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해와 무아사상  

2020년 여름, 증심사는 수해를 입었다. 연이틀 퍼붓는 비에 건물과 진입로, 배수로 등에 피해를 입은 것이다. 피해 당사자가 남이 아니라 내가 되는 순간 이성은 사라지고 감정이 앞선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모든 초점이 ‘나’로 모아진다.
내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자연의 온갖 변화 앞에서 분노하고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마음만 들끓을 것이다. 자연재해 앞에서 파국으로 가지 않으려면 내가 있다는 생각에 눈 멀어 있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수행이 곧 지구를 정화하는 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공동체, 무아, 알아차림, 자연재해

장마 중 햇볕을 보고 하는 생각

최근 전지구적으로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자연재해에 임하는 불자들의 마음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올해(2020년) 여름, 광주 지역 곳곳에 크고 작은 수해가 발생했습니다. 증심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템플스테이 지하동이 침수되면서 많은 비품을 못 쓰게 됐고, 일부 구간에는 산사태가 났습니다. 공양간 쪽으로도 많은 흙이 쓸려 내려와 다음에 내릴 큰 비에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주말 사이 내린 큰 비로 스님들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시설을 점검하고 임시 배수로 작업을 하는 등 고된 날들을 보냈지요. 비가 오다가 잠깐 그치고 햇살이 쏟아졌습니다. 쫄딱 젖은 채로 대웅전 앞마당을 지나다가 평화롭게 내리쬐는 햇볕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가증스럽다!’

이틀 동안 끝도 없이 비가 퍼붓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면몰수하고 환한 하늘을 보여주니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날 친구와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고 할 때, 술에 취한 친구가 난동을 부리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다가 잠들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필름이 끊겨 전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 친구가 맑은 얼굴로 “잘 잤어?”라고 말할 때의 심정이라고 할까요?

비가 내리는 이틀 동안 걱정과 고생에 잠 못 이뤘는데, 다음 날 태풍이 올라온다는 예고에 걱정이 태산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하늘이 보이니 ‘해도 너무한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비단 증심사만 그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수해를 입으신 분들의 심정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왜 큰 비가 내렸고 이례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나요? 지구온난화와 환경파괴로 인하여 전지구적인 기후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지구가 병들어서 몸부림치는 와중에 피해를 입은 거야.’라고 알고 있는데, 마음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라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행위는 있되 작자 없음을 모르기에 치미는 분노

부처님 말씀에 이르기를, 행위(行爲)는 있되 작자(作者)는 없다고 했습니다. 쉬운 비유로 하면 이렇습니다. 불이 있어서 불타오르는 것이 아니고 타오르니까 그것을 불이라고 할 뿐입니다. 강이 있어서 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물이 있으니 강이라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똑같은 논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봅시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화내고 슬퍼하고 웃고 기쁜 것이 아니라, 화내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걷고 뛰니까 편의상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웃고 울고 슬퍼하는 것들은 번뇌입니다.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것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노력하면 제거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내 마음은 시종 변하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비가 와서 산사태 피해가 난 후에 산사태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를 살펴보려고 산에 올랐습니다. 올라가면서는 분노 같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산사태 네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우리를 고생시키나?’ 하는 억하심정이었습니다. 올라가는 도중에는 ‘해가 지고 있는데 계속 올라가도 될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막상 산사태 시작점에 다다라 그 상태를 확인하자 쾌감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그 난리를 치나 했더니, 직접 보니 별 것 아니구나!’

그 자만감에 인근 지형을 더 살펴야겠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수풀을 헤치고 10여 미터를 갔을까요? 사위가 깜깜해지고 발밑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해가 진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올라온 길을 제대로 내려갈 수도 없었지요.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산사태 시작점을 찾았을 때 기분은 어땠을까요? 안도감이었습니다. 산사태는 그냥 산사태일 뿐인데 나 혼자서는 화가 났다가 불안했다가 자만심에 빠졌다가 두려웠다가 안도감을 가집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자연재해가 숱하게 생길 것입니다. 장마도 그렇고 코로나도 그렇지요. 이런 것들이 내 일로 닥쳐올 것입니다. 뉴스에서 자연재해를 볼 때는 조금 걱정은 해도 곧 무심해지고 맙니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수해를 당하고 나니 갖가지 감정이 생겨납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에 눈 멀어버리면…

내 일이 아닐 때는 현명한 생각을 합니다.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들이니까 환경오염을 하면 안 되겠구나.’ 라고요. 정작 내가 비 피해를 입고 나면 그런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감정이 치밀어 오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왜 그럽니까? 내가 있다는 생각이 그러한 감정을 내세우게 합니다.

행위는 있으되 작자는 없다는 말을 평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화나고 기쁘고 슬프고 먹고 마시고 뛰는 것을 임시로 ‘나’라고 부를 뿐이라는 것을요. 먹고 마시고 기쁘고 슬퍼하는 일련의 흐름이 나라면, 비 피해를 입은 일 조차도 일련의 흐름일 뿐입니다. 그런 일이 그냥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라고 분노합니다. 내 편의가 가장 우선시되면 앞뒤를 따지지 못하게 됩니다. 나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그러니 장마 중간에 잠깐 내리쬔 아름다운 햇살을 보고 화를 내게 된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번뇌심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실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나라는 것이 눈이 흐려져서 자연재해와 기후 위기 바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의 수행이 곧 지구를 살리는 길

앞으로 자연재해는 나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분노하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불안해할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불안합니다. 자연이 왜 이렇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 또 자만한 것입니다. 과학으로 그 이유를 규명했다고 생각되면 자연을 경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은 또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가 힘들면 자연을 파헤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악순환입니다. 이런 순환이 계속되면 우리 앞에 남은 것은 파국뿐입니다.

자연재해 앞에서 파국으로 가지 않으려면 ‘내가 있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서 파국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가 됐을 때 이성을 잃는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나’라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나라는 놈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나라는 놈에게 조종당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바로 아는 것이 병든 지구를 그나마도 회복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나의 수행이 곧 지구를 살리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편의, 나의 감정에 눈멀지 맙시다. 나라는 허깨비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맙시다. 그것이 바로 지구를 살리는 길입니다.

Previous

영가전에 5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7

Next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