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법과 가까워지기 (feat. 조용필 ‘바람의 노래’)

조용필 ‘바람의 노래’의 불교적 해석을 통해 알아보는 불교의 인연법.
일상에서 흔히 쓰는 “인연”이라는 말은 불교의 인연생기(연기법)에서 파생했다. 인연은 조건들이 결합해서 결과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인연은 나이면서 동시에 네가 되는 연기법에 의해서만 성립한다. 나와 네가 각기 따로 있고 독단적인 존재라는 잘못된 생각이 고통과 번민과 번뇌를 만든다.
부처님이 제시한 세상의 이치는 연기법이고, 부처님이 제시한 인생의 기준은 계율이다.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부처님의 연기법과 계율을 다시금 새겨보자.

#고통, 무아, 바람의노래, 사성제, 삼법인, 연기법, 인연법, 조용필

가을 날 노래 한 소절

시내 자비신행회에서 불교 아카데미 강의를 마치고 절 주차장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동차 라디오에서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오십견이 와서 고생하는 집사람을 위해서 그가 좋아하는 조용필 노래를 신청한다”고 하는 사연과 함께 말입니다. 가을의 정취와 어울리기도 하고, 마침 ‘퇴근길’인 내게도 꼭 맞는 노래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용필 형님의 노래를 경청했습니다. 

노래를 가만히 듣다 보니 그 어떤 조사 스님의 게송만큼이나 불교적 깊이가 있는 가삿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오늘은 조용필의‘바람의 노래’를 주제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연법을 해석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바람의 노래

노래조용필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수가 없네

내가 아는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없다는 

우린 깨달아야 

이제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수가 없네

내가 아는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없다는 

우린 깨달았네

이제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없다는 

우린 깨달아야 

이제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바람의 노래’ 게송 해설

바람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자연의 이치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의이치를 듣는 것은 곧 세상의 진리를 체득한다는 말과 같고요. 세월이 가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이치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깨달을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기대가 노랫말에 담겨 있습니다.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자연의 이치는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요? 지구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지구가 하루에 한 번자전을 하므로 매일 해가 뜨고 달이 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니까 나타나는 현상이고요. 자전과 공전은 왜 생길까요? 중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력이라는 것이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까지는 현대 과학에서도 속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런 현상을 부처님께서는 인연 생기, 즉 연기법으로 설명했습니다. 인과 연에 따라서 발생하고 일어나는 것이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의 모습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조용필의 노랫말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의 이치를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되겠군요. 

노랫말의 처음 두 줄은 이 나이 먹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언제쯤 나도 깨달음을 얻게 될까? 하는 독백입니다. 세 번째 줄은, 자연의 이치까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살만큼 살았으니 살아가는 이치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자조로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가만히 지난 평생을 돌이켜보니 숱하게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만났다 헤어지고 울고 웃고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10대, 20대, 30대, 40대… 더 지나 60대와 70대까지의 인생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들과 그때그때 이런저런인연으로 얽혀서 살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 직장생활을 함께 했던 동료 등 여러 사람이 있겠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더구나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드물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가만히 있는데 그런저런인연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더라는 감상에 젖게 됩니다. 

