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廻)

백중 기간에는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천도재를 지낸다. 죽은 사람이 무언가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윤회사상에 기반한 의식이다.
윤회란 무엇인가? 인도 바라문교에서 파생되어 불교에서 다르게 해석한 윤회에 대하여 알아본다.
부처님은 윤회하는 주체인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한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인연)’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일 뿐 그 자체라 함직한 것이 없다는 것을 곰곰이 이해해보자.

#무아, 연기, 윤회

백중 기간 동안 돌아가신 분들에게 극락왕생 하시라고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윤회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꼭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될 것이 이 윤회라는 개념입니다. 쉽게 알아듣기는 힘든 개념입니다만 어렵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윤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우선 게송을 한 번 같이 읊어보겠습니다.

함허 득통 화상 게송

생야일편부운기 生也一片浮雲起

삶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

사야일편부운멸 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 사라짐이니

부운자체본무실 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이 본래 실체가 없듯

생사거래역여연 生死去來亦如然

삶과 죽음도 실체 없기는 마찬가지네

생과 사는 마치 뜬구름 같아서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허망한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게송입니다. 윤회라는 것은 결국 생과 사를 반복하는 것인데, 정의하자면 의식이 있는 것이 나고 죽는 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돌이나 구름 같은 무정물은 윤회하지 않습니다.

윤회, 인도 바라문교의 사상

또한 우리는 윤회를 불교의 고유한 사상, 불교만의 고유한 가르침이라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2,500년 전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했을 당시 이미 인도사회에는 윤회라는 사상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사회를 지배하던 대표적인 종교는 바라문교(지금의 힌두교)였으며 그 외에 불교, 자이나교 등 대부분의 종교가 윤회를 기본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고다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도 윤회라는 사상을 수용하고 당신 가르침의 기본적인 전제로 삼았습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윤회는 부처님이 처음으로 이야기한 개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존 인도사회의 지배적 종교였던 바라문교에서는 윤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할 겁니다. 바라문교에서는 첫 번째, 영원이라는 게 있다고 전제합니다. 아트만(atman) 혹은 진아(眞我)라고 하는 변함없는, 영원한, 고정불변의 ‘나’가 있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여 이 나라는 것이 윤회의 주체가 되고 업의 주체가 됩니다.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내가 악한 업을 지으면 다음 생에 나쁜 몸을 받고 내가 착한 업을 지으면 다음 생에 좋은 몸을 받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윤회와 비슷합니다. 업(業)은 요즘 말로 행동이고, 업에 의한 윤회와 그 윤회로부터의 해탈, 이것이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윤회와 업에 대한 기본적인 사상입니다. 윤회는 고통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당시의 종교들은 다 수용을 하고 있단 얘기입니다.

붓다, “아트만(윤회하는 영혼)은 없다”

이것이 전부라면 윤회가 전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트만이라고 하는 영혼이 있어서 좋은 몸 받았다가 나쁜 몸 받았다가 짐승의 몸을 받았다가 천상에 태어나면 천신의 몸을 받는 것이 바라문교의 윤회인데, 부처님은 이 아트만을 부정을 했습니다. ‘아트만 같은 건 없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무아사상입니다. 고정불변의 실체나 변하지 않는 나라고 존재는 없다고 부처님은 주장합니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를 할까?’ 이 대목부터 윤회가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윤회를 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윤회를 하는고? 내가 없다고 하면 윤회도 부정을 해야지 윤회는 한다고 하면서 나는 없다고 그래. 이게 도대체 뭐야?’

먼저 부처님이 아트만을 부정했다는 게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알아야 그 다음 윤회의 문제를 불교적으로 풀 수 있습니다. 답을 한 마디로 말하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겁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행위는 있으나 행위한 사람은 없다 이런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 자체를 탓하지 말고 그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나 사회적인 문제를 봐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者)는 없다

이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빵을 훔쳤다고 하면 사회적인 약속에 따라서 법적으로 처벌을 받습니다. 남의 재산을 허락 없이 가져가면 사회의 기본 질서가 유지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고 그 사람이 한 행동에 문제가 있으니까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릅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악업을 지었으니까 과보를 받는 것이고, 굳이 이야기하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용수스님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말을 비유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법문 서두에 경전 게송을 제가 먼저 읽고 여러분들이 따라서 독송했습니다. 그 때 제 입에서 나온 게송 구절이 여러분들 입으로 옮겨가서 소리가 나온 겁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게송이 내가 말할 때는 나한테 왔다가 여러분이 말할 때는 여러분들한테 갔다가 그런 겁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윤회라고 하는 것에 어떤 주체가 있어서 옮겨 다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용수스님은 게송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저도 비유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이렇게 마이크로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왜 마이크에 대면 소리가 커집니까? 전기가 마이크로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발전소에서 만든 열에너지가 전기에너지로 바뀌고 전기에너지가 마이크로 와서 소리를 크게 바꿉니다. 그렇다면 에너지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없다면 에너지는 없는 것입니까?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치를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개념과 유사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누가 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무엇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봐야합니다.

