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곡 해설 2

경허스님이 참선곡을 통해서 말하는 수행의 핵심은 나를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하고 듣고 웃고 울고 밥 먹고 옷 입는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지만 죽고 나서 움직일 수 없는 시체는 ‘나’가 아니며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도무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기에 내가 아니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의심해야 한다. 소리를 내고 소리를 듣는 놈이 무엇인지를 깊이 탐구해야 한다. 그렇게 탐구하다보면 한 생각이 만년 동안 이어지게 되며, 그렇게 탐구한 끝에 본래 내가 부처였음을 깨달으면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기도, 나는누구인가, 무아, 수행

참선곡(參禪曲)

닦는 길을 말하려면 허다히 많건마는 대강 추려 적어보세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착의긱반(着衣喫飯) 대인접화(大人接話)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是)에 소소영영(昭昭靈靈) 지각(知覺)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공(本空)하고
천진면목(天眞面目) 나의 부처
보고 듣고 앉고 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번 깜짝할 제 천리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神通妙用) 분명한 이내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 마를 때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외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 간절하듯
생각생각 잊지 말고 깊이 궁구하여 가세

일념만년(一念萬年) 되게 하여
폐침망찬(廢寢忘饌)할 지경에
대오(大悟)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天眞面目) 절묘하다
아미타불 이 아니며, 석가여래 이 아닌가

젊도 않고 늙도 않고 크도 않고 작도 않고
본래 생긴 자기 영광(靈光) 개천개지(盖天盖地) 이러하고
열반진락(涅槃眞樂) 가이 없다
지옥 천당 본공(本空)하고 생사윤회 본래 없다

수행의 핵심, 나는 누구인가?

수행을 하는 방법은 아주 많습니다. 기도, 좌선, 간경, 주력, 독경… 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대강 추려서 적어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경허스님이 수행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짚어주는 것입니다.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언제 어디서나 신령스럽게 빛나며 알아차리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경허스님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며, 이것이라는 것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아봅니다. 앞서 열거한 모든 것들을 하는 이것은 바로 ‘나’ 입니다. 나라는 것이 무엇이며, 나의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탐구하라 합니다.

질문은 쉽지만 대답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할 때 나를 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은 나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경허스님은 묻습니다. 너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느냐고요.

몸뚱이는 ‘나’가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몸뚱이가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몸뚱이가 나라고 한다면, 몸뚱이가 죽어서도 말을 하고 웃고 울고 보고 듣고 옷 입고 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몸뚱이가 나라는 대답은 틀린 것입니다.

몸뚱이가 누굴까? 생각하는 것이 나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하는 것을 보여 달라고 경허스님은 말합니다. 마음이 따로 있고 번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찰나찰나에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두고 어떨 때는 망상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번뇌라고, 또 마음이라고, 의식이라고, 무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망상번뇌는 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원래 없는 것입니다. 공한 것이지요. 생각, 망상, 번뇌, 의식 등은 모두 하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 찰나 생겼다가 사라지는 생각이 바로 마음이고 망상이고 번뇌입니다. 이것은 왜 공합니까? 그 한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 찰나 생겼다가 사라지는 그 생각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면 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이란 것은 그냥 생겼다가 그냥 사라집니다. 그것이 생각의 속성입니다. 실체가 없는 것, 공한 것입니다.

마음의 작용, 마음의 정체

그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경허스님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마음은 무엇을 하느냐? 보고 듣고 앉고 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번 깜빡할 때 천리만리를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본다 하면 눈이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마음이 봅니다. 눈이 본다면 시체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이 본다면 눈알을 내 밖으로 따로 빼서 놓는다면 눈이 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눈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습니다.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나입니다.

마음은, 생각으로는, 눈 한번 깜빡할 때 서울에 있는 경복궁에 다녀올 수 있지요. 마음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작용하는데 마음을 또렷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그 마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보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형태가 없기에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의심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되 어떻게 합니까?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합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는 모습을 보자면 고양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집중하여 쥐만 쳐다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확 덮쳐서 쥐를 잡습니다. 목마를 때 물을 찾을 때는 어떻습니까? 오로지 물이 어디에 있는지만 생각하고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습니다. 칠십 먹은 과부가 하나뿐인 자식을 잃었다고 할 때는 어떻습니까? 밥 생각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로지 죽은 자식 생각뿐일 것입니다. 그렇게 오로지, 간절하게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의심하는가?

