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처(處)로 풀어본 김춘수의 꽃

시인 김춘수는 말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상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애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에게만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자신의 세계에 인식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것을 “작자는 없지만 행위는 영원하다”고 말했다. 행위에 대해 욕망을 가지면 이름을 부여하게 되고, 이름을 부여하면 마음에 이미지가 생성되고, 마음에 이미지가 생성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은 나에게 있어 ‘존재하는 것’이 된다.
내가 따로 있고 대상이 따로 있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행위, 듣는 행위, 행위가 있기에 여기에 따라서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생겨난다. 때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은 없다.
중생은 욕망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을 보살의 원력으로 바꾸는 것이 수행이며, ‘원래 있는 세계’라는 것이 우리의 뒤바뀐 헛된 생각임을 깨닫는 방법 역시 오직 수행이다.

#수행, 욕망, 원력, 이름, 일체유심조

불교사상의 핵심, 12처

지난 번 법회에서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사상을 사이에 두고 두 세계가 소통하는 것이 제사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누군가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나눠져 있구나!’라고 생각할까봐 오늘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법회를 준비했습니다.

경전에 12처, 18계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것들이 불교 교리의 핵심인데도 불구하고 이 개념을 흔하게 오해합니다. 불자들에게도 혼동이 있을 정도로 심지어 서양철학보다 더 어렵습니다. 부처님도 예수님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단순한 행동강령만을말씀하시지, 학문이나 철학적 개념으로도 혼동이 오게 하는 어려운 가르침을 설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서는 사상과 수행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절대적인 존재에게 기도를 하거나 공양을 올린다고 해서 삶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에서 완전하기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때문에수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는데요. 

이 같은 생각을 지식인 계층에서는 공통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철학과 삶의 고통을 털어내는 것은 불가분, 즉 한몸이라는 것이 사상의 주류였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그러한 생각의 뿌리까지 다다라서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해결법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였습니다. 이 사람을 우리는 부처님이라고 부르지요. 

우리도 교리 따로 수행 따로 생각하지 말고, 이 둘은 한 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바탕이 되면 5온, 12처, 18계다 하는것들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김춘수의 <꽃>

여러분, 봄입니다. 봄이 오니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연애할 때 기억 나십니까? 너는 ‘알콩이’ 나는 ‘달콩이’, 둘 사이에만 통하는 애칭이 있지 않습니까. 왜 연인들간에 애칭을 부르는 걸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이 다 같이 부르는 이름으로 부르기 싫은 겁니다. 나만 부를 수 있는 나만의 이름을 붙여주는 거죠. 왜 특별한 이름을 붙이느냐?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의미부여를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애인관계에서만 그런가요? 보살님들 같은 경우에는 아들을 대하는 게 남다릅니다. 전화를 받으면 말투 자체가 달라집니다. “아들~” 하면서 뒤끝을 올리는 말투를 씁니다. 다른 집 아들에게 그런 말투를 씁니까? 아닙니다. 사랑과 특별함을 담아서 아들을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새 차를 뽑으면 애칭을 붙여줍니다. 

‘특별함’이 이름을 붙이게 한다

이 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붙였을 때 특별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인 꽃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나도 내가 생각하기에 나만의 빛깔이 있고 나만의 의미와 소중함이 있는데 왜 나에게는 특별한 이름을붙여주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부른 똑같은 이름 말고, 특별한 이름을 불러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런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다음 구절에 말합니다. ‘우리들은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나만 누군가에게 의미 있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가? 아니다. 인간은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란 의미 있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시를 해석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이 시를 불교적으로 해석해보겠습니다. 불교적으로 이 시는 상당한 깊이가 있는 시입니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특히 불자들은 이 시를 외울 필요가 있습니다. 금강경을 외우는 것보다 이 시를 외우면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더 제대로 불교 공부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은 곧 ‘욕망’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풍기가 있다고 합시다. 여기에 무언가가 있는데 ‘이것은 선풍기다.’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면 왜 그이름을 붙였을까요? 그 무언가에서 바람이 나와서 우리를 시원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선풍기가 있다. 선풍기에서는 바람이 나온다. 바람이 나오면 시원하다. 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볼까요? 이 말은 즉 내가 지금덥다는 겁니다. 시원했으면 좋겠는 겁니다. ‘~했으면 좋겠다’는 것은 욕망입니다. 욕망이 모여서 필요가 되고, 필요가 ‘모터가 있고 날개가 있고 스위치가 있어서 바람이 나오는 그 무엇’ 즉 선풍기를 만듭니다. 

만약 인간에게 시원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없다면 선풍기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선풍기, 자동차, 카메라… 우리 주위에있는 것들, 우리가 이름 붙인 것들은 모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그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입니다. 이름 붙이기 이전에는 무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플라스틱과 구리와 철이 모여 있는 그 무엇입니다. 다만 우리가 욕망하는 순간이 이름을 붙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이름을 부여하기 전에 그 무언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풍기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무언가가 있다는 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풍기라고 지칭하는 것과 알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이야기를 잘 못 이해하면 일체유심조에 대한 오해와 같은 오해가 벌어집니다.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어 낸다? 산도 마음이 만들고강도 마음이 만든다? 아니죠. 없는 산을 마음이 만들어 낼 수는 없지요. 다만 이름을 통해 의미를 부여한 겁니다. 정리하자면 이름을 부여하는 이유는 욕망 때문입니다. 