또 다른 예로, 요령을 흔들면 소리가 납니다. 누가 소리 냈습니까? 내가 소리 냈나요? 아닙니다. 요령을 흔드는 손은 요령이 아니라 내 몸뚱이입니다. 그런데 요령소리는 분명히 났습니다. 행위는 있는데 소리를 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속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스님이 손으로 흔들었으니까 소리가 난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나라고 하는 것에 몸뚱이 없이 영혼만 있다면 그 영혼이 소리를 낼 수 있습니까? 영혼만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도 내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분명히 소리는 났단 말입니다. 행위는 있으되, 누가 소리를 냈는지의 그 ‘누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있을 뿐

행위만 있고 그 행위를 하는 주체는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주장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무아사상입니다. 다시 한 번 용수보살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기에 초가 있다고 합시다. A라는 촛불이 탄다고 할 때 허공에 바로 불이 짠 나타나서 A 초의 심지에 붙고, B, C의 초로 옮겨가고, 심지가 다 탈 때쯤 되면 불이 다시 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겁니까? 초가 없이 촛불이 탈 수 있습니까? 불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이 옮겨 붙었다’고 말입니다.

누가? 불이. 어떻게? 이 초에서 저 초로 옮겨갔다.

우리 말 속에는 마치 불이라는 독립적인 존재가 있어서 이것이 A라는 초, B라는 초, C라는 초로 막 옮겨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A라는 초에서 촛불이 타올랐다가 꺼집니다. 그리고 B라는 초에 촛불이 타올랐다가 꺼집니다. A라는 초에 불이 확 커져서, 아니면 바람이 휙 불어서 그 옆에 있던 B라는 초의 심지가 타오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조건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연이 생겨서 그렇다고 합니다.

불이라는 어떤 존재가 있어서 그것이 자기발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불이 타오르고 각각의 불이 서로 어떤 인연에 따라 다른 초의 심지가 타는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윤회도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용수보살님의 이야기입니다.

윤회, 시작도 끝도 없다

다음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윤회라는 것이 이렇게 각각 타오르는 불꽃이 어떤 인연에 따라서 옆으로 옆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치면, 그렇다면 그 윤회는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시작하기에 모든 일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무시무종이라 했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말입니다.

윤회를 놓고 봅시다. 뭔가가 윤회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는 그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뭔가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전지전능한 절대적인 존재가 있어서 그것이 무언가를 만들었고 그것이 윤회를 한다고 칩시다. 그런 식으로 계속 따져가다 보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신은 누가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도착합니다. 서양 철학에서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문제가 이것입니다. 신은 누가 창조했는가? 그것이 존재론이고 인식론입니다. 고민 끝에 대답한 것은 ‘신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에서는 제1원인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이 어떤 시점에서 자기 스스로를 창조를 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창조하는 시점에서 신은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만약에 신이 이미, 하여튼, 그냥 존재하는 상태에서 신을 창조했다고 한다면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부처님이 말하는 무시무종과 같은 말입니다. 신은 창조하기 전 이미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반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시점에서 신이 창조자였다고 하면 기본 전제가 부정됩니다. 무에서는 유가 나올 수 없습니다. 무에서 유가 나오면 창조라는 말 자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은 스스로를 창조할 수 없고, 다시 말하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은 없다

부처님이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이 세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실제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지구가 45억 년 전에 탄생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계는 150억 년 전에 탄생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200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우주 말고 또 다른 우주가 있다고 합니다. 우주가 무수히 많다고 합니다. 그것들이 언제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의 과학으로는 시작과 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재로써는 부처님이 이야기하신 무시무종이 진리입니다.

아무리 현대 과학이 발달해도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시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무아를 이야기 했습니다. 부처님은 ‘여기에 뭔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다, 무엇이든 자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다 엮여 있는 것이므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대상이 언제부터 있게 됐는지를 아무리 고민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윤회가 언제 끝나느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수행자가 열심히 수행하여 무아의 진리를 깨쳤다고 할 때는 ‘내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커다란 착각이었구나. 원래부터 나는 없었구나’라는 걸 깨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치는 순간 윤회가 끝나는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깨치기 전에는 계속 윤회를 하는데 깨치면 이미 내가 윤회를 했던 그 모든 사실이 착각이었다고 깨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깨치는 순간에 윤회가 끝났다고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인즉 깨쳤다고 해서 이 세상에 있다가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똑같은 세상인데 단지 내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윤회가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디냐?’ 이런 질문은 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라는 겁니다.

업 쌓는 이 없어도 업은 돌아온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윤회사상은 불교 이전의 인도에 이미 있었고 부처님도 그 윤회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무엇이 윤회하는가?에 대해서 부처님은 부정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윤회는 하지만 윤회하는 주체는 없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다섯 살 정도 된 아이가 부모에게 ‘동생은 어디서 왔어?’라고 물을 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남자의 정자가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자궁 속에 있는 난자와 결합하여 세포분열을 거쳐 증식을 한 후에 여자의 몸 밖으로 나오면 그게 바로 네 동생이야.’ 이렇게 말하면 아이가 알아듣습니까? 이게 사실이지만 못 알아들으니까, ‘아, 삼신할머니가 데리고 오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삼신할머니에게 새 동생을 만들어달라고 기도를 하죠.

부처님도 중생들이 심오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하니까 쉽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공덕을 쌓으면 복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업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다는 마음을 버리고 무주상보시를 해라. 이런 말은 사실은 아까 말한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을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이야기 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면 부처님이 들어주는구나!’ 합니다. 마치 아이가 삼신할머니에게 동생 하나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법문을 들은 불자님들은 윤회에 대한 이런 배경을 알고 믿음이 맹신으로 발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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