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코로나19 교회 집단 감염 사건으로 보는 광신과 본능.
2020년 여름, 교회에서 코로나19 집단 감염 사태가 일어나 경각심을 일으켰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맹신’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교회는 인간의 본능에 내재되어 있는 ‘군집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놀거리가 있고 즐거움이 있고,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군집욕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에 강한 믿음의 대상으로 발전하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욕구와 본능을 다스릴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사람들과 어울려 있다보면 불필요한 번뇌가 생기므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리고 말씀하셨다. 자비심으로 본능을 다스릴 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부처님이라면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은 복으로 산다”고 말씀하실 것 같다. 선업의 과보로써 받는 복과 덕으로 인생을 살아가자. 올바른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불교윤리, 앙굴리마라, 코로나

살인마 앙굴리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앙굴리마라 이야기로 법문을 시작해볼까 합니다. 앙굴리마라는 불교에서 등장하는 대표적인 살인자입니다. 앙굴리마라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부처님 당시에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는 바라문이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바라문 스승 밑에서 다른 제자들과 공부를 하는 바라문이었는데요. 워낙 열심히 하고 학업성취가 뛰어나니까 도반들의 시기질투를 사게 됩니다. 도반들이 스승에게 앙굴리마라를 모함하기를, 앙굴리마라가 스승님의 부인과 정을 통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스승은 분노하여 앙굴리마라를 죽이고자 하는데, 자기가 직접 죽일 수는 없으니 꾀를 냅니다.

“너는 그동안 내 밑에서 열심히 공부했으니 사람의 손가락 1천 개를 모아 나에게 가져오면 너의 수행을 인정해주겠다.”

앙굴리마라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사람을 죽여 손가락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모은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지요.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코살라국의 민심은 흉흉해지고 급기야 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앙굴리마라를 잡으려 하지만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앙굴리마라는 한 사람만 더 죽이면 손가락 1천 개를 모으는 시점에 다가왔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탁발을 마치시고 신통으로 내다보기를, 앙굴리마라라는 바라문이 당신의 제자가 되어서 출가하면 아라한과를 증득할 인연이 익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앙굴리마라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를 제도하고, 앙굴리마라는 부처님의 제자로 출가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살인마였던 앙굴리마라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수백 년, 몇 생에 걸쳐 받아야 할 과보를 이번 생에 받으므로 참고 견뎌야 하느니라.” 하니, 앙굴리마라는 자신의 이름을 불해(不害), 해치지 않는 자로 정하고 보다 열심히 정진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을 죽이고자 한 앙굴리마라가 부처님을 만났을 때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자 앙굴리마라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문은 거기 멈추시오.” 라고 앙굴리마라 말하자 부처님이 응수합니다.

“나는 멈추었으니 모든 존재들에게 영원히 몽둥이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대는 생명들에 대한 자제가 없으니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코로나 집단 감염으로 보는 광신

최근 온나라가 모 교회 신자들의 코로나19 집단 감염 건으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코로나 재유행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지요. 교회와 간접 접촉하여 코로나19에 감염된 이낙연 의원이 격리 중에 “교회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엄중한 행위를 했으며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만큼 엄중한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왜 앙굴리마라는 살인마가 되었나요? 날 때부터 살인마의 DNA를 가지고 있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앙굴리마라는 누구보다 학업 성취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스승에 대한 믿음이 너무 큰 나머지 손가락 1천 개를 가져오라는 스승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살인마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미신(迷信)이 있습니다. 한자로는 미혹할 미(迷)를 씁니다. 믿기는 믿는데 엉뚱하게 믿는 것입니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을 자면 죽는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 이야기를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저도 자기 전에는 선풍기를 끄고 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겁니다. 이것이 미신입니다.

미신이 맹신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미신을 맹신하게 되면 그 미신은 확고부동한 진리가 됩니다. 맹신(盲信)은 앞뒤 따지지 않고 무조건 믿는 것입니다. 스승이 손가락 1천 개를 가져오라고 시켰을 때 ‘왜 나에게 이런 것을 시키지?’ ‘이게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인가?’ 자기 머리로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마치 눈 먼 사람처럼 스승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것입니다.

왜 앙굴리마라는 999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을까요? 처음 시작은 스승의 얼토당토않은 미신 같은 말이었고, 그 다음엔 앙굴리마라의 맹신이 있었습니다. 살인을 몇 번 하다보면 과연 이것이 올바른 행동인가? 회의감이 들 법도 한데 왜 앙굴리마라는 계속 살인을 했을까요? 미신과 맹신이 결합하면 확고부동하게 되고 그 미신에 자신의 신념이 보태졌기 때문입니다. 미신과 맹신, 그리고 신념이 만나면 광신(狂信)이 됩니다.

