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문 해설 5

불교에서는 선우(善友)를 사귀고 악우(惡友)를 멀리하라고 말한다. 좋은 도반이 없거든 차라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수행하라는 구절도 있다. 요즘은 처세술의 일환으로 이러한 말을 ‘손절’이나 ‘관계 끊기’의 근거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기실 이 말의 전제는 스스로가 충실한 수행자라는 데에 있다.
스스로를 수행자로 규정지어도 여러 현실의 여건상 타인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짓고 부러 가까이 하거나 부러 멀리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선우나 악인으로 분별하기에 앞서 스스로가 충실한 수행자인지를 살펴보고, 누군가를 분별하는 데에 나의 욕심이 개입되지는 않았는지 가려보아야 한다. 좋은 것을 가까이 하는 것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 수행에 전념하기 위함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 수행, 알아차림, 의지

https://youtu.be/ZP3icue_eGw

“나쁜 친구 사귀지 마라”… 그 말의 전제

넷째, 다만 좋은 벗을 사귀고 나쁜 벗은 맺지 말지니라. 새가 쉬려고 할 때는 반드시 숲을 가리고, 사람이 배우고자 할 때는 스승과 벗을 가리나니, 숲 속의 나무를 고르면 머무름이 편안하고 훌륭한 스승과 벗을 만나면 배움이 높아지느니라. 그러므로 선우를 받들어 섬기기를 부모처럼 여기고 나쁜 벗은 원수처럼 멀리해야 하느니라.

학은 까마귀를 벗하지 않거늘 봉새가 어찌 뱁새와 어울리리오. 소나무에 의지한 칡은 바로 천 길을 솟고 띠 풀 속에 선 나무는 삼척이 고작이니, 어질지 못한 소인배는 언제든지 멀리하고 뜻을 얻는 고덕은 항상 가까이 할지니라.

송하여 이르되 가고 오고 머물 적에 좋은 벗을 가까이 해 몸과 마음 굳게 잡아 번뇌 장애 없애리라. 번뇌 장애 다 쓸어서 홀연히 밝아지면 서 있는 그 곳에서 조사 관문 뚫으리라.

선우(善友)를 사귀고 악우(惡友)를 멀리하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자, 살아오면서 자녀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의 전제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경우에 선우를 가까이하고 나쁜 벗은 멀리 하라고 했는가, 그 전제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최초의 불전인 숫타니파타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행이 뛰어나고 나보다 훌륭한 벗은 가까이하고 만약에 주변에 나와 같거나 나보다 뛰어난 법안이 없다면 과감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쁜 벗과 함께 할 바에는 차라리 혼자서 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한편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도반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부처님이 대답하시기를 “도반이 전부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도반이 그냥 중요하거나 아주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수행의 전부를 결정할 정도로 정말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전제는 ‘수행자’…그리고 현실의 수행 환경

앞서 수행에 도움이 되는 도반이 아니라면 차라리 혼자서 수행하라고 한 이야기의 전제는 ‘수행자’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수행자라면, 속세의 모든 인연과 욕망을 버리고 진리를 깨우치고자 마음먹고 출가를 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선우를 가까이 하는 것이며, 그것이 당신의 수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도반이 없다면 혼자서 수행을 하라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의 전제는 ‘수행자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출가를 하면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러려고 출가를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출가를 한 모두가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닙니다. 자의 반 타의 반 소임을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로 수행과는 잠시 거리를 두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출가하지 않은 재가자의 경우도 그럴 것입니다.

선우를 가까이하고 악인을 멀리하라는 이야기는 일종의 처세술로 누구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처세술의 추세는 ‘네 감정이 원하는 대로 하라. 보기 싫은 사람과 굳이 고통스러워하면서 관계를 이어갈 필요가 없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보기 싫으면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손절하라는 식입니다. 이런 접근에는 수행자라는 전제가 빠져 있습니다.

내가 수행자로서 앞으로의 삶을 오로지 수행에 매진하겠다고 한다면 부처님의 말씀이 백번 맞습니다. 수행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멀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될까 말까 한 것이 수행인데, 그저 함께 놀러 다니고 만날 차를 마신다고 하면 공부는 어느 세월에 하겠습니까?

뜻대로만 할 수 없는 중생의 세계

수행에 매진하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출가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꼭 출가승이 아니더라도, 파이어족으로 젊을 때 재화를 넉넉하게 벌어놓았거나 정년퇴직을 해서 연금이 나오는 등 당장 경제생활을 하지 않아도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면 누구든 수행에 일로매진할 수 있습니다.

출가를 했다, 안 했다는 부차적입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스스로를 수행자로 규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나 자신을 수행자로 규정한다면 부처님 말씀이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단지 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주변 사람을 멀리 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배우자는 어떻습니까? 배우자와 몇 십 년을 함께 사는데 소통이 안 되고, 밖에 다녀와 나를 만나기만 하면 사소한 것을 시키니 짜증스럽고, 화가 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수행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나에게 고통만 주는 사람이 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 수행자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혼해야지요.

자식 이야기도 해볼까요. 자식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 취직도 못 하고, 종일 방에서 컴퓨터만 하고 있고, 아직도 용돈을 줘야 하고, 사업이라도 시작하면 있는 돈 없는 돈 다 지원해주어야 하지요. 이런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 원수 같이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적 관점에서 이런 자식은 호적을 정리해야 합니다.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멀리 해야 하지요.

