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과 선정

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에서 목요일은 안정하는 날이고 금요일은 선정하는 날이다.
안정한다는 것은 안심인명하는 것이다. 마음을 안정되게 하면 곧 천명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마음이 잔잔한 호수와 같이 삼매에 든 상태는 곧 이 세상의 이치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인 상태를 말한다.
목요일은 정진하는 날이다. 정진은 애써 힘쓰되 꾸준히, 골고루, 세밀하게,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힘을 쓰는 것이다.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이렇게 정진하면 대분심과 대용맹심, 대의심이 난다. 이 세 가지는 화두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로써 수행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러준다.

#기도, 삼매, 선정, 수행, 육바라밀, 정진

금요일은 정진하는 날

지난 초하루법회 때 올바로 듣고 올바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제대로 듣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감정과 느낌, 체험을 수용하고 공감하는 것이요, 말하는 것은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고 말을 해서는 안 될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고 용기 있는 말하기입니다.

그러면서 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 한 구절을 소개했는데요. “말을 함부로 하는 혀는 나 죽이는 도끼가 되니 입은 병입과 같이 말이 없고 뜻은 성문과 같이 굳게 닫읍시다.”라는 구절이었습니다.

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은 육바라밀을 매일매일 실천하기 좋도록 일주일에 한 항목씩 제시해놓은 것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 가지 바라밀에 일요일은 만행을 넣어 구산스님의 칠바라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앞서 소개한 구절은 금요일에 해당하는 선정에 들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정의 전체 내용을 함께 읽어봅시다.

오늘은 안정의 날입니다. 사물의 진정한 이치를 깨우치고 마음을 안정합시다. 몸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해야 지혜가 밝아집니다. 안심인명은 지분과 지족과 팔풍의 세파에 부동하야 허영심이 없어야 부동지인 마음을 깨우칩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혀는 나 죽이는 도끼가 되니 입은 병입과 같이 말이 없고 뜻은 성문과 같이 굳게 닫읍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금요일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혀와 입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안심인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라고 말하는 것은 굳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불교의 원형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원형이며 순수한 불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을 거쳐서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중국에 있었던 유교와 도교적 요소가 많이 섞이고 융합되었습니다. 초기불교가 아닌 대승불교에 도교나 유교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안심인명, 마음을 안정되게 하면 천명에 들어간다

안심인명이라는 말은 불교가 아니라 유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안심이란 마음을 안정되게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명(천명)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면 내가 뜻하는 바가 곧 하늘의 이치와 부합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유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선비의 마음자세입니다.

따지고 보면 불교에서 지향하는 깨달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번뇌에 지배를 받는 개인이 중생심을 털고 깨달음을 성취하면, 세상의 이치와 개인의 욕심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됩니다. 같은 맥락이기에 유교의 용어이지만 불교에서도 종종 쓰는 말입니다.

마음을 편안하고 안정되게 한다는 말은 걱정이 없고 불안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마치 고요한 바다처럼 모든 것을 거울처럼 비출 수 있는 삼매의 상태에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명경지수와 같은 상태입니다. 삼매에 든 상태는 곧 이 세상의 이치와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상태입니다. 내가 뜻하는 바가 그대로 세상의 이치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자가 부처님에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문안인사를 드리자 부처님이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번뇌가 없는 자는 마음이 항상 편안하다.” 우문현답이죠. 묻는 사람은 밤새 잘 지냈느냐고 물었고, 부처님은 깨달은 자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노력해서 이루고자 하는 삼매의 경지가 깨달은 자에게는 평상시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안심의 상태라고 합니다.

팔풍의 세파에 부동한다는 것

지분과 지족과 팔풍의 세파에 부동하야 허영심이 없어야 부동지인 마음을 깨우친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예전에는 한자를 많이 써서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은 쉬운 말입니다.

지분(知分), 나의 사람 됨됨이를 제대로 알고. 지족(知足), 작은 것에 만족하여 욕심내지 말고. 팔풍(八風)의 세파에 부동하여란 여덟 가지 바람에 의해 거칠어진 파도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친 세파를 일으키는 여덟 가지 바람이란 무엇일까요? 이 쇠 훼 예 칭 기 고 락(利ㆍ衰ㆍ毁ㆍ譽ㆍ稱ㆍ譏ㆍ苦ㆍ樂)입니다.


