겁니다. 그때 제가 받은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토끼가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아무 생각 없이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지 않습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주위를 경계하면서 풀을 뜯습니다. 언제 잡아 먹힐지 모르니까 불안이라는 신호를 계속 보내야 하는 것이지요. 퇴원 후 보름 정도, 일반적인 생활로 돌아가기 전에 제가 느낀 사람들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어떤 불안감에 끌려다니는 모습이요. 

그 불안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미래에 대한 불안보단 더 근본적인 불안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불안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지내는 것 같지만 제 경험에 비춰봤을 때 우리들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순간 내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한 채 살아갑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두려움을 직시하라 

정리하겠습니다. 불안의 근본 원인은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요 둘째,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불안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신과 의사들이 이야기하듯이 내 감정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직시하는 수행을 하거나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도의 과제를 만들어서 불안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보다 불교적이고 근본적으로는 내 안에 뿌리 깊은 나에 대한 애착,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직시를 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불안을 우리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서 살지 않아도 됩니다.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며 무명에서 벗어나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비롯한 조사스님들이 그렇게 깨치라고 강조한 이유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자라면 최소한 일상생활에서의 수행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어떤 수행을 하든 수행의 끈을 놓지 말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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