불교의 인연과 일상의 인연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인연은 ‘사람들 사이에 연분 또는 사람이 어떤 상황이나 일과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연분이라. 연분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게 되는 인연’이라고 합니다. 인연은 연분이고 연분은 인연이라니. 말장난 같지만 이렇게인연이라는 말을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인연이라는 말을 쓸 때는 ‘내가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묻어납니다. 나와 전혀 모르는, 지나가는 행인과 관계를맺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 동안 관계를 지속하는 정도의 사람과 관계 맺음을 내포하고 있는데요. 그냥 ‘관계를 맺는다’ 정도의 표현이 아니라 굳이 ‘인연’이라는 말을 쓰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인연은 엄밀하게 따지면 불교의 용어입니다. 인연생기(因緣生起), 연기법의 다른 말이지요. 인연생기란 인과 연이 합쳐지고 만나서 발생하고 일어나는 이치를 의미합니다.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인 인연법은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이자 부처님이 불교를 통해 전파하고자 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1,600년 이상 내려오면서 한국에도 유입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우리의 일상 표현 속에 자리잡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일상에서 인연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서로 간에 관계를 맺는다는 본래적 의미에 그치지 않고 다소 감정적인 요소가 첨가됩니다. ‘그냥 관계를 맺고 사는 사이’가 아니라 ‘저 사람하고 나하고 쌓인 정이 있다’는 의미가 들어가지요. 고운 정이든 미운 정이든 서로 정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일상에서 인연이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하지만, 인연이라는 말은 동시에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법을 표현하고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연의  가지 종류인연연연차제연증상연

인연은 조건들이 결합해서 결과가 생기는 것입니다. 때의 조건을 ‘연’이라고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연을 네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가장대표적으로 쓰이는 것이 인연(因緣), 두 번째는 연연(緣緣), 세 번째는 차제연(次第緣), 네 번째는 증상연(增上緣)입니다. 

인연은 인과 연을 합한 말입니다. 인은 직접적인 원인, 연은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씨앗을 심으면 나중에 싹이 나오지요. 싹은 결과, 씨앗은 원인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어떤 원인이 다른 조건과 만나서 결과를 만들어낼 때를 인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연연은 조건이 구비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언가를 보려면 보려는 대상도 있어야 하고 보는 나도 있어야 하고 보는 활동도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소리와 빛 같은 것들도 포함됩니다. 지각 활동을 할 때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연연이라고 표현합니다. 

차제연이란 순서에 따라 영향을 주는 연입니다. 생각이란 것이 실체가 있어서 쭉 하나의 생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찰나 찰나마다생각이 생겼다 사라지되, 바로 앞의 생각이 그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 조건이 되어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요. 한 생각이 다음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을 차제연이라고 하고, 이것은 불교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차제연이 왜 중요한가? 불교에서는 무아를 이야기합니다. 나라는 것이 없지만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으로 생각을 이어서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작동하는 기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무언가 찰나 찰나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사슬처럼 이어주는 것이 바로 차제연입니다. 

증상연은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크든 작든 조건으로써 영향을 미치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씨앗을 심었다고 해서 무조건 싹이 나는 것은아니지요. 씨앗은 인이고 싹은 연이되,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물, 토양, 햇빛, 바람, 영양분 같이 씨앗 외에 필요한 다른 조건들도 많습니다. 싹이 하나의 결과라면 싹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조건으로써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것. 이것이 증상연입니다. 

 없다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다시 노래로 돌아가봅시다. 나는 여기에 가만히 있는데 인연이 나에게 왔다가 갔다고 합니다. 나를 기준으로 한 내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 역시 그 사람을 스쳐 지나갈 인연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냐에 따라 나는 내가 되기도 하고 남이 되기도 합니다. 

인연이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네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독단적인 ‘나’의 입장이라면 스치고 지나가는 인연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연은 나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너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맞고 뒤로도 맞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연기법이란 내가 홀로 있고 너는 스쳐간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바람 같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나다 너다 하고 나누어서 볼 수가 없습니다. 인연법으로 얽혀 있는 우리는 내가 없으면 너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는 연기적 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우리들각자가 마치 가느다란 실 같은 존재이고, 이 실들을 엮어서 굵은 실을 만들기도 하고 굵은 실을 엮어서 더 긴 줄을 만들고 그것들을 엮어서커다란 동아줄을 만드는 겁니다. 