작자는 없지만 업(몸짓)은 영원하다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에서는 ‘몸짓’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몸짓이란 동작, 행동입니다.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합니다. 업은 행하는 것입니다. 행위만이있습니다. 행위에 대해서 욕망을 가지면 그것에 대해 이름을 부여하고 마음에 이미지가 생성되고 그 순간 그것은 존재하게 됩니다. 조금어려운 개념인데요.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상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에 내가 있고 저기에 선풍기가 있어서, 내가 저 선풍기를 보고 ‘날씨가 더우니까 선풍기를 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것이 거꾸로 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야심경에서 ‘전도몽상’이라고 하지않습니까. 거꾸로 된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선풍기가 있어서 내가 선풍기를 본다는 것이 거꾸로 된 생각입니다. 바르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보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보이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보는 무언가는 나이겠구나, 보이는 무언가는 선풍기인가 보구나.’ 이것이 작자는 없지만 행위는 영원히이어진다는 부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행위가 있으면, 업이 있으면, 과보가 있습니다.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인과응보를 너무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불교식 인과응보가 아니라 인도의 전통사상에서 이야기하는 인과응보가 됩니다. 누군가 때리니까 아프다, 라고 하는 원인과 결과는 인도식 인과응보입니다. 100만큼 악업을 지었으면 100만큼 선업을 쌓아 해탈한다는 식의 접근이 대표적입니다. 인도의 자이나교 같은 종교가 이런 인도 전통적인 업설을 따릅니다. 

전도몽상은 수행으로 뒤집을 수 있다

불교의 업보는 더 광범위하고 더욱 깊은, 심층에서 작용합니다. 행위가 있으면, 행위에 따른 보는 놈과 보이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따른’이라는 말은 ‘연기 해서’라고 해석해도 됩니다. 내가 있고 선풍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풍기가 보이는 것은 선풍기를 보는내가 있고 보이는 대상(선풍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이해는 되는데 심정적으로는 잘 공감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몇 번 이런 이야기를 듣고 혼자서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아’ 라는 논리적인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이 깨달은 것인가? 하면 아닙니다. 뿌리를 완전히 뽑기 전에는 뒤바뀐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뒤바뀐 생각을 벗어나는 것은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수행이결합되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이 시의 첫 구절이 불교적으로는 업보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으로 표현된 그 업보 말입니다. 왜 우리는 거꾸로 생각하는가? 중생들의 욕탐 때문입니다. 내 안에 내가 있고 내 밖에 세계가 있다는 생각, 몸 안에는 내가 존재하고 몸 바깥에는 나와 별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세계라는 것이 미리 존재하고 있어서 그 안에 나도 있고 너도 있고 개도 있고 새도 있는 등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다, 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아니라는 이야기를 부처님은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의 숫자만큼 세계가 존재합니다. 이 지구상에 백만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만 개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세계라는 것은 이름들의 총체입니다. 이름은 누가 부여했는가? 내가 부여했습니다. 내가 부여한 이름은 나의 세계입니다. 

모두에게 같은 세상은 없다

우리가 똑같이 카메라, 선풍기, 마이크라는 말을 쓰지만 서로 이해하는 것이 다릅니다. 추위를 유난히 심하게 느끼는 사람에게 선풍기와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에게 선풍기는 다가오는 이미지가 다릅니다. 똑같은 생각과 이미지의 선풍기가 아닙니다. 개개인이 생각하는선풍기가 다 다릅니다. 

사람이 보는 세계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박쥐는 세계를 눈이 아니라 초음파라는 소리로 봅니다. 박쥐가 보는 세계와 사람이 보는 세계는 같지 않습니다. 빛을 매개로 한 세계와 소리를 매개로 한 세계를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다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백내장 수술을 했는데요. 백내장 수술은 두 눈을 동시에 하지 못하고 한 쪽 씩 번갈아 합니다. 수술을 한 눈과 안 한 눈이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아직 수술을 하지 않은 눈으로 보는 세상은 그전까지 보던 세상 그대로이고요, 수술을 한 눈으로 보면색깔이 완전히 다르고 참 선명합니다. 둘 다 내 눈인데, 내 눈에서도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입니다. 실제로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세계입니다. 그러니 각자의 세계가 다른 겁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따로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인식한 것이 세계입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인식되지 않는 것입니다. ‘볼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는가?’라는 것은질문부터가 잘 못 된 것입니다. 볼 수 없는 세계에는 존재한다는 표현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 와서 “영혼이 있나요?”라고 물으면 부처님은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질문 자체가 틀렸기 때문에요. 그래서 부처님은 그질문에 대해 있다, 없다고 대답을 하지 않고 연기설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있다 혹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그 사람의 뒤바뀐 생각을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욕망을 보살의 원력으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욕망이 이름을 부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욕망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욕망이 없으면 중생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도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죽습니다. 욕망을 인정하되, 욕망을 원력을 전환시켜야 합니다. 이세계를 이런 방식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길을 걸을 수도 없고 대화를 할 수도 없습니다.

원력이란 자비심입니다. 중생의 욕망을 보살의 원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깨닫는 것입니다. 욕망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뿌리 깊은 무명, 뒤바뀐 생각을 바로잡아야 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순순한 의식 상태에서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것이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을 통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수행의 방법은 기도도 있고 참선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시인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는 이렇게 인생을 불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법문을 바탕으로 업보와 12처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Previous

불교식 제사의 의미

[길따라절따라] 불국토 경주를 가다

Next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