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윤리

선과 악

영화 <사바하>로 생각하는 선과 악

최근 송광사보에 영화 리뷰를 쓰기 위해서 <사바하>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는 위의 독백으로 끝이 납니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것 역시 이 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선과 악, 불교에서 생각하는 선과 악, 그리고 우리 보통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과 악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이 물음을 바탕으로 선과 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의 선악론: 원죄와 순종

“악이 도처에서 활개를 치고 있고

우리들은 이렇게 고통 받고 있는데

도대체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먼저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에 대해 아주 명료하게 정리가 돼 있습니다. 실낙원(失樂園) 이야기입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이 있었고 생명의 나무가 있었고 선악의 지식을 알려주는 선악과나무가 있었고 거기에 아담과 이브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이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에 열린 금단의 열매는 손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때 뱀이 나타나서 선악과 열매를 먹으면 너의 하나님 아버지보다 더 현명해질 것이라고 이브를 유혹합니다. 이브가 열매를 따먹는 순간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킵니다.

아담과 이브는 왜 쫓겨났습니까? 여호와의 첫 번째 계명인 ‘순종하라’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어서 불로장생을 할 수 있는데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집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남자인 아담에게는 평생 노동하는 수고를, 여자인 이브에게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세 가지 벌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었는데 죽을 수밖에 없는 형벌과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형벌로써 줬다 이겁니다.

여기에서 원죄는 다른 게 아닙니다. 원죄라고 하는 것은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명을 어긴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음. 이것이 원죄입니다. 그 원죄가 후손들에게도 내려와 후손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여호와는 어떻게 그 죄를 사하여 줍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 인간들의 모든 원죄를 대속하고, 우리 인간들은 내가 지은 죄만 참회하면 됩니다.

순종하지 않은 죄를 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호와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따르면 됩니다. 믿으면 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기독교에서는 믿으면 모든 죄가 다 사라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선악관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설화입니다.

“우리 애는 원래 나쁜 애가 아니에요”

이런 기독교의 선악론에서는 몇 가지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아담과 이브는 가만히 있다가 뱀이 유혹하니까 넘어가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이어서 악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악한 존재가 유혹하니까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겁니다. 두 번째, 악한 존재인 뱀이 객관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악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기독교의 선악론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선악관이라기보다 우리 상식적인 인간들이 가지는 선악에 대한 생각입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주변 환경이 이러이러해서 나쁜 짓을 한 거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선악론은 아주 쉽게 얘기하면 이런 겁니다. 학부모가 학교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애는 정말 착한데 주변에 나쁜 놈들이 있어서 유혹하고 꼬드기니까 어쩔 수 없이 같이 한 거지 우리 애는 착한 앱니다. 선생님 똑바로 보세요. 우리 애는 절대 나쁜 애가 아닙니다. 친구들이 나쁜 애들이에요.” 이 논리하고 기독교의 선악론하고 기본적인 구조가 똑같습니다. ‘인간 자체는 악한 존재가 아닌데 악한 존재가 따로 어딘가에 있어서 우리를 유혹하니 내가 고통 받고 나도 죄를 짓는다.’ 이런 생각을 일반적인 사람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감독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악이 이렇게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데 엄밀하게 말해 기독교적인 선악론에서는 ‘신은 뭐하고 있느냐?’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순종하지 못한 나의 원죄를 참회하고 신 앞에서 절대 복종하겠다, 오로지 여호와만 믿겠다고 내 스스로 다짐하고 다짐해야만 이 인간사의 고통이 없어지는 겁니다. 기독교적인 선악론에 비추어 보면 이 감독은 믿음이 부족한 겁니다.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신한테 따져봐야 뭐합니까? 따진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선악론에 입각하면 모든 문제가 명료합니다. 신에 대한 순종, 복종, 절대적인 믿음만 있으면 세상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하고 너무 다르니까 갈등이 생깁니다.

현실의 선악론: 사회적 판단

예를 들어서 살인이라고 하면 아주 큰 죄인데, 만일 지금이 전쟁 중이라면 많이 죽일수록 영웅이 됩니다. 살인은 나쁜 건데 또 어떤 때는 살인을 권장합니다. 악을 악이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가치 판단이 달라지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에서 과연 악이 객관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가? 마치 저기에 산이 있고 건물이 있고 집이 있듯이 악도 어딘가에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륜, 간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간통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죄가 아닙니다. 개인 대 개인 간의 문제, 양심의 문제라고 우리 사회는 규정했습니다. 반면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의 경우 바람을 피다가 들키면 유부남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여자는 돌팔매질을 해서 죽입니다. 똑같은 연애인데 어디에서 연애하면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야하고, 어디에서 연애하면 맞아 죽어야 되고, 어디에서 연애하면 로맨스라고 합니다. 시대에 따라서 사회에 따라서 악이라는 판단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속옷만 입고 시청 앞 한 가운데서 활개를 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거 미쳤구만 하고 신고를 합니다. 그러면 경찰이 와서 잡아간 후에 미풍양속을 해친 죄로 벌금을 물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무대에 올라가서 속옷만 입고 미친 듯이 춤을 추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고 난리가 납니다. 똑같은 행위를 하는데 무대에서 하면 좋다고 난리고 길거리에서 하면 감옥에 가고. 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불교의 선악론: 선과 악 그 자체에는 자성이 없다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자성이 없다, 다시 말하면 공하다고 합니다. <천수경>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라 했습니다.

