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원의 의미

요즘 같은 현대사회에도 돌이 많은 곳에는 돌탑이 쌓인다. 마음속에 저마다 소원하는 바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소원을 비는 사람이 있다면 이 소원이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행의 공덕을 축원장을 올린 사람에게 회향하는 스님이다. 수행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그로 인해 재화를 얻는 직업으로써의 개념이 아니라, 남을 위한 자비심을 내고 그로 인해 다 같이 부처가 되자는 공덕의 일부이다. 법회에 참석할 때마다 수행과 공덕을 모두 자비심으로써 실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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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소원

종무소 밑 공터에 석축을 새로 쌓으면서 사람들이 오다가다 앉아 쉴 수 있는 평평한 바위 몇 개를 놨습니다. 바위를 놓을 때의 의도는 벤치를 대신해 앉아가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보니 앉을 자리가 없는 겁니다. 돌탑이 빼곡하게 쌓여서 말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엉덩이도 고급이 되어서 바위에는 안 앉는구나. 벤치를 설치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돌이켜보니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요즘 같은 과학기술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소원하는 바를 품고 있고, 그런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하는 간절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그런 마음들로 인해서 저렇게 돌탑을 쌓는구나, 이해되었습니다. 

출가 전 20대에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간 적이 있습니다. 등산로 바로 옆에 자그마한 토굴이 있고 그 앞에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탑들이 있었는데요. 젊은 치기에 ‘사람들이 아직도 이런 미신을 믿느냐 말이야!’ 하며 돌탑을 건드렸습니다. 마침 토굴에서 어떤 보살님이 그걸 보고있다가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예끼, 이놈들!” 소리에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도망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때는 철이 없어서 돌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과 정성이 담겨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툭툭 건드려보고 넘어뜨리고 재미있어 했지요. 저는 돌탑을 보면 항상 그 시절의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 사진 찍듯 아주 선명하게 기억되는 삶의 순간 중 하나로써 말입니다. 

이런저런 사유로 돌탑이 잘 무너지기도 하지만 언제나 다시 생겨납니다. 돌아서면 또 생겨 있고 또 생겨 있어요.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언가 간절하게 비는 마음이 항상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욕망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건강한 욕망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욕망이 과해지면 탐욕이 되고 과하다 못해 탐욕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합하면 애착이 되고 집착이 됩니다. 이런 번뇌가 삶을 괴롭게 하니 부처님께서는 욕망 자체를 없애라고 하셨지만, 중생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욕망이 있습니다. 

남을 위한 자비심의 발로 축원

얼마 전 신도분의 가족이 한방병원을 개원했다고 하여 축하 차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예불을 보면서 축원문을 읽는데 그병원 이름이 나오는 겁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조금 더 간절하게 ‘잘 되기를 바란다’하는 마음을 담아 축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반성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축원장들을 건성으로 읽었구나. 이렇게 마음을 담아서 축원해야 하는데.’ 하고요. 

축원장 이야기를 하면 또 몇 년 전 일이 생각납니다. 2020년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3주간 병원에 있다가 다시 주지 소임에 복귀했습니다. 어느 날 축원을 하는데 ‘속득쾌차 발원 비구 중현’이라는 축원장이 있는 것을 보고 참 감동을 했습니다. 누군가 종무소에다가 저의쾌유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축원장을 올린 겁니다. 나의 쾌유를 비는 축원문을 스스로 읽는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그런 진정성을 그간 잊고지내고 있다가 얼마 전 한방병원 축원문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반성했습니다. 

여러분. 기도비를 내는 대가로 축원을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치 네일샵에 가서 돈 얼마 주고 ‘손톱 관리해주세요’ 하면 관리사 보살이 서비스해주는 것처럼 스님들이 돈을 받고 기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스님들은 우리의 수행의 공덕을 축원하는 분들에게 돌리는 것이에요. 