흔히 광신도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미칠 광(狂)을 쓰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자기 혼자 잘못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철두철미하게 신념화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자기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위협이 되는 광신

앞서 이야기한 최근의 사례도 객관적으로 볼 때 광신도에 가깝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합니다. 잘못된 신념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신도들은 우리 사회에 위협을 가합니다.

앙굴리마라도 처음에는 미신과 맹신으로 시작했지만 광신이 된 후에는 사회에 위협을 가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하고, 피하는 것을 보고 기고만장해졌습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 생긴 것이지요.

광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신도가 처음부터, 날 때부터 잘못된 생각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아닙니다. 출발은 앙굴리마라처럼 사소한 이유로 출발하여 미신을 맹신하게 되고 맹신이 깊어지면서 자기화되고, 내재화되고, 내면화되면서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서울의 절에는 신도들이 많습니다. 천주교 성당에도 교인들이 많고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개신교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이런 유감스러운 일이 생겼을까요? 그 이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 가는 이유

최근 어떤 글을 읽었습니다. 지방 중소도시에 사시는 부모님이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의 이야깁니다. 이 글쓴이가 처음에는 노인들이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교회에 가시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교회 집단 감염 사건을 보니 부모 또래의 신자들이 많은 것 같아, 왜 우리 부모님이 늘그막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시는지가 궁금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켜보니 첫 번째, 즐거우니까입니다. 두 번째, 교회에 가니 사람대접을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교회에 가면 무언가 모르게 희망차고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주술성에 기반한 공동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맹목적인 희망에 가득 차게 만듭니다.

교회는 무언가 계속 ‘거리’를 만든다고 합니다. 친목대회도 하고 퀴즈대회도 하고 찬양대회도 합니다. 쉴 틈 없이 놀거리를 제공합니다. 재미있는 일들이 많으니가 교회에 갑니다.

사람대접을 한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사회에서는 ‘하 씨’로 불리는 것이 고작인데 교회에 가면 ‘하 집사님’하고 깍듯하게 예우를 해줍니다. 밖에서는 변변한 대접을 못 받는데 교회에서 대우해주니 기분이 좋겠지요.

교회나 절이나 처음 접할 때에는 가족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마음으로 갑니다. 교회에서는 예배가 끝나고 나면 기도를 해주는 소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가족을 데려가면 소모임에서 오직 가족을 위해 기도해주고 목사님이 축복을 내려줍니다. 소원이 이뤄지는 유무를 떠나 희망이 생기도록 합니다.

위의 세 가지 이유로 교회에 갑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게 됩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면 우리 가족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광복절에 집회에 가자고 하면 가야 합니다.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내재된 ‘군집 욕구’

이렇게 해서 평범한 사람들이 광신도가 됩니다. 그 출발점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겠습니다. 교회에 가면 즐겁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즐겁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은 식욕, 수면욕, 성욕입니다. 기본 본능에 더해 재물욕, 권력욕이 있습니다. 이것은 날 때부터 인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제가 볼 때 인간은 군집본능이 있습니다.

혼자 있는 것보다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혼자 있으면 기분이 다운되고 지루하고 우울한데 같이 있으면 즐겁고 좋습니다. 사람은 무리지어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젊으나 늙으나 타고나기를 그렇습니다. 그러니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산책하는 것보다 복지관을 가든 교회, 절에 가든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함께 하면 즐거운 것입니다.

사족입니다만, 요즘 사회에서 종교의 경쟁자는 이웃종교가 아니라 복지관이라고 합니다. 아주 값싼 비용으로 즐거운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제 모친의 경우만 봐도 그렇습니다. 부산에 살 때는 보살선방에 다니면서 정진하셨는데 나이가 들어 김해로 거처를 옮기고서는 복지관에 다니십니다. 전에는 한 번씩 속가에 들르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하셨는데, 요즘에는 어쩌다 한 번 속가에 가면 복지관 차 올 시간이라고 안절부절 못하십니다. 왜 이렇게 복지관 가는 것이 중요합니까? 인간에게 내재한 군집욕구를 털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논지로 돌아가자면, 우리들 자신도 광신도가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것들의 출발은 우리 자신의 본능과 욕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을 때 초래할 수 있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일국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요즘 말로 대형사고만 치지 않으면 모든 권력이 자신의 것입니다. 부처님을 위한 궁전까지 지어줄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행동으로 재물욕과 권력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였습니다.

수행자들은 항상 청정해야 한다,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재물과 권력을 가까이 하는 것은 우리 안의 본능에 끌려가는 것이고, 그렇게 살았을 때는 깨달음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출가자들의 계율에는 음행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성욕을 겉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가자들에게는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고 하지요.