 있다는 생각이 번뇌를 만든다

조용필이 노래에서 말하듯, 그리움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이렇게 얽혀왔던 인연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가끔 내가 옛날에 만났던 사람들은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립거나 보고싶다는 감정이 들기도 하고, 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세상을 내 기준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 관계에 의해 진행됩니다. 우리 모두는 마치 엄청나게 굵은 동아줄을 이루고있는 아주 가느다란 실 한 오라기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나하나의 실이 없으면 굵은 동아줄이 나올 수도 없고, 하나하나의 실이 서로 꼬이지않고 각자 따로 있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여기 혼자 떨어져 있고 그 사람은 나와 분리된 객체라고 생각하니까 보고싶다, 그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있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번뇌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낙엽 지는 것을 보면 놀러 갈 생각부터 하는데, 나이가 많아지면 낙엽 지는 것을 보면 괜스레 옛날생각이 나고 마음이 울적해집니다. 

그런 마음이 번뇌입니다. 그런 번뇌는 ‘나’라는 놈이 너무나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이런 노래를 만들어내는 것이고요. 퇴근하고 주차장에 섰는데 라디오에서 조용필의 노래가 흘러나오니까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린듯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 이것이 바로 번뇌입니다. 

살아가는 방법과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

이어서 조용필은 노래합니다. 오늘도 그럭저럭 살고 내일도 그럭저럭 사는 것만 할 수 있지, 이 세상의 이치 같은 것은 나의 지혜로 알 수없다고 말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왜 인연들은 나를 스치고 지나가버리는가에 대해서는 무어라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세상의 지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먼저 이 세상의 지혜를 밝힌 이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보고, 그 이야기를 숙고하여 나의 것으로 만들면 됩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이미 밝혀 놓았습니다.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이 ‘나의 작은 지혜로는알 수가 없다’고 한 것. 그 정답이 바로 사성제라고 저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성제는 ‘아! 인생은 괴로움이다.’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도 종류가 많습니다. 사랑하는데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고[애별리고], 원망하거나 증오하는데 만나는 것도 고통[원증회고]입니다.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 없는 것도 고통[구부득고]입니다. 삼법인에서는 일체개고라고 합니다.

집성제는 이 세상이,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것입니다. 고성제의 고통을 당하다 보면 고통의 원인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 세상이 고통이라는 생각이 간절하지 않으면 고통의 원인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 역시도 간절하지 않게 됩니다. 간절함이 없으면 원인을 없애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결국은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의 원인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런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로 모든 것이 무상한 데에서 옵니다. [제행무상]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버티고 있으니 괴롭습니다. 나라는 주체는 가만히 멈춰 서있고 인연이 스쳐지나간다고 생각하니까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나라는 놈이 없는데 있다고 고집하니 고통이 생겨납니다. [제법무아]

이렇게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그 원인을 완전히 없애고 싶다는 생각이 나옵니다. 멸성제는 고통의 원인을 완전히 뿌리 뽑아서 멸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멸성제에 대한 마음이 간절해지고 치열해지면 도성제, 고통을 제거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은 목표가 아니라 기준

노랫말을 쓴 사람은 “이 세상이 작동하는 이치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치만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만 해도어디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사실은 맞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목표가 아닙니다. ‘무엇이 되겠다’는 인생의 목표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확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삶의 기준. 이것 역시 부처님께서 명확하게 제시해 두었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말을 할 때, 생각을 할 때 이러한 기준에 따라서 하라는 것이 바로 계율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세우고 오계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올바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인생이 실패와 고뇌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은 사성제라고 하는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삶의 기준으로 세울 수 있는 계율을 제대로 알거나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내가 원한 것이 아닌 무명, 실패와 고민과 번뇌가 계속 이어어지는 것입니다. 

노래하는 이는 말합니다. 실패와 고뇌의 시간을 비켜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 해답이 만약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사랑하겠다고요.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있다면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겠냐고 스스로 다독이는 것이지요.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자비심을 실천하는 쪽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이 노래가 불법을 완전히 녹여내지는 않았으나 평범한 중생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이치를 잘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요소들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이 가을날, 저처럼 노랫말을 듣고 감상에 젖어 스스로 번민을 일으지 말고, 좋은 기회로 만난 불법을 실천하는 시간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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