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파티(Amor fati)

흔히 처세술에서 “노력하는 것 자체가 곧 목적이다.”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그러나 마치 시지프스의 형벌과 같이 괴로운 삶을 계속 이어나가야만 하는 우리네 삶에 대입하기에는 어패가 있다.
서양의 근대 철학자 니체의 말이자, 트로트 가수 김연자의 노래 제목으로 유명세를 탄 “아모르 파티”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아모르파티는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다. 니체는 인간의 삶이 윤회로써 계속된다는 영원회귀 사상을 펼쳤다. 이는 불교의 무시무종과도 닮아 있다.
인생은 목표가 아니고 원칙이다. 목표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 순간순간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것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나는누구인가, 무아, 운명, 인생

https://www.youtube.com/watch?v=4N3QlELBHwk

노력하는 자체가 곧 목적?

폭염입니다. 너무 더운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일 방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다가 저녁무렵 산책에 나섰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포행을 하다보니까 전에 유튜브에서 본 말이 떠올랐습니다. “노력하는 것 자체가 곧 목적이다.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에 너무 마음 졸이지 말고 열심히 노력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노력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 참 좋은 말이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포행을 하다가 그 말이 다시 떠오른 겁니다.

그 말을 내 상황에 적용시키자면, 이렇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걷는 것 자체가 내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사는 데에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더운 날 땀 흘리고 걷는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과 같지요. 그렇다고 제가 무슨 큰 뜻을 가지고 땀 흘리면서 포행을 하고 있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하루종일 방에 있기에 좀이 쑤시기도 하고 좀 움직여야겠다 싶어서 나선 길이었으니까요. 달리 말하면 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지프스의 형벌

그리스로마신화에 시지프스의 신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지프스라고 하는 사람이 살았는데요. 하루는 신중의 신이자 바람둥이인 제우스가 독수리로 변해 강의 신의 아름다운 딸을 납치했습니다. 딸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 강의 신은 온 동네를 찾아다니는데요. 그것을 본 시지프스가 강의 신에게 거래를 겁니다. 시지프스가 다스리는 도시에 샘물을 만들어주면 딸의 행방을 알겠주겠다는 겁니다. 강의 신은 그러자고 했지요.

강의 신은 딸을 되찾고, 아름다운 여인을 빼앗긴 제우스는 화가 나 죽음의 신에게 시지프스를 죽일 것을 명령합니다. 시지프스는 기지를 발휘해 죽음의 신을 동굴에 가두고 도망칩니다. 죽음의 신이 동굴에 갇히자 아무도 죽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죽음으로 인도해야 할 죽음의 신이 갇혀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하는 바 시지프스를 죽이지도 못하고 골탕만 먹게 된 제우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제우스가 이번에는 전쟁의 신을 보내 죽음의 신을 구출하여 시지프스를 지옥으로 보내기를 명합니다. 이번에는 죽음의 신이 시지프스를 잡아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이때 시지프스는 자신의 아내에게 당부를 해놓았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말입니다. 지옥의 신 하데스가 생각할 때는 이상한 겁니다. 사람이 죽었으면 장례를 치러야 죽은 것인데 왜 장례를 치르지 않지? 이때 시지프스가 또 꾀를 내어 하데스에게 말합니다. “내 아내는 본디 부덕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으로 내가 죽었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당장 아내에게 가서 혼쭐을 내주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겠습니다.” 이에 하데스가 시지프스를 살려줍니다. 그렇게 풀려낸 시지프스는 아내에게 가지 않고 도망쳐버립니다.

머리가 좋고 꾀가 많은 시지프스였지만 신중의 신인 제우스를 분노하게 하고 지옥의 신 하데스를 속인 죄는 엄중했습니다. 지옥의 신은 다시 시지스프를 잡아 형벌을 내립니다. 시지프스로 하여금 산 아래에서 위로 바위를 굴려 올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애써 정상에 올라가면 바위가 반대쪽 등성이로 굴러떨어져버립니다. 이렇게 바위를 굴리는 형벌이 영원히 이어집니다.