욕구와 본능은 다스릴 수 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재물욕, 권력욕, 성욕은 인간의 의지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스릴 수 없다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밥 먹지 말라고 이야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절대로 잠자지 말고 수행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식욕과 수면욕은 육신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있어야 수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능을 잘 다스리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본능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재물욕, 권력욕, 성욕을 다스릴 수 있듯이 군집 욕구 역시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습니다. 무소는 코뿔소입니다. 코뿔소는 뿔이 하나인데요. 사람들과 어울려 있다 보면 불필요한 번뇌가 생기므로,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황금 팔찌를 양손에 각각 차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팔찌를 한쪽 손에 함께 끼우면 걸을 때마다 쨍그랑 쨍그랑 소리가 납니다. 이처럼 불필요한 만남을 피하고 마치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스렸을 때 번뇌를 털어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식욕과 수면욕을 제외한 다른 욕구들은 우리가 마음으로, 의지로 잘 다스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구를 잘 다스려야만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시이기는 합니다만, 앙굴리마라같은 살인마가 되지 않고, 문제가 된 교회처럼 광신도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 본능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자비심으로 본능을 다스린다

다른 측면으로 볼 때, 만약 제 앞에 문제를 일으킨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제가 그 목사에게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멈추었으니 당신도 멈추시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휙 가버릴 것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왜 부처님의 말은 앙굴리마라를 감복시켰고 제 말은 목사에게 통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비심의 차이입니다. 정말 자비심이 가득 차있고 넘치면, 그 말의 내용에 감동받는 것이 아니라 자비심에 감화가 될 따름입니다. 그것은 수행의 힘으로 나오는 것이지 책 몇 권 보고 생각을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자비심을 길러야 합니다. 부처님만큼은 못 되더라도 자비심을 길러야 우리의 본능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우리가 우리의 본능을 다스리려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지금 뭘 하는지를 모르면 무엇을 다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유념해야 우리는 광신도가 되지 않고, 극단적으로는 앙굴리마라 같은 살인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이것도 기독교를 독실하게 믿는 분들에게는 의미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인간은 복(福)으로 산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경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제가 감히 생각건대, 부처님인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은 복(福)으로 산다.” 복은 과거에 내가 행한 업에 대한 과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올바른 행동, 착한 행동, 자비심에 근거한 행동을 했을 때 쌓인 선업의 과보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이야기할 때 복덕을 구족하신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복과 덕을 함께 갖췄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일까요? 흔히 절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이 없는 사람은 깨달아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람쥐 몇 마리, 토끼 몇 마리 앉혀놓고 법문을 합니다. 지은 복이 없어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지은 복이 너무나 많다보니 돌아가신지 2,5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사람들이 부처님 말씀을 따르고 부처님 말씀대로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단지 확철대오 하신 분이라고만 생각하지만, 그럴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복을 쌓은 분입니다. 부처님의 전생담에는 부처님이 얼마나 많은 복을 쌓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수두룩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선업을 많이 쌓았는가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복입니다. 과거에 지은 선업이 복입니다.

덕은 무엇입니까? 덕은 무언가를 얻는 것입니다. 지금 선업을 지으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사람은 항상 선업을 짓기 때문에 선업에 따른 과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복과 덕을 함께 갖춘 분입니다. 이 말은 과거에도 복을 많이 짓고, 현재에도 복을 많이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 복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으로 살려면 복을 지어야 한다

복으로 살려면 복을 많이 지어야 합니다. 복을 많이 지으려면 선업을 많이 지어야 합니다. 선업 중에 가장 큰 선업은 도를 깨치기 위해서 수행하는 행동에 따른 과보입니다. 열심히 수행하는 것은 자비심을 실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선업을 쌓는 것은 열심히 수행한다는 이야기이고 열심히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푼다고 하면 흔히 봉사를 떠올리는데요. 몸으로 봉사하고 입으로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마음으로는 은근하게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자비가 아닙니다. 몸으로 선업을 짓고 입으로 선업을 지어도 마음으로 선업을 안 지으면 그만큼 복을 까먹는 것입니다.

보시는 업입니다. 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상에 얽매이지 않고 보시를 하는 것이 바로 자비심을 베푸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 내 안에 좋은 과보가 쌓입니다. 그 좋은 과보로 내가 먹고 삽니다. 복이 많은 사람은 힘 들여서 일하지 않아도 술술 풀립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복도 많아!”라고 하는데요. 말 그대로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은 착한데 고생고생해도 뭔가 잘 안 풀립니다. 쌓은 복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남 탓 할 것 없습니다.

정리합니다. 물론 우리가 식욕이나 수면욕같이 필수불가결한 본능을 억제할 수는 없습니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은 빵 이외에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무언가가 바로 복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복으로 산다는 말씀을 드리며, 올바른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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