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체성은?

영화 <극한직업>으로 톺아보는 정체성 이야기.
나를 나이게끔 하는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1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변함 없는 나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변수이고 ‘정체성’은 상수이다. 나는 정해져 있는 무엇이 아니며 무엇이든 대입할 수 있는 존재이다. 정체성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말한다.
이제는 질문을 바꾸어보자. ‘나는 누구인가?’에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자.
나라고 하는 것이 늘 변하는 가운데 지금 여기의 나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나는누구인가, 무아, 정체성

https://youtu.be/qdFVBrQpksI

영화 <극한직업>,
형사의 정체성 vs 치킨집 사장의 정체성

<극한직업>이라는 영화가 1,600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 영화를 가지고 ‘정체성’을 주제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 영화는 마약 전담반이 마약조직을 소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한두 시간 영화에 푹 빠져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인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면 영화의 구도가 눈에 보입니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마약전담반이 치킨장사로 위장을 해서 잠복근무하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잠복근무를 하던 마약전담반이 해체된 후 더 이상 형사가 아니면서 범인을 소탕하는 내용입니다. 즉 전반부에서는 형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치킨집 장사로 위장한 반면 후반부에서는 치킨장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형사처럼 행동하는 겁니다. 모양은 똑같으나 내용은 완전히 바뀐, 전반부와 후반부가 거울을 마주보는 듯 대칭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체성, 나를 나답게 하는 ‘무엇’

정체성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나는 남이 아닌 무언가 다른 특별한 나야’, ‘뭐라고 딱 꼬집어 말은 못하겠지만 나는 남과 달라’, ‘나는 나야’, ‘나를 나답게 하는 뭔가가 내 안에 있어’ 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체성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스님이다’, ‘나는 증심사 신도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나는 우리 가족의 가장이다’ 등이 있습니다. 즉 ‘나는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는 게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가만히 놓고 보면 결국은 ‘나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 라는 소속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는 직업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명함에 나의 모든 것이 다 들어갑니다. 내가 누구라는 것을 한 장의 명함으로, 직업으로, 직장으로, 하는 일로 표현했습니다. 영화 <친구>에 유명한 대목이 있습니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이 말은 너희 아버지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을 판단했고, 이것만으로 판단하기 힘들다고 하면 동네, 고향, 학교 등을 가지고 소속을 찾으려 합니다. 이처럼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생각하면 소속감입니다.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전반부에서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형사 같은데 형사 같지 않은 형사들이 나옵니다. 정체성이 희미합니다. 이 형사들이 치킨장사로 위장하여 잠복근무를 하는데 웬걸, 장사가 너무 잘 되니까 이 양반들이 자기가 형사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치킨장사에 열중합니다. 관객들은 그걸 보고 웃습니다. ‘아이고, 저 형사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자기들이 진짜로 치킨 집 장사하는 줄 아나보네? 참 웃기지도 않는 형사들이구만’ 어떻게 형사가 하루아침에 치킨 장사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가 있냐, 웃기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똑같은 나인가?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고정되어 있는,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내 자신은 10년 전에도 나고, 20년 전에도 나고, 5년 전에도 나고, 어제도 나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나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수학에서 x=y라는 등식을 볼 때, 이 x=y라는 등식이 성립하려면 x는 변수가 돼야 되고 y는 상수가 되어야 합니다. x=0 하면 x라는 변수에 0이라는 상수를 대입하고, x=3하면 x라는 변수에 3이라는 상수를 대입하는 겁니다. 같은 맥락으로 ‘나는 스님이다’라는 걸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나=스님 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좌변에 있는 ‘나’는 변수이고, 우변에 있는 ‘스님’은 상수입니다. 나라는 변수에다가 스님이라는 상수를 대입하는 겁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맞는 말입니다. 나는 스님이기도 하고 남자이기도 하고 주지이기도 하고 고향이 부산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등식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스님”, 나=“주지”, 나=“부산사람”, 나=“남자”……. 나라는 변수에 많은 상수들이 들어가도 모두 맞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정해져 있는 게 아니며 무엇이든지 대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0=0이라는 수식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한쪽은 변수 즉 정해져 있지 않은 수가 되어야 됩니다.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라고 하는 것 역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무관하게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한 때는 장사도 했다가 한 때는 학교도 다녔다가 한 때는 연애도 했다가 한 때는 스님도 하는 등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변할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는 그 무언가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1년 전에 나나, 어제의 나나, 10년 전의 내가 똑같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형사들이 며칠 사이에 자기가 형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치킨장사에 몰두하는 것을 보며 웃는 겁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이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실체 없는 것인가를 한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형사들은 전형적인 형사가 아닙니다. 일도 못 하고 조직생활에 적응도 못하고 형사로서의 사명감도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잉여인간입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형사들이 나오니까 관객들이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영화가 1970년대 한참 새마을운동이 활발할 때,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열심히 일하자고 하는 때에 나왔어도 관객들이 영화 속 잉여인간을 보고 웃을 수 있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욕만 먹었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소위 잉여인간이라고 하는 유형의 사람들이 주변에 차고 넘치다 보니까 영화를 보면서도 조소하고 실소하는 마음이 생기고 가학적인 웃음이 나오는 겁니다. 웃음코드라는 것은 일견 시대의 반영인 셈입니다.