고통이 반복되는 삶

이 신화가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겁니다.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 일상이라고 하는 것이 시지프스의 삶과 같습니다.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올리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우리의 삶도 그렇지요. 애써 올려놓은 바위가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려고 하면 갖은 애를 써서 그것을 막아보려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덧없습니다. 무상합니다. 해봐야 안 되는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면서도 바위가 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것을 알고 있지만 계속해서 바위를 밀어올려야 합니다. 왜냐? 그것이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다는 것을 신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로마신화는 유일신 신앙이 태동하기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현재 우리의 삶과 상당히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아까 저의 상황에 다시 대입해볼까요? 하루종일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자니 참 괴롭습니다. 심심하고 따분합니다. 그래서 산책을 나갔는데 너무 덥습니다. 땀이 나고 힘듭니다. 그래서 방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또 심심합니다. 우리의 삶이 말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무의미한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게 우리네 삶이라고 시지프스 신화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합리화하기 위한 말 중에 하나가 서두에 언급했던 말입니다. 과정 자체가 목적이다 하는 류의요. 이 말을 시지스프에 적용하면 바위를 열심히 미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다는 말인데요. 도대체 올려놓으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끝도 없이 굴리는 것이 무슨 목적이며 의미가 있다는 말일까요?

니체 “(영원회귀하는) 운명을 사랑하라”

서양의 근대 철학자 니체가 한 말인데 최근에는 노래 제목으로 아주 유명해진 말이 있습니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입니다. 아모르파티는 라틴어로, ‘운명을 사랑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모르’가 ‘사랑한다’이고, ‘파티’가 ‘운명’입니다.

니체가 주장한 사상 중 하나가 영겁회귀(영원회귀) 사상입니다. 사실은 인도의 윤회설에서 가져온 개념인데요. 인도의 윤회설은 인간이 끊임없이 윤회하며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며 윤회에서 벗어났을 때 완전한 행복을 구족할 수 있다는 내용이지요.

니체는 거기에서 열반을 빼고 ‘영원히 윤회한다’는 개념만을 뽑아왔습니다. 지금 이 생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겁니다.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운명임을 인정하고, 인정을 넘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운명을 사랑하면 진정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그것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영원히 반복되므로 싫어한다고 해봐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운명을 사랑하자는 것이 니체의 말입니다. 상당히 불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전스님 “평상심이 도”

불교에서는 ‘평상심이 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주스님이 남전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도입니까?” 남전스님이 대답하기를 “평상심이 도다.”했습니다. 이에 조주스님이 “찾아서 나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자 남전스님이 대답합니다. “나아가면 어긋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시무종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단지 영원한 현재만 있는 겁니다.

남전스님이 이어서 말합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알려고 하면 어긋나는 것이고 알지 못하면 흐리멍텅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도라는 것은 알려고 해도 모른 채로 있어도 안 된다.” 남전스님의 말은, 깨친다는 것을 지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나의 생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영원히 깨달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과거 미래 현재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그 무엇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속에서 깨침이 오는 것이지, 수행을 한다고 해서 미래에 지금과 다른 내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깨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니체의 말이나 남전스님의 말이 공히 주장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것. 보는 대상이나 느끼는 대상이나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고 보고 듣고 느끼는 이것에 집중할 때 깨침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충실할 때 인간은 우리의 운명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봅시다.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책을 하면서 “나는 왜 산책을 할까? 내 산책의 목표가 무엇일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입니다. 목표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있는 대상에 마음이 가 있으면 안 됩니다. 목표나 의미가 무엇이냐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남전스님의 말대로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지금 산책을 하고 있는가? 누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이 느끼고 있는가?를 직관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침으로 가는 길입니다.

인생은 목표가 아니라 원칙

이 이야기를 처세술의 관점으로 표현을 바꾸면 이렇습니다. “인생은 목표가 아니고 원칙이다.” 우리는 목표 지향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서 결혼을 해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고, 사업에 성공해야 하고, 훌륭한 누군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현재 내 모습이 아닌 미래의 상을 끊임없이 그리고 있습니다.

목표를 지향하면 지금의 삶을 놓치게 됩니다. 목표를 지향하는 순간 우리의 순간은 대상과 그 대상을 추구하는 나 자신 즉 주체로 나뉘어집니다. 그 순간부터 이미 어긋납니다. 인생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무언가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서 지금의 순간을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원칙입니다. 원칙이란 이를테면 ‘오계를 잘 지키자.’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오계를 잘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앞으로 무엇이 되겠다는 것은 목표를 세우고 행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오계를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오계에 부합한가? 내가 지금 자비로운 행동을 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현재 내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원칙을 세우는 삶은 지금 현재의 나를 항상 돌아보게 하고, 목표지향적인 삶은 지금이 아닌 미래의 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게 만듭니다.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욕망하는 나입니다. 목표는 기본적으로 욕망의 소산입니다. 중생세계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욕망입니다. 욕망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목표지향적인 삶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 같은 오계를 지키되 삶의 원칙으로 오계를 지키는 것과 ‘나는 반드시 언젠가 부처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지향하는 바와 관점 자체가 다릅니다.

인생은 목표가 아니라 원칙입니다. 아모르파티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명제가 담고 있는 실천적인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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