그렇다면 의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핵심입니다. 어떻게 의심하는가만 알면 다른 내용은 다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의심하는 것은 추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추리하는 것은 사실에 기반하여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것은 어떤 이유도, 다른 생각도 없이 오로지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간단하게 화두 참구하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흔히 참선이라 하면 가부좌를 틀고 꼼짝없이 앉아있는 것만을 생각하는데, 기도하는 것도 참선입니다. 이를테면 ‘화엄성중’ 정근을 한다고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까요?

합장을 하고 눈을 감으십시오. 마음속으로 화엄성중을 하되, ‘화’라고 말해야지 생각하고 ‘화’를 말하고 ‘엄’이라고 말해야지 생각하고 ‘엄’을 말해보십시오. 마치 내가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내 마음이 이마 맞은편에서 화엄성중이라고 마음속으로 소리 내는 내 자신을 지켜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남이 화엄성중을 하는 것을 지켜본다는 느낌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타인을 보는 것처럼 정근을 하는 내 자신을 보면 무엇이 화엄성중이라는 소리를 내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 조금 생깁니다.

이 연습이 제대로 작동하면 그 다음으로는 마음속으로 되뇌던 화엄성중이라는 소리를 조금씩 입 밖으로 내어봅니다. 마음속 한편으로는 무엇이 이 소리를 내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소리를 내면 내가 낸 소리가 내 귀로 들려옵니다. 그렇다면 이 소리를 듣는 놈은 무엇인지를 의심합니다.

이러한 의심도 적응이 된 후에는 내가 소리를 내는 순간 배에서 시작하여 목을 거쳐서 입에서 나오기까지의 소리를 자세히 살핍니다. 무엇이 목울대를 떨리게 하고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도록 하는가?

마음속으로 정근을 할 때도 의심을 하고, 소리를 내는 것과 듣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심하고, 소리를 내는 그 순간에도 동시에 의심을 하는 훈련을 하다보면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지 하는 느낌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티벳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수행이란 생각과 생각 사이를 늘리는 것이다.’ 한 생각은 한 찰나 생겼다 사라지는 것인데, 이 생각이 언제 시작하고 끝나는가를 간파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 찰나를 간파하면 망상이 없이 아무 생각이 없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망상과 망상 사이, 번뇌와 번뇌 사이를 늘리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앞선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무엇이 염불하는가 하는 것을 추리하지 말고 의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의심을 깊이 탐구하게 되면 한 생각이 만년 동안 이어지게 됩니다. 망상이 없는 생각과 생각 사이가 길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잠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잊는 지경이 되면 대오하기에 가까워집니다.

‘나’와 ‘마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

내가 부처였다는 것을 깨달으면, 부처는 어떤 모습이나 천진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치고 박고 싸우다가도 돌아서면 서로 해맑습니다. 이 말은 집착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계속 키워나가는 것은 중생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금방금방 잊어버립니다. 또한 아이들은 귀중하고 천하다는 것의 구별이 없습니다. 오만 원 짜리 지폐와 천 원 짜리 지폐에 대한 판단이 없습니다. 이것은 소중하고 저것은 덜 소중하다는 가치 판단이 없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면 이와 같은 천진무구한 면모를 띠게 됩니다. 이렇게 깨달으면 내가 바로 아미타불이며 내가 바로 석가모니불입니다.

이 육신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나고 이것이 나 아니라는 것이 없으므로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내 안의 부처는 전혀 없던 것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있던 부처입니다. 신령스럽게 빛나는 내 안의 부처가 하늘을 덮고 땅을 덮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개천개지한다는 것은 곧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곧 온 세계이고 온 세계가 나입니다. 열반의 진정한 즐거움이 끝이 없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지옥과 천당이 본래 공하고 나고 죽는 것 역시 본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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