영화 속 정체성의 실종

영화 후반부로 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됩니다. 위장근무를 했지만 마약조직을 잡지 못한 마약전담반은 해체되고, 먹고 살기 막막하니까 치킨 집을 계속 하기로 합니다. 장사가 잘 되면서 전국 체인망 제안이 들어오는데, 실은 형사들이 잡으려고 했던 마약조직이 치킨 전국 프랜차이즈 사업을 마약 유통의 조직망으로 활용하기 위해 마수를 뻗친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정체성의 이야기가 대두됩니다. 이 전직 형사들이 프랜차이즈 치킨 집을 운영하는데 전국의 대리점들이 어떻게 장사하고 배달하고 있는지 마치 큰 사건을 진두지휘하는 수사본부처럼 꾸며놓았습니다. 치킨장사에 푹 빠져 있는데 일 자체는 형사적으로 하는 겁니다.

제가 볼 때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정체성이 실종된 세상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옛날처럼 명함 한 장 내밀면서 ‘나 이런 사람이오’ 하면 사람들이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는 한 장의 명함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정체성이 실종된 세상을 재미나게 그린 영화 <극한직업>이었습니다.

정체성에는 실체가 없다: 무아(無我)

불교에서는 정체성에 실체가 없다고 합니다. 나다운 것, 나만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라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말입니다. 애초에 부처님이 이야기 하시기를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와 공(空)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 말을 요즘 말로 하면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도 나와 있듯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도 같고 아침이슬과 같고 마치 천둥이 치는 반짝이는 번개와도 같습니다. 이게 우리가 그렇게 매달리는 나라는 것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정체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입니다. ’나는 스님이다’, ‘나는 가장이다’, ‘내 자신은 이것이다’라고 규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즉 내가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전남대학교 학생증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다’라고 합시다. 그런데 등록금 낼 돈이 없어서 휴학을 하고 막노동판에 나가서 등록금을 벌고 있어요. 그러면 이 사람은 학생입니까 막노동꾼입니까? 흔히 학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학생증이 있고 학교에 등록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체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는 명제로 스스로를 판단해야 합니다.

질문의 전환,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서류상 학생이라고 해서 영원히 학생이 아닙니다. 내가 단지 머리 깎고 있다고 해서 스님이 아닙니다. 스님으로서 생각하고 스님으로서 행동할 때 스님입니다. 껍데기만 스님이고 속으로는 스님이 아니면 그건 스님이 아닌 겁니다. 서류상으로는 학생이지만 지금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나는 노동자입니다. 지금 내게 중요한 일은 노동을 해서 돈을 버는 것입니다.

이렇듯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정체성에 대한 고민 즉 ‘나는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극한직업이라는 영화가 그렇게 우습기만 한 영화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거지, 내가 누구라고 내 스스로 생각하는 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영화 속 형사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대입하자면 ‘내가 우리 집의 가장인데 왜 애들이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내 말을 들어야지. 왜? 나는 가장이니까’, ‘그래도 내가 남잔데 내가 여자친구한테 끌려 다니면 안 되지. 왜? 나는 상남자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대신에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이다’, ‘나는 가장이다’라고 먼저 정해놓고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그렇게 함부로 하지 마’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라는 것을 인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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