이(利)는 이익되는 것입니다. 훼(毁)는 남이 나에 대해서 훼손하는 것입니다. 칭(稱)은 남이 나에게 칭찬하는 것이고, 예(譽)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명예롭게 대해주는 것. 기(譏)는 험담을 하는 것. 고(苦)는 괴로운 것. 락(樂)은 즐거운 것입니다.

네 가지는 남들이 나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것에 해당하고 나머지 네 가지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여덟 가지의 바람과 같습니다. 그런 바람들이 내 마음을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흔들고 있는 것이죠. 잔잔한 호수에 바람이 불면 어떻게 됩니까? 물길이 일고 심하게 치면 파도가 칩니다. 그런 호수에 무언가를 비춰서 볼 수 있는가? 볼 수 없습니다.

팔풍의 세파에 마음이 흔들리면 안정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삼매에 들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것들에 흔들리지 말고 허영심이 없어야 동하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깨우친다 하였습니다.

왜 우리 사람들은 이런 이익이 되는 것을 좋아하고 손해보는 걸 싫어할까요? 마음속에 허영심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이 없어야 마음이 안정됩니다. 실천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혀와 입을 잘 다스리면 마음을 안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선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선정은 사물의 진정한 이치를 깨우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삼매가 되는 상태를 이야기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우선 말을 아끼고 혀를 잘 다스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시작을 해야 우리가 지향하는 삼매 즉 고요한 마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말입니다.

목요일은 정진하는 날

법문을 하는 오늘은 목요일입니다. 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에서 목요일은 정진, 힘쓰는 날입니다.

오늘은 힘쓰는 날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을 게으르게 하지 말고 정밀하게 밀고 나갑시다. 정진에 대분심과 대용맹심과 대의심을 내면 자아를 깨우치는 힘과 임무에 충실한 힘이 되니 바닷물을 푸고 보배구슬을 찾는 힘을 냅시다. 방법은 첫 째 진실 둘 째 근면 셋 째 인내 넷 째 검소 다섯 째 연구 여섯 째 찬탄 일곱째 근황의 일곱 가지로 노력하여 정진행을 닦읍시다.

목요일은 구산스님이 정진행을 닦으라 한 날입니다. 오늘은 힘쓰는 날입니다. 육체적 노동을 하라는 게 아니라 보시 지계 인욕을 게으르게 하지말고 정밀하게 밀고 나가자고 합니다. 포인트는 정진을 정밀하고 세밀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요즘 말로하면 디테일을 놓치지 말고 사소한 것을 놓치지 말고 정진해야 합니다. 이게 포인트입니다.

어떤 날은 신심에 가득 차서 수행을 몇 시간이나 했다가 어떤 날은 기분도 안 좋고 기운이 없어서 안 하지 말고 언제나 정밀하고 세밀하게 수행을 해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빼먹지 말고 사소한 부분까지 챙겨서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하는 방법의 핵심입니다. 힘을 쓰되 꾸준히, 골고루, 세밀하게, 하나하나 놓치지 말고 꼼꼼하게 힘을 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정진에 대분심과 대용맹심과 대의심을 내라고 합니다. 어떤 마음을 내면 세밀하게 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간화선에서는 삼요라고 합니다. 원래는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의 세 가지인데요. 구산스님은 대신심 대신에 대용맹심을 언급했습니다. 대신심은 신심을 크게 낸다는 겁니다. 신심을 낸다는 것은 내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임을 믿는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말하는 나 자신, 기뻐하는 나 자신, 즐거워하는 나 자신. 그 자체가 부처라는 믿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나머지 두 개도 생길 수가 없습니다.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심은 하나

지금 이 순간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화내는 이 놈이 바로 나인데, 이 놈이 바로 부처인데. 이것을 철두철미하게 믿으면 자연스럽게 분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바로 부처인데 지금 내 꼬라지를 보라 이겁니다. 한낱 별 볼 일 없는 중생이라 이겁니다. 숱하게 많은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어서 불보살의 경지에 올라섰는데, 나도 부처인데, 아직까지 멍청하게 그것도 모르고 중생으로 살아온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억장이 무너지고 한탄스럽고 통탄할 노릇입니다.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분한 겁니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수행을 못 하는 겁니다.