예불에서 스님들이 축원을 하기 전에 선행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천수경을 읽고 정근을 하고 칠정례를 합니다. 스님의 입장에서 예불하고 기도하는 행위는 모두 수행입니다. 이렇게 수행한 공덕을 내가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축원을 한 신도분에게 돌리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불공 끝에 개인 축원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수행은 사회에 기여하는 농사

그런데 잘못 접근하면 기도를 마치 상품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네일아트 할 때 무슨 색깔로 칠해주세요, 손톱을 이렇게 깎아주세요하는 것처럼요. 신도도 그렇지만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일기도 상품, 1년기도 상품으로 기도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님들은 기도하는 것이 직업이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이란 것을 신도도 스님도 명심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힌두교에는 바라문이라고 하는 사제가 있었습니다. 바라문이라고 해서 모두 제사를 지내고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라문 중에서도 인생이 안 풀린 분들은 농사 짓고 입에 풀칠을 했지요. 한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입으로 ‘나도 농사를 짓는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당신이 실제로 농사짓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신이 정말로 농사를 짓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보라.”

부처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결실을 맺으면 먹는다. 믿음은 씨앗이요 고행은 비며 지혜는 쟁기와 호미, 부끄러움은 호미자루, 생각은 호미 날과 작대기다. 몸을 근신하고 말을 조심하며 음식을 절제하며 과식하지 않는다. 노력은 내 소임으로 나를절대 자유의 경지로 실어다 준다. 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된다.”

다시 말해 바라문처럼 땅에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농사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그 결실이 맺히면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수행 자체가 농사이며, 나만을 위한 농사가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농사라고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생각하시기에 수행은 취미로 하는 것이나 적성이 맞아서 한 번 해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하는 정신노동으로 여겼습니다. 수행은 정신노동이고 이 노동이 사회에 충분히 기여하기 때문에 수행자들에게 시주물을 올릴 필요가 있으며 수행자는 그 시주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수행은 직업 아닌 자비

직업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돈을 번다는 측면이고, 두 번째는 내가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측면입니다. 직업은 어떤일을 할 때 내가 모르는 남을 위해서 하는 동시에 나에게도 경제적인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업으로써의 정원사라면 내가 모르는 남의 정원을 정성들여 가꾸고 그 대가로 급여를 받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하루종일 자기 집 정원을 가꾼다 하더라도 그것은 취미일 뿐 직업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한 달에 한 번 시내에 나가서 피자를 만드는데요. 하루종일 토핑하고 피자를 굽고 나르고 피자 먹는 사람들의 만족도를 살핍니다만, 나의 직업이 피자가게 사장인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장사가 아니라 봉사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직업에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측면과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때문에 축원할 때도 나의 수행의 공덕을 신도들에게 돌리는 것이지요. 수행과 축원에는 첫째 이런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예불의 공덕을 회향하는 자비심을 내자

둘째. 축원을 할 때는 축원자들이 발원하는 바를 가슴으로 느끼고 그 일이 꼭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수행의 공덕이 그들에게로 갑니다. 단지 이름과 주소를 읽는다고 해서 수행의 공덕이 회향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자비심이 우러나야 합니다. 

마이크를 잡고 기도하는 스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날 법회에 같이 동참한 여러분들도 같이 축원하는 마음을 내는 겁니다. 신도분들도 스님들과 같이 천수경 읽고 정근하고 칠정례 하지 않았습니까? 축원 역시 스님들이 대표로 읽을 뿐 동참하신 여러분들도 마음속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 축원을 하시면 됩니다. 

이때 내 개인 축원만 하지 말고 스님이 읽고 있는 축원자들의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내면 여러분의 수행 공덕이 다른 분들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이나 스님들이나 예불 한 시간을 헛되이 쓴 게 아닌 것이지요. 

자비심의 실천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석한 예불에서 축원하는 시간이 돌아오면 축원을 부탁한 이름의 주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진심으로 내는 데에 자비심이 있습니다. 그래야 내 수행이 공덕으로 돌아가고 그래야 내 안에서 자비심이 생겨나고 그래야 내 수행이 진정 의미 있는 것입니다. 

모든 축원의 마지막은 자타일시 성불도입니다. 나와 남이 한꺼번에 부처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나와 남이 같이 부처가 되는 것의 출발점은 타인에 대한 자비심을 내는 것입니다. 혼자 깨닫는 게 아니라 같이 깨달아야지 하는 대승적 차원의 구도정신이 자비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법회에 참석하는 일은 수행하는 일이고 축원하는 일은 수행의 공덕을 모든 이들에게 돌리는 행위입니다. 법회에 임하는 마음자세를 가다듬고 늘 내 안에서 자비심을 키우는 수행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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