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은 희망이다

“정초에 부적을 찾으시나요?”

부적은 미신이라고 치부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부적을 찾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적은 희망이다. 소원은 다만 바랄 뿐이지만, 희망은 바라는 바가 강해서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낳는다.
인간은 마음 속의 희망이 빛바래고 변하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 밖에 희망을 형상화하여 이를 통해 희망을 키우고 다진다. 소원이 강하면 희망이 되고, 희망을 키우면 의지가 되고, 의지가 있으면 뭐든 실현할 수 있다.
희망을 형상화한 것 중의 하나가 부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적도 우리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기도, 소원, 의지, 희망

부적은 미신인데…

오늘은 부적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증심사에 오기 전 시골 절에 처음 부임했을 때가 정초 입재, 삼재기도를 하는 딱 요맘때입니다. 법회날이 되면 동네 어르신들이 저에게 부적을 써달라고 오는 겁니다. 큰절에서는 그런 일이 없기도 했거니와 내가 무당도 아닌데 부적을 달라고 하니 참 황당했습니다. 그래도 시골 어르신들이 요청하는 바이니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준비를 했습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부적을 나눠드리기는 했는데 여전히 ‘부적은 미신이다’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다 증심사에 오니까 정초기도에 아주 많은 신도분들이 오시는데 부적 써달라는 분이 없습니다. 대신 증심사에서는 무엇을 드립니까? 새해 복돈과 함께 자그마하게 프린트 된 부적을 같이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 돈 5천 원이 없어서 이 추운 날 무등산 중턱까지 올라오는 분이 있습니까?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복돈의 액수보다는 스님이 주는 의미 있는 돈, 그리고 그 자그마한 부적을 받기 위해서 오시는구나’, ‘어느 절 할 것 없이 정초가 되면 부적을 찾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부적을 나눠주는 모습

기도와 부적

소원(所願)은 바 소(所)에 원할 원(願)을 씁니다. 소원은 한 번만 바라는 것입니다. 희망(希望)은 바랄 희(希), 바랄 망(望)입니다. 바라고 또 바랍니다. 희망은 소원의 곱빼기입니다. 바라고 또 바라기 때문에 배로 강렬한 것입니다. 소원은 그냥 내가 바라는 바, 즉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오늘 저녁에 탕수육이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은 바라고 또 바라기 때문에 그 안에 힘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너는 우리 집안의 희망이야’라고 할 때 그 말 안에는 ‘너는 우리의 유일한 버팀목이기 때문에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바라는 바가 응축되고 응축되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입니다. 소원과 희망에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소원성취를 하려고 할 때 불교에서는 가장 대표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기도와 소원은 어떻게 다를까요. 절에서 하는 기도 말고 흔히 말하는 원래적 의미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예전에 할머니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아침저녁으로 물을 떠놓고 한참을 빕니다. 공을 들인다는 것은 열심히 비는 것입니다.

절에서 불공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절에서 기도도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합니까? 소원성취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소원이라는 것은 원하는 것이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행복하고 싶다는 겁니다. 행복의 추구가 모든 소원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않고 근본적인 행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수행입니다.

기도와 부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제대로 하든, 잘못하든 어찌 되었든지 간에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하면 그게 수행이 되는 것이고, 잘못하면 헛고생하는 것입니다.

원효스님은 <발심수행장>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雖有勤行이나 無智慧者는

欲往東方 而向西行이니라

부지런히 수행하더라도 지혜가 없는 자는

동쪽 방향으로 가고자 하면서 서쪽을 향해 나가는 것과 같다.

有智人의 所行은 蒸米作飯이요

無智人의 所行은 蒸沙作飯이라

지혜가 있는 사람의 수행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으며

지혜가 없는 사람의 수행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원효스님, 발심수행장

원효스님의 말씀처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리석은 마음으로 잘못한다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기도는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적은 열심히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절에 가서 스님에게 ‘주세요’ 하면 됩니다. 정초 때 와서 법당에 있다가 복돈 나눠줄 때 받으면 되니까 간단합니다. 이것이 부적과 기도의 차이입니다.

기도에 매달리는 이유

한편 우리는 흔히 노력을 하려면 기도를 하지 말고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노력을 하되 기도보다는 실제로 생산적인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막심 고리키는 ‘대지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노동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백날 기도해봤자 땅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이유야 어찌됐든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같은 조건에서 같이 노력을 해도 될 듯 말 듯 한데 이미 출발선이 다릅니다. 불평등한 조건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100의 노력을 했을 때 100의 결과가 얻어진다면 아무도 부적 같은 것을 찾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세상이라는 게 희한합니다. 1000의 노력을 해도 100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확실한 무언가를 찾습니다. 그 중 하나가 부적이고 기도입니다.

희망을 형상화하는 이유

여러분. 이렇게 바꿔 생각해봅시다. ‘부적은 희망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형상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가장이라고 할 때 밖에서 일을 하다가 힘이 들 때 지갑에 있는 가족사진을 보면 힘이 생깁니다. 왜입니까? 내가 일을 하는 이유는 내 자식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원은 우리 가정의 행복이며, 이 소원을 형상화시킨 것이 가족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사진을 보면 이 식구들을 내가 어떻게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에 힘이 나는 것입니다.

 정초기도에 나눠주는 부적

왜 인간은 희망을 형상화시킬까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희망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 마음속의 희망도 항상 크고 강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내 마음 밖에 희망을 형상화 시켜놓는 것입니다. 즉, 내 안의 희망을 그대로 사진에 심어놓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의 희망이 이런저런 이유로 희미해지고 사라졌을 때 내 마음밖에 만들어 놓은 희망을 보고 다시 힘을 내는 것입니다. 희망은 힘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형상화시켜서 내 안의 희망과 소원을 꾸준히 키우고 유지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원,희망,의지,현실화

소원이 강하면 희망이 되고 희망이 강하면 힘이 생깁니다. 힘이 생기면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의지가 생깁니다. 의지가 강해지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소원을 이루려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감나무 밑에 입을 벌리고 누워서 ‘감이 먹고 싶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감을 먹을 수 없습니다. 감을 먹기 위해서는 일어나서 감을 따야 합니다. 이 때 감을 따기 위해서 무작정 올라갔다가는 낭패를 봅니다. 현명하게 도구를 이용하고 협동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공들이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감나무에 무작정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는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의지가 세워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소원성취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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