현실에서의 선과 악은 시대에 따라서, 사회에 따라서, 전후 사정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수시로 변합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선악과 현실의 선악이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선악관은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가지는 선악에 대한 생각을 아주 정교하게 체계화시킨 선악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선과 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천수경>에서 힌트를 얻어보겠습니다.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내가 지난 날 지은 모든 악업은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嗔痴) 모두 탐진치로 말미암았으니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이것들은 모두 신구의에 의해 생긴 것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내가 이제 이 모든 걸 참회한다

이 안에 불교의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악은 무엇입니까? 바로 탐진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탐진치는 세 가지 독입니다. 그 중 근본은 치(痴), 어리석음입니다. 무명(無明)입니다. ‘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욕심내고 화내는 것에서 가장 근본적인 번뇌와 정신적인 고통이 생깁니다. 그 탐진치가 나를 괴롭히고 우리를 괴롭혀서 그로 인해 행하는 것이 바로 나쁜 행동이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악업(惡業)입니다. 탐진치를 없애지 못하고 탐진치에 이끌려서 하는 행동이 악한 행동입니다.

선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무명에 휩쓸려서 하는 행동들을 참회하고, 반성하고, 욕심내지 않고, 화내지 않고, 자비롭고 자애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행동입니다.

간단합니다. 불교에서는 선과 악이 너무나 명쾌하게 정리가 되어있습니다. 탐진치가 있어 그 탐진치로 말미암아 하는 행동은 악한 행동이고, 탐진치가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하는 행동은 선한 행동입니다. 불교에서의 깨달음, 열반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탐진치 삼독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행동은 선한 행동이요, ‘내가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인 줄 모르고 거기에 이끌려서 하는 모든 행동은 악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선의 원천은 탐진치가 없는 마음. 즉 청정한 마음, 다시 말하면 자비심, 다시 말하면 보리심이 되는 겁니다.

<천수경>의 십악참회

살생중죄금일참회(殺生重罪今日懺悔)

투도중죄금일참회(偸盜重罪今日懺悔)

사음중죄금일참회(邪淫重罪今日懺悔)

망어중죄금일참회(妄語重罪今日懺悔)

기어중죄금일참회(綺語重罪今日懺悔)

양설중죄금일참회(兩舌重罪今日懺悔)

악구중죄금일참회(惡口重罪今日懺悔)

탐애중죄금일참회(貪愛重罪今日懺悔)

진에중죄금일참회(瞋恚重罪今日懺悔)

치암중죄금일참회(痴暗重罪今日懺悔)

<천수경>에 나오는 십악참회를 신구의 삼업으로 하는 참회라고 합니다. 앞의 세 가지는 몸으로 하는 행동, 중간의 네 개는 입으로 하는 행동, 나머지 뒤의 세 개는 마음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행동을 갈고 닦는다는 것은 단순히 행동만 참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습관이 뿌리내려 성품이 되고 성격이 되고 나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선업이 완전히 뿌리를 내려서 삼독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관입니다.

선(善)을 실천하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불교적인 선(善)을 실천해야 할까요? 자애로운 마음, 자비로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항상 지니고 유지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방법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고 싶으면 남도 당연히 행복하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입니다. 또한 자리이타의 마음이란 나만 이로울 것이 아니고 남도 이로운, 모두가 이로운 행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만 이롭고 나는 괴로우면 어떻겠습니까? 쌓이고 쌓여서 결국 나에게 화가 되고 그게 터져 나오면 나중에는 상대방에게도 이롭지 않은 행동이 나옵니다. 나도 이롭고 상대방도 이로운 자리이타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선업을 키우고 쌓아가는 방법입니다. 선업을 쌓은 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다져져서 성품이 됩니다. 이렇게 내 안에 선업이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면 나는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기독교 선악관의 특징 중 하나가 악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은 피동적인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어떻습니까. 악이라고 하는 탐진치는 바깥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결국 내 마음 안에 있는 분노입니다. 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악이 생기고 악이 커지고 악을 없애는 것 모두가 결국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이냐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한편 불교에서는 밝음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듯이 선이 있으면 악이 있다고 합니다. 선과 악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상대적인 것이니까 경계가 딱 잘라지지가 않습니다. 선과 악은 마치 밝음과 어둠처럼 서로 의존하는 관계입니다.

앞서 현실에서 선과 악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앞뒤 맥락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변한다는 말은 자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변하는 겁니다. 변한다는 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자성이 없습니다. 공합니다. 연기합니다. 즉 선과 악도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연기합니다. 공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악래선도(惡來善度)라, 악이 오면 선으로 제도한다. 왜? 선과 악이 서로 다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악이 오면 선으로 제도하고 번뇌는 보리로 치유합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끝으로 과거칠불이 공통으로 계율의 근본으로 삼은 게송인 칠불통계게를 되새기면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합장하시고 함께 독송합시다.

제악막작 諸惡莫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중선봉행 諸善奉行 모든 선을 봉행하며

자정기의 自淨其意 스스로 내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시제불교 是諸佛敎 그것이 바로 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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