문제는 현실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연이 얽히고설켜서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가까이하고, 저 사람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멀리할 수가 없습니다. 처세술이 말하는 대로 모두가 쉽게 손절한다면 이 세상은 망할 것입니다.

인생을 고(苦)롭게 하는 것, 스스로의 욕심

중생세계는 거미줄처럼 엮여있습니다. 나는 좋은 뜻으로 했는데 그게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나름대로는 좋은 뜻으로 무언가를 행했는데 나에게는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중생세계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불자로서 수행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정신과 의사는 인생을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방법을 세 가지로 정리했더군요. 첫째, 타인에게 기대하지 말라.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지적을 하지 말라. 셋째, 인생의 목표를 너무 크게 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안 되어서 못하지 않습니까.

타인에게 기대하지 말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내가 잘 모르는 타인이라면 애초에 별 기대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타인은 나와 아주 가까운 타인입니다. 나의 둘도 없는 자식입니다. 어릴 때는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들었는데 나이를 먹더니 인생이 잘 안 풀립니다. 그렇더라도 자기 자식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버릴 수 있습니까? 그러기는 어렵지요. 이처럼 타인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적을 멈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왜 이럴까?’ 라는 생각이 수시로 듭니다. 더 잘 할 수 있는데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뭔가 모르게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크게 잡지 말라는 말도 생각해볼까요. 다이어트를 할 때 ‘살을 한 달 동안 5킬로 정도는 빼야지!’ 하지 말고 ‘이번 달은 1킬로를 감량해보자.’ 하라는 것인데요. 그렇게 하면 성에 안 차지요. 단기간에 쫙 빼서 옷태도 나고, 좀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납니다.

선우를 찾는 것보다 먼저 마음을 들여다 보자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어디서 출발하고 있는가 하면, 욕심에서 출발합니다. 타인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처럼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적도 내가 지금보다 더 훌륭한 모습이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미래의 목표를 허황되게 잡거나 비현실적으로 크게 세우는 것 역시 내가 원하는 바를 빨리, 당장, 원하는 만큼 이루기를 바라는 욕심입니다. 이런 것들은 내 마음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가 욕심내고 있을 뿐이지요.

중생세계에서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자의 반 타의 반 이런저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악인을 멀리하고 선인을 가까이하는 것이 마음대로 안 됩니다. 이럴 때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멀리 할 악인이 누구이고 가까이 할 선인이 누구인가를 구별하기보다, 내 마음의 욕심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우나 악우에 대한 판단보다, 내가 타인에 대한 기대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상처입히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허황되고 실현하기 힘든 먼 미래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런 목표를 이루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의 욕심을 점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중생세계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지침일 것입니다.

질문의 출발, “나는 충실한 수행자인가?”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악인은 멀리하고 선우는 가까이하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첫째, 중생세계에 발생하는 모든 고통은 내 마음의 욕심에서부터 비롯되더라 하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판단하기에 앞서 내가 내 마음 속의 중생심을 잘 살피고 있는가를 먼저 보고, 내가 불자로서 주어진 조건 속에서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스스로 수행자로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전제가 이뤄진 후에야 어떤 사람이 나의 수행에 도움이 된다, 안 된다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점검하는 이 두 가지를 간과하고서 타인에 대하여 선우니 악인이니를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의 중생심만을 키우는 일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나의 욕심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내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여 주변 사람들을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새가 쉬려고 할 때는 반드시 숲을 가리고, 사람이 배워야 할 때는 스승과 벗을 가린다. 숲 속의 나무를 고르면 머무름이 편안하고, 훌륭한 스승과 벗을 만나면 배움이 높아진다.

이런 표현도 참 멋있는 표현입니다. 평소에 마음속에 새기고 있으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아주 도움이 됩니다. 칡은 저 혼자서는 꼿꼿하게 올라가지 못합니다. 옆의 다른 나무에 의지해서 올라갈 수밖에 없지요. 이 때 의지하는 나무가 소나무같이 쭉 뻗은 나무면 칡도 쭉 뻗어나가는데, 주변이 풀숲뿐이라면 자라봐야 고작 삼척밖에 못자란다고 합니다. 어떤 친구들과 함께하는가가 얼마큼 중요한지를 이처럼 멋진 표현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송하여 이르되 가고 오고 머물 적에 좋은 벗을 가까이 해 몸과 마음 굳게 잡아 번뇌 장애 없애리라. 번뇌 장애 다 쓸어서 홀연히 밝아지면 서 있는 그 곳에서 조사 관문 뚫으리라.

왜 좋은 것을 가까이합니까?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번뇌 장애를 없애고 홀연히 조사 관문을 뚫기 위해 좋은 것을 가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수행, 즉 번뇌와 장애를 없애는 데에 도움이 되는 선한 것을 옆에 두고자 하는 것은 수행에 전념하기 위한 것이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살고, 더 많은 명예를 얻고, 더 높은 권력을 얻기 위해 좋은 것을 가까이하고 나쁜 것을 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뜻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Previous

자경문 해설 4

아모르파티(Amor fati)

Next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