이렇게 사는 게 중생이고 인간이 다 거기에서 거기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수행의 본상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대신심을 내야한다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부처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확실해야 합니다. 이런 마인드가 없으면 불자가 아닙니다. 내가 부처인데 어떤 내가 부처인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부처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낱 중생으로 살아가는 나에 대해서 분한 마음이 생깁니다.

분한 마음이 생기면 그 다음에 의심이 생깁니다. “아니 근데 왜 대체 나는 중생으로 살고 있을까?” 화두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송장을 끌고다니는 이 놈이 누구인가?’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삼요가 철저해야 의정이 들어 깨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이 화두에서 송장은 내 몸뚱이입니다. 내 몸뚱이와 10분 전에 죽은 어떤 시체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눈도 두 개 콧구멍도 두 개, 시체나 자고 있는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기쁘면 즐거워하고 괴로우면 괴로워하고 짜증내고 불안해합니다. 이 몸뚱이는 시체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어떤 놈이 이 산 송장을 끌고 다니는가?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겁니다. 이것을 일반화시키면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심입니다. 이런 것들이 화두를 드는 데에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분심이 생기고 분심이 있어야 의심이 생기는 어떤 단계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는 같이 가는 겁니다. 우리가 화두를 들 때의 마음의 상태를 이런 면에서 보면 대신심이고 다른 측면에서 보면 대분심이고 대의심입니다. 결국 이 말은 세 가지 마음이 내 안에 차있으면 그때 마음이 수행하는 마음이란 겁니다. 내 마음에 신심 분심 의심이 없다면 수행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수행의 자세는 자연적 심리상태를 거스르는 일

반면 자연적인 심리상태가 있습니다. 책을 보고 책이라고 생각하고 카메라를 보고 카메라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적인 심리상태입니다. 똑같은 사과를 보고 요리사는 샐러드를 만들 생각을 하고, 과학자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하고, 화가는 사과의 색깔을 구현할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이 자연스러운 심리상태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할 때의 마음가짐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모두가 사과를 보고 사과라고 생각하는것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정보를 획득하고 그런 정보를 모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과가 무엇인지 그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를 모으고 생각을 가지고 그런 생각이 더 발전해서 선호도와 가치관이 되고 세계관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또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도 영향을 주게 되지요.

수행의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선입견과 편견, 기존의 내가 가지고있는 가치관과 견해를 머리속에서 지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개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든다고 할 때 이 화두에 대해서 의심이 들어야 헤요. 의심이 안 들면 화두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보면 개에게 불성이 있냐 없냐를 따지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에요. 그러나 수행은 이런 자연적인 사고방식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입견과 편견, 견해, 가치관, 세계관과 같은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들을 털어내야 합니다.

일상의 자세로부터 거리를 두고 달리 생각하는 일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을 털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를 들면 우리가 유튜브를 보는데 알고리즘이라는 게 있잖아요? 내가 동영상을 하나 보면 그와 유사한 내용이 계속 추천으로 제안되는 것이죠. 이것이 유튜브의 알고리즘이고, 우리는 세상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려면 한 발짝 떨어져서 봐야 합니다. 일상에서 멀찍이 떨어져야 보고 듣는 대상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 이미지, 가치관, 견해, 통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요. 이거를 멋있게 말하면 초월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자세를 가질때 비로소 수행에 들 수 있고, 그래야지만 사과를 앞에 두고 ‘사과가 있네!’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저기에 뭔가가 있구나. 저것이 무엇일까?’라고 거리감을 둘 수 있습니다. 이런 거리감을 둘 때 수행의 길에 들어갈 수 있고 화두를 제대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신심과 분심, 의심이 생겨납니다.

평소 24시간 수행하는 마음자세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운전도 못 하고 밥도 못 먹어요. 이런 것들은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하는 거고요. 다만 하루 중 단 몇분 , 몇십 분, 몇 시간이라도 시간을 내서 수행하는 마음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닷물을 푸고 보배 구슬을 찾는 힘을 내자는 말을 합니다. 이 비유가 정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데요. 바닷속에 보배구슬이 빠졌다면 그걸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그것이 정진하는 자세에 다름 아닌 겁니다. 그 바다물을 다 퍼내야 한다는 겁니다. 어마어마한 시간이 들고, 퍼낼 때에도 구슬을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꾸준히 사소하게 끝까지 챙기면서 수행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구절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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