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곡 해설 3

깨달은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지식을 찾아가 인가를 받은 후에는 인연 따라 자유롭고 너그럽게 지내되 인연이 맞는 중생을 맞나면 그 중생의 근기에 맞게 제도해야 한다. 깨달으면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내게 된다.
한편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거품 같고 허공과 같다는 것을 알고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자극을 깨어 있는 마음으로 관찰해야 한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온갖 것들을 작동시키는 전기와 같음을 명심해야 한다.

#기도, 나는누구인가, 무아, 수행

참선곡(參禪曲)

선지식을 찾아가서 요연(了然)히 인가(印可) 받아

다시 의심 없앤 후에 세상 만사 망각하고

수연방광(隨緣放光) 지내가되 빈배같이 떠돌면서

유연중생(有緣衆生) 제도하면 보불은덕(報佛恩德) 이 아닌가

일체계행(一切戒行) 지켜가면 천상인간 복수(福壽)하고

대원력을 발하여서 항수불학(恒隨佛學) 생각하고

동체대비(同體大悲) 마음먹어 빈병걸인 (貧病乞人) 괄시 말고

오온색신(五溫色身) 생각하되 거품같이 관(觀)을 하고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몽중(夢中)으로 관찰하여 해태심(懈怠心)을 내지 말고

허령(虛靈)한 나의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팔풍오욕(八風五辱) 일체경계(一切境界) 부동(不動)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나가세.

깨달음 그 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 시간에는 깨달은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입니다. 누군가는 ‘나 같이 나이 먹은 사람이 깨달을 수조차 있겠어?’ 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나라 불교는 1초만에 깨달을 수 있고 깨달으면 그 즉시 여래의 경지로 들어가는 간화선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깨닫기만 하면 출가자든 재가자든 구별할 것 없이 단박에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선지식을 찾아가서 요연(了然)히 인가(印可) 받아

어떠한 깨달음이 있을 때 ‘내가 깨쳤구나’ 하고 자기 스스로 검증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서 인가를 받으라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수연방광(隨緣放光) 지내가되 빈배같이 떠돌면서 유연중생(有緣衆生) 제도하면 보불은덕(報佛恩德) 이 아닌가

인연 따라 자유롭고 너그럽게 지내라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깨달은 다음이라도 ‘내가 깨달았으니 너는 내 말대로 해야 해’라는 강요 없이 빈 배 같이 떠돌다가 인연이 맞는 중생을 만나면 그 중생의 근기에 맞게 제도하는 것이 할 일입니다.

일체계행(一切戒行) 지켜가면 천상인간 복수(福壽)하고

깨달은 뒤에도 계율을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경허스님은 일체의 계율을 잘 지키면 천상에 있는 존재들이나 인간들이 모두 복과 수명을 누린다고 이야기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계를 지키면 됩니다. 새배 열심히 한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계를 지키면 복은 자동으로 따라옵니다. 여기에서 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오계입니다. 오계를 지키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입니다.

동체대비(同體大悲) 마음먹어 빈병걸인 (貧病乞人) 괄시 말고

대비는 큰 자비심이고, 이 자비심이 나오는 배경은 너와 내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곧 나의 고통이라는 것, 이것이 한 몸입니다. 불교사상을 공부하고 연기사상을 잘 이해한다면 더욱 깊은 자비심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다 한 몸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거기에서 자비심이 나옵니다. 다 내 자식 같다는 마음입니다.

깨닫기 전에는 이러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 일부러 노력을 해야 하고, 깨달은 후에는 내가 굳이 노력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오온색신(五溫色身) 생각하되 거품같이 관(觀)을 하고

오온색신이란 나 자신을 말합니다. 내가 바로 거품 같다는 것입니다. 거품은 공허한 것입니다. 금방 사라지지요. 이 육신이 나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모든 번뇌가 나옵니다. 그 마음을 버리는 것이 곧 깨닫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다보면 그 실체를 알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의 개념입니다. 사랑, 정의, 평등, 자유 같은 것들이 개념이듯이 나라고 하는 것도 내가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나를 몸뚱아리와 일치시키는 데에서 육체에 대한 집착이 생깁니다. 몸이 조금만 고장나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긴장되고 두렵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몽중(夢中)으로 관찰하여 해태심(懈怠心)을 내지 말고

역순경계란 무엇일까요? 역경계와 순경계를 합쳐서 이르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경계는 내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 중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역경계이고 나에게 이로운 것이 순경계입니다. 이러한 모든 자극을 깨어있을 때는 당연하고 꿈속에서조차 관찰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생살이가 고달픈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면 마음이 너무나 슬픈 경우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밥 먹고 산책하는 모든 때에 아들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괴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슬프다, 괴롭다는 마음이 스스로 몸집을 불려 커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는 마음의 병이 깊어진 것이지요.

허령(虛靈)한 나의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팔풍오욕(八風五辱) 일체경계(一切境界) 부동(不動)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나가세.

내 마음이 허공과 같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라는 말입니다. 허령하다는 것은 비어있으면서도 신령스럽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마치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눈으로 마음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 작용은 있으나 볼 수 없는 전기와 같다

혜가스님이 달마대사를 마음이 너무 괴로우니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지요. 그때 달마스님이 뭐라고 답했습니까? 네 마음을 가져오면 편하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혜가스님이 깨친 것이지요. TV가 고장나면 TV를 가져가서 수리하듯, 그렇게 힘든 마음을 가져오라고 하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허공과 같은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있지도 않은 마음 때문에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 달마스님이 이렇게 답한 것입니다.

허공과 같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화를 내고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심심해합니다. 이것이 다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느낄 수는 없지만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닙니다. 비유를 들자면, 콘센트를 꽂으면 전자기기가 돌아가는 것은 전기가 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전기를 볼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번개가 쳤을 때 보이는 것이 전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기에너지가 순간적으로 빛으로 바뀌어서 눈에 보이는 것이지 전기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기에너지라는 것이 그때그때 모습을 바꾸어서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데 우리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들어합니다. 마음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잡을 수도 없으므로 허공과 같이 텅 비어있는데 우리를 슬프고 괴롭고 즐겁게 하니 신통방통합니다. 그러니 신령하다고, 허령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마음이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의 에너지, 힘, 기운, 작용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태산같이 써나가자고 경허스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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